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도시는 시간의 흔적을 어떻게 간직하고 있는가

매년 6월 16일이면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 거리는 20세기 초 복장을 하고 무리지어 걸어다니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어떤 건널목 앞에 모여선 그들 앞에 가이드로 보이는 이가 서서 한 대사를 읊조리고 해설한다.

"그들은 소설에서 서로 간격을 두고 바로 이 길을 건너갔습니다. 스티븐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 빨간불이 켜졌지요."

6월 16일은 아일랜드의 대문호이자 20세기 영문학의 혁명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제임스 조이스의 대표작 '율리시스'의 배경이 된 날짜다. '율리시스'는 주인공인 헝가리 출시 유대인 레오폴드 블룸이 1904년 6월 16일 오전 8시부터 이튿날 새벽 2시까지 더블린 시내 구석구석을 방황한 행적을 상세하게 그린 작품이다. 율리시스가 오딧세우스의 라틴어 발음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서양 문화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를 패러디한 것이다. 등장인물의 구색도 그렇고, 18장으로 구성된 형식에서도 그렇다.

제임스 조이스를 있게 한 더블린

전 세계의 조이스 애호가들은 바로 이날을 기념해 더블린에 모여 들어 하루종일 축제를 즐긴다. 이날을 주인공의 이름을 따 '블룸스데이'라고 부른다. 축제는 작품의 내용과 같이 정확하게 오전 8시 더블린 시내 제임스 조이스 센터에서 시작된다. 작품 속 블룸이 그 시각에 아침 식사로 먹었던 돼지 콩팥 요리가 제공되고 전 세계에서 모여든 조이스 애호가들은 돼지 오줌 지린내를 참아가며 마치 중요한 의식을 치르듯 꾸역꾸역 그 음식을 먹는다. 그렇게 사람들은 오감을 총동원해 조이스가 묘사한 더블린을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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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룸스데이를 맞아 제임스 조이스박물관 옥상에서 율리시스를 낭독하는 애호가들(2009년, 위키피디아)

조이스에게 더블린이란 도시는 매우 각별했다. 그의 데뷔작인 '더블린 사람들'(1914)부터 뒤이은 작품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6), 그리고 '율리시스'(1922)까지 세 작품을 흔히 '더블린 3부작'이라고 부를 정도로 더블린은 조이스에게 영감 그 자체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조이스가 더블린을 대단하게 찬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20세기 초 아일랜드에 팽배했던 민족주의 성향의 문예부흥운동을 국수주의적이고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하며 1904년 아일랜드를 떠나 유럽을 떠돌았다. 더블린을 그린 그의 작품들도 고국 아일랜드는 물론이고 영어권 문학시장에서 철저하게 배격당했다. 그의 데뷔작 '더블린 사람들'은 영어권이 아닌 프랑스에서 겨우 출판될 수 있었고, '율리시스'는 영국과 미국에서 음란 출판물로 판정받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조이스의 작품에 대한 영국, 아일랜드 문단의 무시와 냉대는 그가 비판하고 떠난 당사자여서이기도 했지만, 그가 그리는 더블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매우 적나라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열다섯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더블린 사람들'에서는 더블린 중산층의 삶을 통해 더블린 전역에 퍼져 있는 정신적, 문화적, 사회적 병폐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김경욱, 한국 작가가 읽어주는 세계문학 : 더블린 사람들).

율리시스가 영국에서 정식으로 출판된 건 프랑스 파리에서 최초로 출간된 지 14년만인 1936년이었고, 공공도서관에 비치된 건 그보다 34년이 더 흐른 1970년이었다. 그마저도 소설 내용이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일반인 열람은 금지됐고 사서들만 볼 수 있었다고 한다(배문성, 인물세계사 : 제임스조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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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초판(1922년, 위키피디아)

격세지감이라고 할까. 1904년에 아일랜드를 떠나 1941년에 취리히에서 죽을 때까지 더블린을 다시는 찾지 않은 조이스였고, 아일랜드 문단 또한 조이스의 더블린 묘사를 불온하게 여겨 상당 기간 백안시했지만, 오늘날의 더블린은 조이스 없이는 설명이 안 될 정도로 도시 구석구석에 조이스의 흔적을 표시하고 있다. 조이스산업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19세기말 20세기 초의 더블린이 조이스의 작품을 빚어내는 토양이 됐다면, 오늘날의 더블린은 조이스의 작품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이스탄불 소설가 오르한 파묵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은 터키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터키 작가로 불리기보다는 '이스탄불' 작가로 더 자주 불린다. 작가 스스로도 "나는 이스탄불 소설가입니다"라고 소개한다. 제임스 조이스를 더블린 없이 떠올릴 수 없듯이 오르한 파묵 또한 이스탄불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작품들은 이스탄불에 깊이 천착하고 있다.

