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모(satchmo 입이 큰 사람을 일컫는 미국 속어)라는 애칭으로 더 이름 높았던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1901~1971)은 생전에 흑인 민권운동에 아무 관심 없는 '엉클 톰'이라고 비아냥 받았다. 청중들, 특히 백인 청중들 앞에서 흰 이를 드러내고 과장된 광대연기를 선보이던 그를 두고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60~70년대에 청장년기를 보낸 국내 팬들도 그를 가래 끓는 목소리로 'What a wonderful world'나 'Hello Dolly'같은 곡을 부르던 '우스꽝스러운' 흑인 가수쯤으로 여긴다.

사망한지 44년이 넘었음에도 루이 암스트롱에겐 이런 이미지가 줄곧 남아 있다. 그는 과연 사람들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희희낙락하던 검둥이 광대였을까?

스윙 리듬과 관악을 중심축으로 하는 재즈는 사실상 루이 암스트롱이 확립한 음악이다. 유명한 재즈 비평가인 마틴 윌리엄스는 그래서 "20세기를 만든 미국 예술가는 누구인가? 나는 작가, 화가, 클래식 작곡가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루이 암스트롱이 20세기를 만들었다는 건 확신한다"고 말했다.

루이가 등장하기 전 재즈는 명확한 정체성을 가지지 못했다. 민요나 행진곡 등에 영향을 받아 뉴올리언즈 크레올 사회에서 태동한 'JASS' 즉, 원시적(?) 재즈였을 뿐이다. 트럼페터인 루이는 이 음악에 스윙이란 리듬속성을 부여했다. 그리고는 창조적인 플레이를 통해 재즈를 재즈답게 만들었다.

비평가인 요아힘 E 베렌트는 "재즈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찰리 파커나 세실 테일러, 존 콜트레인을 혁명가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진짜 혁명가는 루이 암스트롱이다. 암스트롱 이전의 음악과 그가 만들어낸 음악의 차이는 파커나 테일러, 콜트레인 이전의 음악과 그들이 만들어낸 음악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크다"고 말한다. 루이의 연주장면을 담은 유투브 동영상은 루이가 지닌 압도성을 잘 증명하는 도구다. 폭발적인 힘, 명징한 멜로디, 엄청난 흡인력, 거기다 가슴 저 깊숙한 곳을 파고드는 허스키 보이스까지.

루이는 음악을 동경했지만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그러다 총기사고로 들어간 소년원에서 코넷을 배우면서 재즈에 눈을 뜬다. 1922년 시카고로 자리를 옮긴 루이는 5인조, 7인조 밴드를 이끌며 전성기를 맞는다. 이 과정에서 그가 지닌 낙천성이 빛을 발휘한 것은 물론이다. 그는 늘 나팔을 손에 들면 세상이 모두 자기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무대에 서면 만담을 즐겨 흡사 코미디언 같은 분위기를 종종 연출했다. 모두가 반기는 성격 덕분에 비슷한 시기에 활약했던 뮤지션들이 부침에 허덕일 때도 루이는 늘 성공가도를 달렸다.

모던 재즈를 접하는 많은 이들은 초창기 재즈에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현대 재즈는 초창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급스럽고, 다양하며, 깊이 있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이는 모던 재즈 개척자인 마일스 데이비스나 존 콜트레인 등과 비교할 때 항상 '급이 낮은' 뮤지션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사치모 스타일을 싫어했던 마일스 데이비스도 루이의 음악엔 무한한 존경심을 숨기지 않았다.

독특한 보이스와 힘찬 나팔로 재즈 신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루이는 혼자였다. 하지만 그 유산이 얼마나 컸던지 지금 재즈 신에 루이와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는 연주자는 수천, 수만 명이다. 구부러진 트펌페터로 유명한, 찰리 파커와 함께 비밥을 완성했다는 디지 길레스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순간 내가 먹고 사는 모든 것에 대해 루이 암스트롱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는 단순한 광대가 아니었다. 죽을 때까지 코미디언 기질을 숨기지 않았지만, 자신이 걷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던 선구자였다. <川邊小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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