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 문화 활동 주체가 될 수 있다
 

'금맥만 노다지가 아니다.' 여충렬(59) 대표는 책 속에서 우리의 노다지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노다지서점'이라는 상호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노다지서점이 창원역 근처에 있었다고 기억하는 지인들이 있었는데 여 대표는 12년 전 서점을 지금의 팔용동 자리로 옮겼다고 했다.

노다지서점은 대형 상가 1층에 크지 않게 자리하고 있지만 오가는 사람들 눈에 잘 띈다. 서점은 20년 넘게 여 대표와 아내 김연희(58) 씨의 힘만으로 운영하고 있다. 오래된 서점이지만 노다지서점은 머물러있지 않는다. 늘 활발하게 움직이며 '서점 문화'를 만들어가는, 노란 간판만큼이나 '생기 있는' 서점이다.

노다지서점이 있는 창원시 팔용동은 창원역 건너편을 중심으로 시작하는 상점가와 근처의 대단지 아파트, 다세대 주택, 상업용 빌딩이 밀집한 곳이다. 평일 오전에 찾아간 탓인지 팔용동 거리는 저녁 시간대의 북적이는 모습과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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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인 기자

서점 안으로 들어가자 빼곡하게 꽂힌 책이 눈에 들어오는데 작은 공간을 효과적으로 나누어 책을 배치한 정성이 보인다. 특이한 점은 책 대부분이 참고서나 문제집이라는 것이다. 학교와 학원가가 있는 주변 환경 때문도 있지만 요즘은 당장 필요하지 않는 책은 주로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교재가 팔리는 비율이 70%로 높아졌다고 했다.

손발이 척척 맞는 부부

노다지서점의 직원은 여 대표와 연희 씨 둘이다. 여 대표는 젊은 시절부터 발병한 병 때문에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여의치 않다. 10시 50분, 여 대표가 몰고 온 차가 서점 앞에 선다. 총판에 가서 주문한 책을 가져오는 길이다. 연희 씨는 차에서 내린 책을 거뜬히 들고 서점 안으로 옮긴다.

"책을 가져오면 우리 사모님이 정리하고 제가 컴퓨터로 책 정보를 입력해요. 그리고 아내가 3시간 정도 운동하러 가거나 자기 시간을 가지면 제가 가게를 보죠."

부부는 어떻게 서점을 차리게 되었을까. 아내 연희 씨의 말도 듣고 싶었지만 연희 씨는 남편에게 들으라며 웃으며 말을 아꼈다. 여 대표는 기억을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둘 다 부산이 고향인데 저는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구미공단에서 74년도부터 일을 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몸에 증상이 나타나긴 했는데 그때는 불편함이 없는 정도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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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인 기자

여 대표의 병은 '근디스트로피'. 유전적인 요인으로 근위축과 근쇠약이 조금씩 진행되는 질환이다. 연희 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여동생의 친구였다고 했다.

"결혼할 때 부딪히는 일이 없었어요. 아내는 제가 가진 장애를 알았는데도요. 저를 믿고 신뢰했었던 것 같아요."

부부가 된 후 두 아이가 생겼고 가족은 마산으로 터를 옮긴다. 여 대표가 33세일 때였다.

"마산에 친척이 꽤 있었어요. 친척 할아버지가 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할 수 있게 소개를 해줬어요. 마산합성초등학교 앞에 문방구를 열었죠. 문구류, 완구류, 책 같은 걸 취급했어요. 그러다 88년도에 교통사고가 났는데 그때부터 병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버렸어요."

점점 불편해지는 몸을 부부는 함께 이겨냈다.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문방구를 운영했다. 문방구의 이름은 '재미나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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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가 우리말이었음 좋겠더라고요. 한문에서 따온 말이긴 하지만. '재미나다'라는 말은 우리말처럼 쓰잖아요. 아이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이름 같았고 또 아이들이 재밌게 다녀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재미나문구라고 이름 지었죠."

재미나문구에서 노다지서점까지

재미나문구는 아이들에게 꽤 인기가 좋았다. 특별히 필요한 게 없어도 문방구를 그냥 못 지나치는 아이들로 늘 북적였다.

