"꼬리를 흔들면, 몸통도 흔들리게 돼 있습니다"  

"아니, 의원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죠."

지난 5월 20일 양산에서 토크콘서트 '풍운아 채현국과 함께하는 세상이야기'가 열렸다. 이날 양산지역 한 경남도의원이 행사장에 참석하자 도의원에게 야무지게 따져 묻는 아줌마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시민단체 대표나 정당 관계자처럼 보이진 않았다. 마트나 재래시장에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아줌마'였다. 어쨌든 도의원은 논리가 딸리는 듯 횡설수설하다 행사장을 떠났다. 도대체 저 '아줌마'의 정체는 뭘까? 행사가 끝난 후 기자는 그가 김해양산환경운동연합 허문화 공동의장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아줌마 보통이 아니다 싶었다.

정말 평범했던 아줌마

허문화(45) 김해양산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양산시 하북면에서 태어나 양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고, 동아대학교를 졸업하고 경북대 대학원을 수료했다. 1996년 남편을 만나 1997년에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아 기르는 엄마였다.

사회생활이라고는 잠시 대학 조교를 했던 것, 1994년부터 2000년 둘째 낳기 전까지 논술을 가르쳤다. 2000년 둘째를 낳고 8년 동안 육아에만 전념하다 2008년 방과후 논술교사를 시작한 것이 다였다. 이 외에도 앙산문인협회 회원으로 가끔 글을 쓴 게 약간 이색적이지만, 그가 지금 달고 있는 김해양산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이라는 타이틀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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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래도 약간 뭔가 끼가 있어야 사회운동을 할 수 있지 않나요?

"이런 적은 있습니다. 2006년경에 유치원 원장이 학부모 몰래 유치원을 팔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학부모들과 같이 움직이면서 법을 찾아보니 유아교육법에도 어긋나고, 학부모 동의도 받도록 해놨더라고요. 교육청에 항의도 하고 항의방문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원장은 유치원을 못 팔게 됐고, 유치원은 문을 닫게 됐습니다. 제가 당시 느낀 점은 '혼자 아무리 해봐야 안 되는구나. 뭉쳐야 하는구나'를 느꼈습니다. 학부모 20명이 움직이니까 쟤들도 움직이더라는 거죠."

그러나 그게 다였다. 이후 그는 평범한 주부로 복귀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평범' 이외에 다른 수식어를 붙이기 어려운 '보통사람'이었다.

산단, 골프장…현실에 눈을 뜨다

2011년 양산시는 상북면 석계리 일대 92만㎡에 석계2일반산업단지를 짓는다고 발표했다. 사실 허 의장도, 다른 주민들도 석계산단의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13년 7월 허 의장은 신문을 들추다 석계산단 약도를 보게 됐다.

"약도를 딱 보니 우리 아이가 다니는 양주중학교와 너무 가까운 겁니다. 저도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그 길로 학부모들과 위천마을 어르신, 양주마을 어르신과 함께 15개월가량 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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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이야 그렇다 치고, 학부모들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제가 방과후 논술을 오랫동안 가르쳐 왔고, 예전에 학원도 했습니다. 학부모들을 많이 알고 있죠. 또 아이가 2명 있으니 친한 학부모들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학부모·어르신들과 15개월 동안 싸웠습니다.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석계수영장 앞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지금 석계산단은 어떻게 됐습니까? 승인이 난 걸로 알고 있는데요.

"네. 2014년 10월 경남도에서 조건부 승인이 났습니다.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것을 제한하는 조건입니다. 물론 조건부 승인도 기만입니다. 산단에 들어오고 나서 용도전환이나 업종변경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석계산단 말고도 양산에 환경이슈가 될 만한 게 있습니까?

"많습니다. 소토초등학교 뒤편에 산막공단, 어곡초등학교 뒤편에 어곡산단, 동산초등학교 주변에 가산공단을 진행 중입니다. 또 경남외고 뒤에 어곡골프장, 유산공단에는 업종변경을 통해 화학공장이 많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반대하면 비판이 들어오지 않습니까?

"네. 어떤 사람은 '개발해야 먹고살 거 아닙니까?'라고 합니다. 저도 공장이 오거나 미개발 지역 개발을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발을 하더라도 아이들 있는 학교 주변은 안 된다는 겁니다. 피해가 없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개발하는 걸 누가 뭐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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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개발이 이뤄지는 것을 막기는 쉽지 않은데요. 어떤 활동을 하셨습니까?

