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했던 귀농, 전통 된장으로 안착하다  

산으로 둘러싸여 바람도 제대로 통하지 않을 것만 같은 고성 연화산 자락 한 골짜기. 하루에 두 번 고성읍을 오가는 버스가 들를 만큼 외진 곳이지만 마을에 들어서니 따뜻한 햇볕이 포근히 감싼다. 수십 년은 됐음 직한 큰 은목서 너머로 장독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고성군 개천면 좌연4길 149-6번지 좌이마을에서 전통방식으로 된장 간장 등을 만드는 탁동열(61)·김향숙(56) 부부가 운영하는 '개천된장'이다.

돌담길·은목서에 반한 고성 땅

현대식 기와로 지은 개천된장 본채로 들어서기 전 허름한 고택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살지 않은 듯해 보이지만 여느 빈집과는 달리 정리정돈이 잘 돼 있다.

안주인 김향숙 씨가 설명을 곁들인다. "처음 이 마을을 찾았을 때 우리 부부의 마음을 잡았던 집입니다. 이 집을 들어서는데, 지금은 없어진 돌담길과 은목서랑 어울려 너무 좋았습니다. 마루에 앉는 순간 참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곳에서 살기로 마음먹었죠. 처음 1년 정도 이 집에서 살았는데 서까래에 새겨진 글을 보니 150여 년 전에 지은 집입니다."

도시 생활에 싫증이 난 탁 사장은 일찌감치 귀농을 생각했다. 창원에서 철재상을 10여 년간 운영했던 탁 사장은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는 생각으로 귀농을 꿈꿨으나 아내 김항숙 씨는 생각이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탁 사장은 부산에서 나고 자란 도회지 사람이라 농촌생활의 필수품인 호미나 낫 등 농기구를 모르고 살았다. 그런 이가 귀농을 꿈꿨으니 아내의 반대는 당연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많은 뒷바라지가 필요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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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그런데 그런 김 씨의 마음을 돌리는 계기가 운명처럼 찾아왔다. 남편의 성화에 2004년 '경남 생태귀농학교' 강의를 듣게 된 김 씨는 첫 강의에서 '뭔가에 홀린 듯' 가슴에 와 닿았고, 남편과 함께 귀농하기로 결심했다.

"귀농을 꿈꾸는 남편의 생각을 마냥 외면할 수는 없었죠. 그래서 생태귀농학교 수업을 듣기로 했는데 첫 강의에서 감동해 농촌에서 한 번 살아보자고 생각을 했습니다."

마음이 통한 부부는 귀농할 곳을 찾아 도내 전역을 훑었단다. 그렇게 찾아다니던 탁 사장은 귀농지로 합천을 염두에 뒀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고성 개천면 낡은 주택과 땅을 판다는 주인의 재미난 글귀가 눈에 띄었다.

"'1년 열두 달 따뜻한 기운이 흐르는 땅'이라는 글귀가 너무 와 닿아 직접 와보고 싶었습니다. 와 보니 너무 편안해 여기로 결정하자고 했죠. 남편은 합천을 원했으나, 원래 집은 여자들이 편안하게 생각하는 곳으로 결정하는 게 맞다는 내 이야기에 남편도 마음을 돌려먹고 고성으로 결정했습니다."

그게 2004년 10월. 논 1600평, 밭 600평을 사 농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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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계획 없는 귀농, 좌충우돌 초짜 농부

그런데 이 부부 이야기를 듣노라니 참 '막무가내'였다. 도시가 아닌 농촌에서의 삶도 살아보자는 이상만 가지고 결심한 귀농이었다는데 배짱이 두둑했다.

"'농촌에서 뭘 해먹고 살겠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냥 귀농의 당위성만 가지고 고성에 오게 된 것입니다. 처음엔 텃밭농사부터 시작했습니다. 이웃 할머니들이 하는 대로 배추와 무를 심었습니다. 배추와 무만 가꾸어 먹고사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죠." 참 황당한 이야기다.

