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우뚝 서서 어떤 세속의 일에도 흔들림 없던 군자' 조선 22대 국왕 정조가 채제공(蔡濟恭, 호는 번암, 1720~1799)을 평가한 글이다. 조선조에는 이른바 명재상이 많았다. 인구에 널리 회자되는 황희를 비롯해 이원익 류성룡 같은 이가 그들이다. 이 가운데서도 '3년 독상(獨相)'이란 진기록으로 유명한 채제공은 당쟁이 숙명처럼 뿌린 내린 시절, 중흥조 정조를 도와 조선 후기 치세를 이끈 인물이다.

독상이란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가운데 한 사람이 홀로 재상을 맡았다는 말이다. 채제공은 정조 시절 영의정, 우의정이 공석인 상황에서 좌의정으로 3년 동안 홀로 국정을 이끌었다. 왕으로부터 깊은 신뢰를 얻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79세까지 장수했던 그가 죽자 정조는 이렇게 말한다. "지난 밤에 소식을 들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떠났단 말인가! 나는 참으로 이 대신과 오직 나만 아는 오묘한 관계가 있었다. 그는 강한 기력을 지녔으며, 일을 만나면 두려워하지 않고 바로 나아갔다. 참소가 빗발칠 때도 그 재능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사람들로부터 '저렇게 신임을 독점한 사람은 예전에 없었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굳게 간직한 지조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만저만한 찬사가 아닐 수 없다. 고굉지신(股肱之臣 다리와 팔과 같은 신하. 왕이 가장 아끼고 믿는 신하를 일컫는 말)이 아니고서는 들을 수 없는 말이다. 그는 어떤 사람이기에 조선 후기 중흥조인 정조로부터 이토록 두터운 대접을 받았을까?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간 채제공은 정승시절 당쟁의 핵심원인이었던 이조전랑(吏曹銓郞) 통청권(通淸權 정3품 이하 주요 문신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과 자대권(自代權 후임을 자신이 직접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을 혁파하자고 주장, 국왕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당쟁을 완화하고 탕평을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또 신해통공(辛亥通共)으로 일컬어지는, 자유로운 상업활동 보장조치도 완성했다. 이 조치로 시전의 금난전권(禁難廛權, 국역을 부담하는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이 서울 도성 안과 도성 아래 10리 이내 지역에서 난전의 활동을 규제하고, 특정 상품에 대한 전매 특권을 지킬 수 있도록 조정으로부터 부여받았던 상업상 특권)이 폐지되면서 당시 활발하게 성장하던 상공업이 크게 촉진된다. 독과점을 철폐해 경제를 살린 이 조치에 대해 후인들은 채제공이 지닌 정치경륜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독상이란 말이 풍기듯 얼핏 보면 채제공은 막중한 신임을 바탕으로 거침없는 행보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는 남인 계열이었다. 세도를 자랑하던 노론으로부터 엄청난 핍박과 견제를 받았다. 탄핵을 받아 벼슬을 사직하고 7년동안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그는 목숨을 바쳐 사도세자를 구하려고 애썼으며, 수원 화성을 쌓는 총책임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권신(權臣) 홍국영이 세도를 부릴 때 억울하게 당한 사람을 모두 신원해 명예를 회복시킨 건 채제공이다." "유능한 인재들을 강력히 추천하고 발탁해 행정과 통치가 제대로 이뤄지도록 임금을 설득한 경륜을 지닌 이도 채제공이다." 그에게 쏟아지는 찬사다.

다산 정약용은 <번옹화상찬(樊翁畵像贊 번옹 채제공 초상화에 붙인 글)>에서 이렇게 칭송했다. "그 웅위하고도 걸특한 기개는 / 천 길 높이 깎아지른 절벽의 기상이었지만 / 남을 해롭게 하거나 사물을 해치려는 생각은 / 조금도 마음에 두질 않았네 / 군자답도다, 이 어른이여 / 이런 분이 아니면 백성들이 그 누구를 믿겠는가"

모든 인간은 훼예포폄(毁譽褒貶)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를 원수처럼 대한 정적이 아니고서는 사후에 아무도 채제공에 대한 평가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조선조 사대부가 걸어간 길 중에 이만한 길이 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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