"정말 어렵습니다. 단순 집회나 시위만으로는 안 됩니다. 사실 석계산단만 하더라도 고위 공무원으로 있던 사람이 퇴임한 지 얼마 안 돼서 자신의 업무와 연계된 석계산단 간부로 갔습니다. 2년 안에 갔으니 법을 어긴 것 아니냐? 계속 서류를 만들어 올려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답이 옵니다. 그래도 우리가 글을 올릴 수 있는 곳에는 다 올려봅니다. 인권위, 청와대, 환경부, 국토부, 행자부, 감사원, 경남도 감사관실, 양산시 감사관실, 양산시 행정사무감사 등 정말 서류를 넣을 수 있는 곳에 다 넣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은 너무 실망스럽죠."

-김해양산환경운동연합 명칭이 좀 이색적입니다. 김해와 양산을 어떤 근거로 묶은 거죠?

"석계산단 반대 운동 하다가 우연히 김해 봉림산단 반대 운동하시는 분들과 마주쳤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양산과 김해가 정말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산단문제나 난개발 문제가 곳곳에서 벌어집니다. 그리고 사실 양산과 김해는 인접한 도시입니다. '우리 같이 해볼까' 얘기가 된 겁니다."

그래도 '두 집 살림'을 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회원이나 구성은 어떻게 돼 있습니까?

"회원은 200명 정도 되고, 사무국은 김해에 있습니다. 월 회비는 150~200만 원 정도 들어옵니다. 김해에 강재규 교수님과 박재현 교수님, 그리고 저를 포함해 세 사람이 공동의장입니다."

-제 선입견인지 모르겠으나 양산엔 시민운동이 활성화가 안 된 것 같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래도 최근 학부모들이 많이 활동을 하기 때문에 활력이 생겼습니다. 안행주라고 '안전하고 행복한 양산만들기 주민모임'이 웅상지역에 생겨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실 작년 세월호 참사 때 양산이 세월호 시민분향소가 제일 먼저 생겼습니다. 그것도 양산시 지원으로 말입니다. 학부모들과 함께 시청에 글 올리고 경남도와 시청에 계속 전화했습니다. 애도도 못하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4월 30일 분향소가 마련된 것입니다. 문자 보내고 게시판에 글 쓰고 하는 것이 겉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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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과 많이 아신다고 하셨는데, 학부모들이 다 이런 활동에 동의하지는 않을 텐데요. 

"네. 사실 저도 인맥을 몇 개 그룹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사안에 따라 다른 학부모들과 논의합니다. 앞서 말한 분향소 건은 저도 양산 토박이니까 동기 동창과 후배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아는 동생들과 함께 했습니다."

-참, 고리 원전 1호기 폐쇄가 결정 났는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작년 12월부터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나눠주면서 고리 원전 1호기 폐쇄를 위해 매주 집회를 했는데,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왜 2017년에 가동 중지하냐는 겁니다. 지금 당장 중지해도 됩니다. 전력 생산을 0.5%도 못 하는 발전소입니다. 바로 폐쇄하자는 것이 저희 입장입니다."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면 가치있어

-제가 알기로 양산지역 학교 급식 문제도 활동을 많이 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작정을 하고 한 게 아닙니다. 밴드(무상급식지키기 집중행동 양산시 학부모밴드)를 만들어서 학부모들과 얘기를 좀 해보자, 200명만 들어와도 좋겠다 싶었는데, 이틀 만에 1000명이 넘었습니다. 밴드를 연 날이 3월 8일인데 개학 직후입니다. 학부모들도 답답했던 차에 밴드가 생기니 그리로 몰린 것 같습니다."

-학부모들이 학교 급식 문제에 이렇게 폭발적인 반응을 하는 이유는 뭔가요? 

"무상급식은 일종의 자존심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돈을 내고 우리 아이가 수혜를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학부모와 소통이 있었어야 하는데 아무런 소통 없이 개인의 마음대로 결정됐습니다. 사실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급식비 내면 됩니다. 그 돈 아까워서 이러는 것 아닙니다. 급식은 교육이라는 기본 전제를 어머니들은 깔고 있습니다. 이것을 개인 마음대로 결정한 것에 분개한 겁니다. 거기다가 양산시에서도 일방적인 통보식입니다. 아주 만만하다고 그냥 짓뭉개버린 겁니다. 거기에 대한 항거입니다. 특히 학부모들은 아이들 문제가 걸리면 못 참습니다."