부부가 택한 농사는 유기농법이었다. 그런데 호미 한 번 안 잡아본 사람이 농촌에서 유기농법으로 농사지으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텃밭에는 배추 무를 심고, 논에는 벼, 밀, 마늘농사를 지었다. 농약과 비료를 하지 않은 탓에 처음 수확한 결실은 부부가 먹을 양식도 나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나마 당시엔 도시생활을 접으면서 가져온 돈이 있어 2년 동안은 재미있었다. 그런데 점점 현실을 생각하게 됐다.

"벌며 쓰는 것과 수입이 없는 상태서 쓰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당시 아이 2명 모두 대학에 다니고 있어서 있던 재산을 하나씩 처분하게 됐습니다."

꿈만 가지고 들어온 농촌 생활은 현실과 부닥치니 갈등이 참 많았다. 귀농을 잘한 것인지 생각도 들었단다. 농사를 지어도 소득과 연결이 안 되니 돈도 점점 떨어지고 불안했다. 당시 탁 사장은 52세, 김 씨는 47세였다. 앞날에 대한 방향설정이 되어 있지 않다 보니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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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그러던 차에 좋은 아이템이 떠올랐습니다. 할머니들을 따라 농사지은 것으로 직접 된장 간장 고추장 담가 아는 사람들에게 나눠줬었는데 다들 맛있다고 했던 기억이 난 거죠. '바로 이거다' 싶었습니다. 내가 좋아하고, 또 잘할 수 있는 것으로 해보자. 바로 된장으로…."

된장 부부의 영원한 스승, 친정엄마

김 씨가 된장을 담그기 시작한 것은 친정엄마 덕택이었다. 도시에 사는 많은 가정주부가 김장김치 등을 친정에서 조달하는 경우가 많은 현실이다. 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루는 엄마가 그러시더군요. '50 다 된 딸이 언제까지 친정에서 김치를 가져다 먹을래. 이젠 너도 시골에 살고 있으니 김장이나 된장 등은 직접 담가 먹어봐라'고. 그래서 엄마의 지도에 따라 된장을 담갔는데 뜻밖에 주위 분들이 다들 맛있다고 칭찬하더라고요."

귀농은 마음 가는 대로 했지만 된장을 아이템으로 잡고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실패하지 않고, 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궁리를 했다. 그래서 인터넷 등에서 열심히 자료를 검색했다. "당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전국에서 된장 농사를 짓는 사람이 3000곳이 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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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3000곳이 넘는 장류 사업자가 있는데 내가 만든 된장을 도회지 소비자들이 찾게 하려면 뭔가 남달라야 하지 않을까? 대기업과 같은 공장식으로 된장을 생산해서는 자금력에서 경쟁이 안 될뿐더러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살아갈 방법은 손맛을 살려 옛날 조상이 하던 전통방식 그대로 된장을 만드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본격적으로 장류 사업에 뛰어든 것은 귀농 3년 차부터입니다. 그게 2006이고, 사업자 등록을 낸 것이 2008년입니다. 좋은 재료로, 정성을 들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을 쏟고 나면 자연이 아주 맛있는 된장을 만들어줬습니다. 계속 전통방식을 고수하니 소문이 나 주위에서 발걸음이 이어져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맛있는 된장 비결은 좋은 재료+정성+전통방식 고수

"남들은 맛있는 된장 만드는 비결이 뭐냐고 많이 묻습니다. 비결은 딱히 없습니다. 그냥 좋은 재료에 우리 부부가 쏟을 수 있는 정성을 다하고, 전통방식대로 과정을 밟는 것입니다. 콩을 찜기에 찌는 곳이 많은 데 우린 대형 가마솥에 장작불로 콩을 삶습니다. 또 메주를 건조기에 넣어 말리기도 하는데 우린 옛날 방식 그대로 합니다. 어찌 보면 우리 집 메주는 호사를 누립니다. 작업장을 지을 때 메주를 건조하는 방에 가장 공을 들였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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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김 씨는 된장 담글 때 쓰는 소금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죽염으로 된장을 담그면 좋겠지만 워낙 비싼 탓에 대체할 소금을 만들었다고 했다.