"우리 문방구에 아이들이 제일 많이 오곤 했어요.(웃음) 또래 아이를 키우니까 아이들 눈높이에서 대하고 이야기하고 그랬죠."

부부는 꼬마 손님들을 늘 살갑게 대했다. 문방구에 와서 복작복작 떠들던 아이들이 지금은 성인이 되었지만 연희 씨는 아직도 아이들 얼굴을 기억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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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인 기자

"아이들이 자라서 가끔 서점에 오기도 하는데 얼굴을 알아보겠더라고요. 그래서 '니 OO네.' 하고 알아보면 신기해하더라고요. 어떤 날은 서울에 갔는데 지나가던 사람 중에서 어릴 때 우리 문방구에 왔던 아이와 닮은 얼굴이 스쳐가더라고요."

부부는 재미나문구를 6년 만에 정리했다. 잘 되던 문방구를 접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겟세를 내고 문방구를 하고 있었는데 주인이 비켜달라고 하기도 했고요. 그때 우리 큰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 될 때였어요. 초등학교 때에는 아이 학교 앞에서 가게를 하니까 아이를 잘 볼 수 있고 교육 여건도 나쁘지는 않았죠. 문방구를 접고 가족끼리 할 수 있는 것 중 교육에 도움이 되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어요. 문득 문방구에서 책을 팔기도 했으니까 그쪽 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주변 지인들은 몸이 불편하니 비교적 편안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오락실, 모텔 등의 업종을 추천했다. 하지만 부부는 더 힘을 들여야 하는 서점을 택했다.

"불교의 중요한 교리인 '팔정도(八正道)'에 '정업(正業)'이라는 말이 있어요. '바른 일'을 말하죠. 저희는 바른 직업을 갖고 싶었어요. 그러면 아이들도 그만큼 따라오지 않을까 싶었죠."

그렇게 93년 창원역 맞은편에 노다지서점이 들어선다. 역 앞이니만큼 안정적인 유동인구가 있을 것 같았고 마산과 이어지는 위치라 이만한 자리는 없다 싶었다. 부부는 그 자리에서 11년 동안 서점을 운영하다 2003년 지금의 팔용동으로 서점을 옮겨왔다.

"창원역 근처에서 할 때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나중에는 팔용동 쪽으로 상권이 조금씩 옮겨가는 바람에 장사하기가 좀 힘들었어요. 처음 이곳에 왔던 때가 아파트가 많이 생기고 한창 떠오르기 시작하던 때였어요. 지금처럼 빽빽이 건물이 있지는 않았고 듬성듬성 하나씩 건물이 지어지던 시기였죠."

문화 활동 사업으로 지역민에게 다가간다

인터뷰 전 섭외를 위해 한 통화에서 여 대표는 "우리 집은 구멍가게인데요."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지난 3년 동안 이 작은 서점이 벌인 일들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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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지서점은 2013년과 2014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지원을 받아 진행한 '지역서점 문화활동 운영지원' 사업에 참여해 활동을 벌였다.

사업 첫해인 2013년에는 다문화가정 다섯 가족과 일반 가정 다섯 가족이 만나 소통하는 '다문화 가족 독서캠프', 이영득 동화작가의 북콘서트 등을 열었고 작년인 2014년에는 아이들의 창의력을 기르는 활동과 지역주민과 함께 백제문화권 탐방을 했다. 부부의 힘만으로 부친 부분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고향의봄도서관의 도움을 받았다. 노다지서점은 2013년 지역서점 문화활동 운영지원 사업에서 우수 운영 인증패를 받기도 했다.

"작년에 백제 문화권 탐방을 다녀오신 분들이 정말 유익한 하루였다고 말씀해주셔서 보람을 느꼈어요. 창원시보를 통해 홍보했는데 이틀 만에 인원이 다 찼어요. 올해는 어떤 활동들을 할지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아무래도 독서 행사는 가을이 되어야 시민이 활발하게 참여하고 행사하기도 좋더라고요. 가을로 시기를 맞춰서 준비하려고 해요."