그는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자랐고, 지금도 거기에서 살고 있다. 그의 다섯 살 때부터 스물두 살 때까지의 이야기를 에세이 형식으로 쓴 '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은 이스탄불이 왜 그의 문학적 자양분이 됐는지를 설명해주는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파묵의 책을 전문적으로 번역하고 있는 이난아 계명대 교수는 그래서 "오르한 파묵을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먼저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파묵이 이스탄불에 집착하는 이유가 이 책에 고스란히 고백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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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의 '터키 : 도시 그리고 추억' 초판(위키피디아)

파묵에게 이스탄불은 침울하고 어중간한 경계 도시였다.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오스만 600년 제국의 수도로서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이스탄불이었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이 패망하면서 "몰락의 정서와 가난, 그리고 도시를 뒤덮은 폐허가 부여한 슬픔"이 지배하는 도시가 되었다. 그는 종종 "몰락하여 붕괴된 제국의 잔재, 잿더미 아래서 무기력, 빈곤 그리고 우울과 함께 퇴색되며 낡아가는 이스탄불에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꼈다(이난아,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터키문학).

그는 이스탄불의 수많은 뒷골목과 폐허 사이를 돌아다니기 좋아했다. 흔히들 말하는 인간적인 느낌이나 고유의 전통문화 때문이 아니었다. 어렸을 적 불행했던 가정환경(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와 삼촌이 가산을 탕진하면서 가족 간 불화와 방치된 환경 속에서 자랐다)과 몰락한 제국 수도의 풍경이 절묘하게 결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골목과 폐허를 걸으며 이스탄불을 치밀하게 탐구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과 이스탄불 사람들의 정체성을 발견하려고 애썼다.

그가 바라본 이스탄불은 동양도 아니고, 서양도 아니고, 유럽도 아니고, 아시아도 아니었다. 터키 인구 98%가 이슬람을 믿는다지만, 그렇다고 이스탄불이 완전한 이슬람 도시라고 할 수도 없었다. 정체성이 모호한 도시, 이제는 세계의 변방으로 밀려난 도시와 씨름하며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고 애쓴 사람이 바로 파묵이었다. 파묵은 이스탄불이 "순수하기 때문이 아니라, 복잡하고, 불완전하며, 폐허가 된 건물들의 더미이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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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와 성당, 그리고 빌딩이 혼재하고 있는 이스탄불 경관(위키피디아)

작가의 도시와 독자의 도시 사이

20세기에는 제임스 조이스 덕분에 더블린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면, 21세기에는 오르한 파묵 때문에 이스탄불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 두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역설적인 부분은 정작 더블린과 이스탄불을 이야기한 두 작가는 자기 도시 자체를 그다지 긍정적인 공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이스에게 더블린은 인간의 밑바닥이 드러나는 곳이었고, 파묵에게 이스탄불은 몰락의 슬픔에 빠진 도시였다.

흔히들 착각하는 부분이 있다. 도시를 스토리텔링한다면 무조건 예쁘게 보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다른 도시보다 뛰어난 경쟁력, 분홍빛 미래를 약속하는 도시 경제, 품위 있는 문화예술과 찬란한 역사유적, 화려한 볼거리와 짜릿한 즐길거리 등을 종합선물세트로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른바 대문호들이 하고 싶은 도시 이야기는 도시라는 맥락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적나라한 모습이었다.

물론 작품이라는 스크린을 통해 도시를 바라보게 되는 독자는 작가가 탐구했던 도시와는 다른 색깔의 도시를 발견하게 마련이다. 인간의 밑바닥이든 몰락의 슬픔이든 그 도시가 작가의 관점으로 '재구성'될 때 독자는 도시를 읽어내는 통찰의 즐거움을 갖게 된다. 그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도시의 매력은 도시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구성 능력에서 비롯된다.

제임스 조이스와 오르한 파묵을 가진 더블린과 이스탄불은 분명 세계적으로 복 받은 도시다. 도시 스토리텔링을 하겠다고 도시 당국이 특별한 조치(?)를 취한 것도 없지만, 두 작가는 치열하게 도시와 도시인들을 탐구했고, 그 결과물이 세계적으로도 크게 인정을 받았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조이스나 파묵 같은 걸출한 스토리텔러를 우리 도시에 모실 수 있다면 도시 스토리텔링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시간의 흔적'이 스토리텔러를 유혹한다

사실 걸출한 스토리텔러를 우리 도시로 모시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예술인의 작업실을 제공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비롯해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조이스와 파묵은 이처럼 '기획에 따라 움직이는' 작가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나고 자란 도시를 스스로 탐구했고, 완벽한 자율성에 발을 디디고 다양하고 힘 있는 이야기를 풀어냈다. 훌륭한 도시 이야기를 만들게 된 원인을 굳이 찾는다면 바로 그 '자율성'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점 또한 수정될 필요가 있다. 성급하게 도시 이야기를 만들겠다고 덤빌 게 아니라 잠재적인 도시 스토리텔러들이 자율적으로 도시를 탐구하고 이야기할 수 있게 하는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어쩌면 이 관심이 도시 스토리텔링을 위해 도시 당국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책이 아닐까? 물론 조이스는 아일랜드 당국의 냉대와 견제에도 불구하고 더블린 이야기를 했지만.