"소금은 적어도 2~3년 간수를 뺍니다. 그리고 간수를 뺀 소금을 구멍이 뚫린 장독에 넣어 두면 한여름 뙤약볕에 달아 장독이 불덩이가 되곤 합니다. 이렇게 긴 시간을 숙성하면 죽염 같은 좋은 품질의 소금을 얻는 것이죠."

'개천된장'은 장을 음력 정월에 담고 또 정월에 장 가르기를 한다. 많은 된장공장이 45~90일 정도면 장 가르기를 하지만 개천된장은 이를 반드시 지킨다. 충분히 숙성시켜야 깊은맛을 내는 된장, 간장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월에 장 가르기를 하더라도 바로 판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 가르기 한 된장과 간장은 다시 6개월 정도 숙성과정을 거친다.

"몇 년 전 서울의 한 마트에서 식품홍보 행사를 했습니다. 이게 한 방송에 소개됐는데 주문이 밀려 5월인데 조기에 동났습니다. 그런데 주문도 계속 밀려 일찍 판매할 욕심에 친정엄마에게 장 가르기를 하면 안 되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올해만 하고 장사 안 하려면 장 가르기를 하고, 계속 이 일을 하려면 욕심을 버려라. 그러나 후회는 안 하게 장독 하나만 장 가르기를 해봐라'고 하셨습니다. 확실히 맛이 달랐죠. 지금도 장을 만들다가 막히거나 궁금한 것이 생기면 엄마에게 물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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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된장은 부부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욕심내면 실패해"

개천된장이 한 해에 생산하는 양은 된장 3000㎏, 간장 1.6~2t가량이다. 이 밖에도 고추장, 청국장, 액젓, 청국장가루 등도 생산한다. 주 재료인 콩은 10월 말∼11월 초에 사들이는데 영농조합법인을 통해 받기도 하지만, 고성에서 생산되는 콩도 많이 사용한다.

부부는 이렇게 여섯 가지 제품 등을 판매해 연간 1억 원 정도 번다. 이 중 순수익은 4000만~5000만 원 정도이나 부부 인건비가 포함돼 있어 사실상 인건비를 빼면 남는 것은 없단다. 수익이 적다면 규모를 키우면 되지 않을까? 단순한 의문이 들었다.

이 물음에 부부의 대답은 단호했다.

"물량을 늘렸더니 우리 부부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메주가 있어 검은 곰팡이가 피더군요. 그래서 한 번 실패했습니다. 이후 우리가 할 수 있는 양만큼만 하려고 합니다. 80㎏들이 콩 30∼35가마가 한해 농사 정량입니다. 실패로 얻은 교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제대로 만들자. 그래서 가격도 제대로 받자'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 장류는 가격이 조금 센 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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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처음에 가격이 비싸 소비자들의 거부감이 있었다. 하지만 한 번 먹어 본 소비자들은 다시 찾으면서 마니아층이 생겼다고 한다. 지금은 오히려 그분들이 나서서 개천된장을 홍보해 주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한 번 온 손님에게 정성을 다하고 같이 차도 마시고, 교감을 나누는 것을 중요시한다.

"다른 사람을 쓰게 되면 내 몸은 편하겠지만 그만큼 우리 정성은 줄어듭니다. 살아있는 미생물이라 환경에 여간 민감한 게 아니죠. 메주를 띄우는 시기가 되면 우리 부부는 메주방에서 메주와 함께 잡니다. 잠자다가 메주를 뒤집어 주기도 하고, 또 검은 곰팡이가 붙으면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킵니다. 장을 담글 때도 잘 익어 좋은 장이 되어달라고 항아리와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요즘엔 된장 등을 사 먹던 주부들이 개천된장에서 직접 배워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탁 사장 부부는 그래서 직접 만드는 것을 체험하도록 하고 있다. 부부가 숨김없이 된장 담그는 법을 전하는 탓에 젊은 주부들은 이곳이 친정 같은 느낌이 난다고 이야기들 한단다.