여 대표는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며 말을 아꼈지만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는 박목월 시인을 기리는 문학기행을 구상 중이라고 했다. 

문화 활동 지원비 300만 원의 많지 않은 예산으로 여러 가지 행사를 치르려면 서점은 연희 씨에게 맡기고 바쁘게 다녀야 하고 이것저것 신경 쓸 것도 많다. 하지만 부부는 앞으로도 노다지서점과 지역민이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기꺼이 참여할 것이라고 했다. 

공부하고 싶은 게 아직도 많아

서점을 운영하며 문화 활동 준비를 해야 하는 등 할 일이 끊이지 않지만 여 대표는 틈틈이 공부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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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오시는 손님 중에 '좋은 책 하나 골라주이소' 하는 사람도 있고, 이것저것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좀 알아야겠더라고요. 그래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늦게 시작했어요. 문화교양학과는 역사든 철학이든 사회교양이든 모든 걸 망라해서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 공부를 하다가 다른 분야에도 관심이 생겨서 평생교육사 자격증, 청소년지도사 자격증,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갖게 되었죠. 2급이지만요.(웃음) 지금도 감각을 유지하려고 국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중 청소년학을 공부한 이유는 주 고객이 어린이와 청소년이기 때문이다. 두 아들은 이미 자라 건실하게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있지만 여 대표는 어린 손님들에게 아들에게 하듯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고 싶을 때가 있다고 했다.

"고등학교 2학년 정도 되는 아이인데 그 아이 아빠, 큰 아빠랑 친분이 있어서 평소에 안면이 있었어요. 어느 날 그 아이한테 앞으로 뭘 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평소에 엄마한테 꼼짝 못 하고 지내서 그런지 '글쎄요. 아직 정한 게 없어요.'라고 해요. 그냥 수능 점수에 맞춰서 대학교에 갈 생각인 거겠죠. 그래서 '네가 제일 잘한다고 생각하는 걸 엄마 아빠한테 얘기해봐'라고 하니 '엄마, 아빠한테 안 먹힐 건데요.'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간절하게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엄마, 아빠에게 얘기를 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건 너한테 달려있다고 얘기를 해주니 끄덕거리면서 수긍을 하더라고요."

서점 운영 어렵지만 후회한 적 한 번도 없다

참고서를 구입한 손님에게 여 대표가 손님에게 전화번호 뒷자리를 묻는다.

"7251이요."

"네. 적립되었습니다."

노다지서점에서 책을 사면 구입 금액의 5%를 적립할 수 있다.

"책값을 못 가져온 애들이 '아저씨 포인트로 해요.' 그러면 적립되어 있는 포인트로 계산해주고 그러죠.(웃음) 마진이 20%라고 치면 마진의 4분의 1을 포기하는 거예요. 이게 마진도 별로 없는 장사인데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인터넷서점에서는 사은품도 주고 하니까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래도 부부는 서점을 시작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정보를 전하는 매체가 다양해져 책의 역할을 다른 매체가 나눠 가지게 되었지만 책만의 가치는 대체할 수 없이 분명하기 때문에 서점 문을 계속 열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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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가 나오기 전에는 대나무를 쪼개 만든 죽간(竹簡)이라는 것에 정보를 담았죠. 삼국지도 죽간에 썼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후에 종이로 책이라는 걸 만들어 정보를 담았는데 지금은 책, 컴퓨터, CD, 인터넷 등 갖가지 방법으로 정보를 다 얻죠. 그래도 가장 정보를 올바르게 오랫동안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책이라고 봅니다. 책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 책처럼 마지막까지 서점을 하고 싶어요. 수입이 예전만 못해 반 토막이 났어도 괜찮아요. 이제 노년기에 접어드니까 큰 수입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어요. 검소하게 살면 됩니다. 우리가 팔용동 원조 서점이에요. 그러니 지켜가야죠."

이 일은 무엇보다 부부에게 정업(正業)이었다. 많은 금이 묻힌 노다지는 아니었지만 이들에게 서점은 살아가는 내내 무엇보다 든든한 존재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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