-요즘 학부모들 사회 인식이 좀 바뀌었습니까?

"제가 보기엔 좀 바뀐 것 같습니다. 내 아이만 챙기다가 공동체 의식이 많이 자란 것 같습니다. 물론 세월호 영향도 있습니다. 모두 함께 가슴 아파했지 않습니까? 내 아이 말고도 다른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환경단체 의장이신데 학교 급식 문제에 나서기가 애매하지 않나요?

"글쎄요. 환경만 지키면서 살 수 있나요? 살다 보면 다급한 일이 생깁니다. 유연하게 움직여야죠. 예를 들어 학교 급식 문제는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움직여야 하는 일이고, 고리 원전 문제는 길게 보고 접근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런 것을 보고 판단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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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도교육청에서 초등은 무상급식, 중등은 선별급식으로 하되 소규모 학교는 무상급식하자는 안을 내놨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괜찮다고 봅니다. 초등은 무상급식을 하기 때문에 어쨌든 도교육청은 무상급식 한 축을 지킨 것이고, 도의회 입장에서도 중재 효과가 나타난 것이니 명분을 챙겼다 봅니다. 2012년 안으로 돌아간 것인데, 물론 학부모들은 작년 예산으로 환원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깜짝 놀랐다. 정치 평론가 혹은 정치 전략가 같은 대답이 나왔다. 오랫동안 싸우고, 숱한 글을 쓰다 보니 학부모들도 이젠 반 정치인이 돼 가는가 싶었다.

-서민자녀교육지원사업은 어떻습니까?

"양산시에서는 예산을 안 잡았습니다. 경남도에서 자기 예산으로 바우처 사업을 하는 걸 어쩌겠습니까? 참 재밌는 게 지금 학습지 회사에서 전화가 많이 옵니다. 여민동락 카드(교육비 지원카드)가 있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결국 서민자녀교육지원이라는 것이 학습지 회사 배만 불려주는 것 같습니다. 학습지 하나 더 한다고 해서 학생들 교육수준이 높아질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지금 학부모들이 급식 문제로 나선 지 3개월이 지났습니다. 이제 좀 지칠 때도 되지 않았나요?

"처음부터 저희도 그걸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공원에서 가족 집회를 열거나, 교육감과 밥 이야기를 하거나, 일전에 채현국 이사장 모시고 토크콘서트 한 것처럼 문화행사도 좀 열곤 합니다. 지치지 않도록 노력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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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을 열심히 하시는데, 가족들은 뭐라고 하지 않나요?

"어머니가 그러십니다. '왜 네가 나서야 하냐고?'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다른 사람들은 다 놀러 다니고 쇼핑하는데. 그래서 제가 되묻습니다. '왜 제가 하면 안 되나요?' 제가 놀랬던 게 석계산단 하면서 어르신들이 한 분도 타협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죽어도 같이 죽자는 모습에 제가 끝까지 하면 뭔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조금이라도 변할 수 있다면 할 가치가 있는 겁니다. 제가 요만큼 변화시키면 제 다음 사람이 요만큼 조금 더 변화시키겠죠."

배운 자보다 스스로 깨친 자가 훨씬 무섭다고 했던가? 허 의장과 학부모들의 활약을 들으면서 스스로 깨친 자의 위력을 느꼈다. 집회 참석을 못하는 학부모는 '사이버 시위대'가 돼 문자를 보내거나 게시판에 글을 쓴다. 자고 일어나면 베란다에서 양산 전경을 보며 혹시 산을 건드리지 않았나 새로 공사를 한 곳은 없나 살펴본다. '꼬리를 흔들면 몸통도 흔들리게 돼 있다.' 허 의장이 모토로 삼는 전략이다. 과거 사회운동이나 노동운동이 정체됐다고 비판을 자주 받는다. 하지만 비판하는 입장에서도 마땅한 대안을 내놓기 쉽지 않았다. 허 의장과 양산학부모들의 활동을 보면서 그 대안이 슬며시 보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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