며느릿감 자연을 좋아했으면…

탁 사장은 요즘 마을 일에도 힘쓴다. 농촌 실정을 잘 모르는 귀농인들이 많다 보니 농촌 정서에 맞지 않은 행동으로 마을 주민들과 마찰을 빚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이 때문에 외지인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게 요즘 시골풍경이지만 이곳 좌이마을은 다르다. 그것을 증명하듯 탁 사장은 3년 전부터 마을 이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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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50 넘어 농촌 들어온 사람에게 주민들이 마을 이장을 맡길 정도가 됐으니 이젠 나도 어엿한 이 마을 주민이죠.(웃음) 2004년 가을 귀농해 오래된 집을 청소하고 손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동네 사람들에겐 도시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농촌에 들어온 사람으로 여겼던 모양이었습니다. 마을 어르신 한 분이 저희 부부에게 오시더니 '내가 보증 서 줄 테니 한 2000만 원 대출해 집을 새로 지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말을 듣고 처음엔 적잖이 당황했는데 참 인심이 좋은 동네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부부는 장류 사업을 시작한 이래 매일 작업일지를 쓰고 있다. 맛의 표준화를 위한 데이터 축적과정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완벽한 데이터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부부는 대략적인 데이터를 파악하는데 이제 몇 년만 더하면 완벽한 자료가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 혹시 자녀 중에서 부부의 '개천된장'을 가업으로 이어받겠다고 한다면 작업일지 한 권만 보면 알 수 있도록 한다는 생각에서다.

"딸은 음식에 관심이 많은데 전공이 조선업 쪽이라 우리 사업을 물려받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아요.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서른네 살 미혼인 아들이 며느릿감으로 자연을 사랑하고 음식에 관심이 많은 사람을 데려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내가 노트에 적는 이 기록을 바탕으로 아이들이 사업을 이어받으면 좋겠지만 그건 강요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그렇지만 다른 누군가가 이 일을 하고 싶다면 지금 적어 둔 작업노트 한 권이면 가능하도록 정확한 수치를 적고 있습니다."

다소 무모했던 귀농. 그러나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귀농하려 했다면 아직 계획만 세우고 창원에 살고 있을 것"이라는 부부는 정년이 없는 된장, 간장 만드는 일을 계속 즐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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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마을이 분지 형태처럼 보이지만 된장 사업하기에 좋은 환경입니다. 연화산 자락인 이곳은 지리산 대륙성 기후와 고성의 해양성 기후가 만나는 지점이죠. 일교차가 크고 공기 정화가 잘돼 된장이 잘 익는 것 같습니다. 우리 부부의 새로운 사업이 된 이 일을 힘닿는 데까지 해볼 생각입니다."

추천사유 - 허대영 고성군농업기술센터 농업경영담당

'개천된장' 탁동열·김향숙 부부는 귀농 11년차로 2011년 강소농에 가입해 각종 교육과 체험을 통해 습득한 노하우와 차별화된 제품을 생산하는 귀농인입니다. 이들은 100% 국내산 원료만을 사용하고 모든 제품은 직접 담그고 판매하는 수제품으로 어떠한 방부제나 화학물질도 전혀 첨가하지 않는 자연식품입니다. 특히 소비자가 언제든지 방문해 된장, 간장, 고추장 등 다양한 장류뿐만 아니라 장아찌 체험까지 할 수 있게 하여 지난해 경남정보화농업인 전진대회에서 농산물 홍보물분야 대상을 받았으며 현재 장류 생산에 주력하면서 이웃과 상생해 나가는 대표적인 강소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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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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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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