조이스가 율리시스를 쓰기 시작한 건 더블린을 떠난 지 10년 후였다. 외국에서 쓰기 시작했고, 작품을 위해 따로 더블린을 취재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조이스는 율리시스가 더블린의 지도 대용으로 손색이 없다고 강조했다. 심지어 지구상에 더블린이 사라지더라도 율리시스를 보고 재건할 수 있을 거라고 호기를 부렸다. 실제 작품에서 더블린은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10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도 충분히 사용 가능할 정도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도시의 골격과 세세한 공간들이 상당 부분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르한 파묵의 창작욕구를 자극한 것은 오스만 제국의 빛바랜 유적과 폐허들이었다. 오늘날 우리 기준으로 봤을 때 얼른 지우고 싶은 과거일 수도 있다. 특히 관광이 주요한 산업을 이루고 있는 이스탄불에서 도시 폐허는 은폐의 대상이지 홍보의 대상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폐허가 이스탄불 사람들의 혼동과 연결됐을 때 강력한 문학적 영감으로 승화됐다. 오스만 제국 멸망 이후 이어지고 있는 시간의 흔적이 작가의 감성을 움직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도시가 품고 있는 시간의 흔적은, 그것이 도시 당국 입장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관없이, 수많은 이야기 거리를 제공하고 스토리텔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도시일수록 풍성한 이야기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그 결과 좋은 이야기꾼(스토리텔러)들이 모여들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할 수 있다. 마치 건강한 습지가 형성되면 식물들이 번성하고, 그 열매를 먹으려는 동물과 그 동물을 먹이로 하는 포식자가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일합섬의 마지막 굴뚝 철거

이제 시선을 우리 도시로 돌려보자. '시간의 흔적'과 관련해 가장 안타까운 곳으로 나는 한일합섬을 꼽고 싶다. 2006년 4월 23일은 한일합섬 공장부지의 마지막 구조물인 굴뚝 네 개가 철거된 날이다. 표지석 하나만 달랑 남겨놓고 흔적도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일합섬은 1964년부터 2006년까지 42년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섬유기업으로 군림하며 지역경제는 물론 국가경제에도 크게 기여했던 기업이었다. 단일 공장으로는 가장 많은 2만여명의 노동자를 보유한 아시아 최대 공장이기도 했다.

당시 노동자의 대부분은 전국 팔도에서 모여든 중졸 여성으로 이른바 '여공'으로 불리는 우리의 누이들이었다. 지난 42년간 한일합섬을 거쳐간 누이들 숫자를 모두 합치면 몇 명이나 될까? 모르긴 해도 10만 명은 넘지 않을까? 이들이 공장을 그만두고 꾸린 가정도 수만 가구에 이르지 않을까?

그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과 관계들이 만들어 냈을 법한 이야기들을 한 번 상상해보자.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마산에 정착한 사람들의 이야기 중에 과연 가벼운 게 하나라도 있었을까? 모르긴 해도 구로공단 여공으로 잠시 일했던 소설가 신경숙에 못지않은 극적인 이야기들이 끊임 없이 만들어지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한일합섬이라는 시간의 흔적을 도시에 남기는 데 실패했다. 이야기의 흐름은 단절됐고 수많은 이야기 씨앗들은 허공에 흩어져버렸다. 설사 전문 이야기꾼들이 관심을 가진다 해도 최소한의 영감을 자극할 기초 자료조차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 3월 경남도민일보의 김주완 출판미디어국장은 '부산에는 있고 창원엔 없는 것들'이란 제목의 칼럼에서 이런 쓴소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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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섬 공장의 마지막 시설물인 굴뚝이 철거되는 모습(이윤기, 2006)

마산은 일제의 수탈도시였고 해방 후엔 3·15의거와 부마민주항쟁, 6월 민주항쟁을 이끌어낸 민주성지이기도 하다. 또한 창원은 현대 산업도시이자 노동자의 도시고, 진해는 대표적인 군항도시다. 이런 도시의 역사를 간직한 사료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이런 고민은 하지 않고 독재부역자 이은상 팔아먹을 궁리나 하고 있으니 도시의 격은 자꾸 떨어져 간다. 시민으로서 그나마 남아 있던 긍지마저 사라질 지경이다. 뭐? 광역시인 부산과 기초단체인 창원을 비교하는 건 무리 아니냐고? 그럼 인구 28만 명에 불과한 전북 군산에 가보라. 그런 말이 나오는지….

이야기꾼들은 시간의 흔적을 쫓아 움직인다. 시간의 흔적을 중심으로 도시의 이야기가 축적되고 또 공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흔적을 잘 간직한 도시는 그래서 좋은 이야기꾼들을 많이 불러 모을 수 있다. 반대로 그 흔적을 스스로 훼손하는 도시는 함께 있던 이야기꾼들마저도 내쫓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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