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한다. 시리도록 맑은 하늘이 보인다. 구름이 천천히 흘러간다. 멀리서 또는 가까이에서 대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뛰어놀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의 한 고등학교, 한 아이는 알콜 중독인 아버지 때문에 오늘 지각했다. 한 아이는 포트폴리오에 넣을 사진을 찍었고, 한 아이는 체육복 긴 바지를 입지 않는다며 선생님한테 혼났고, 한 아이는 여자친구와 수학시험 결과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아이들은 동성애에 관해 토론했고, 어떤 아이들은 다이어트를 위해 점심을 먹자마자 게워냈다. 카메라는 아이들의 일상을 따라간다. 하나씩, 하나씩.

그리고 이날 어떤 아이는 인터넷으로 산 총을 배송받는다. 범행을 함께 하기로 한 친구와 학교의 도면을 훑으며 계획을 점검하고, 무장을 한 뒤 학교로 향한다. 이 아이들은 학교에 있던 학생들과 교사를 향해 총을 난사한다.

영화 <엘리펀트>(Elephant)는 1999년 4월 미국 콜로라도 주에 위치한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에서 출발한다. 2명의 학생이 12명의 학생과 1명의 교사를 총살하고 23명에게 부상을 입힌 뒤 자살한 이 사건으로 당시 미국에서는 총기 소지법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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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엘리펀트> 포스터.

엘리펀트, 왜 하필 코끼리일까. 이 영화의 감독 구스 반 산트(Gus van sant)는 '장님 코끼리 만지듯'의 의미로 이 제목을 썼다. 감독은 관객들이 아이들의 일상 부분 부분을 그저 경험하도록 한다. 장님이 코끼리의 부분 부분을 더듬듯이 아이들의 일상을 담는다. 고요하게 차근차근.

<엘리펀트> 후주와 엔딩은 압도적이다. 나는 이 영화가 끝나고 얼마간 말을 잃었던 것 같다. 그건 어떤 말과 해석도 쉽게 할 수 없었다는 뜻에 가깝다. 그리고 그건 적어도 이 영화를 봤으면 당연히 그래야 할 행동처럼 느껴졌다.

나는 매달 영화 관련 글을 쓴다. 예술작품을 글로 끄집어내고 확장하고…. 영화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탁월한 해석을 할 만한 '짬밥'도 못 되는 내가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게 우스울 것 같아서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언제나 나 스스로에 대한 해석에 그치길 바랐다. 그런데 그걸 언제나 잘 지켰느냐 물으면 솔직히 확신할 수 없다. 내용을 단정하고, 몇 줄로 해석해버리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외면하고…. 분명 그랬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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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엘리펀트> 스틸 컷.

이 글을 다듬는 5월 13일 서울 예비군 훈련장 총기사고 소식이 날아들었다. 가해자는 현역시절 B급 관심병사였고 우울증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몇몇 언론은 이웃들의 말을 빌어 가해자가 평소 행패를 부리는 등 이상행동을 했다고 전했다. 이런 끔찍한 사고를 저질렀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사람이었다고.

이 소식을 듣자 마침 총기 난사에 관한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있어서인지 한참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우린 해석을 한다, 범행동기에 대해. '미친놈' '사이코패스' '그런 일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섣부른 단정인가. 또 얼마나 편리한 구분이자 단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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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엘리펀트> 스틸 컷.

"투명성(transparency)은 오늘날의 예술-그리고 비평-에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의미심장한 가치다. 투명성이란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 해석은 예술작품에 대한 감각적 경험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 뒤에,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지금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좌충우돌하는 도시 환경에 폭격당한 우리의 감수성 상태에서 예술작품만 무작정 양산된다고 생각해 봐라. 우리의 문화는 무절제와 과잉 생산에 기초한 문화다. 그 결과, 우리는 감각적 경험의 예리함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현대 생활의 모든 조건-물질적 풍요, 걷잡을 수 없는 혼잡함-이 우리의 감각 기관을 무디게 만드는 데 한몫을 거든다. 따라서 (다른 시대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감성, 우리 시대의 수용력에 비추어 비평가의 임무를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33~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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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엘리펀트> 스틸 컷.

예술을 예술 그 자체로 경험해야 한다는 미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수전 손택의 말은 물질적 풍요, 걷잡을 수 없는 혼잡함이 극에 달한 현대 사회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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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엘리펀트>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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