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 경남] 70~80년대 마산수출자유지역·창원공단 노동자의 일상

마산 합포만을 메워 지난 1970년 출발한 마산수출자유지역은 '조국 근대화의 전진기지'라고도 불리는 국가공단이었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1979년에는 종업원 3만 1000명으로 성장한다.

창원공단은 1974년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해 1979년에 이르러 역시 전체 종업원이 3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공단으로 발전한다. 당시 마산과 창원으로 전국에서 청춘들이 모여들었다.

"마산수출자유지역 뒷문(후문), 작업이 끝나고 쏟아져 나오는 인파는 무려 한 시간이나 지나도록 이어져 나간다. 넓은 아스팔트를 메운 젊은이들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는 지는 해와 함께 땅속으로 스민다. 해고의 위협에서 오는 불안, 관리층과 외국인의 인격적 무시, 힘겨운 노동에 대한 박한 보수, 판에 박은 듯한 단조로운 작업 등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 이들은 내일 또다시 이 문을 들어서게 될 것이다."(이창복 특별 르포 '마산수출자유지역의 실태' 창작과 비평, 1974년 겨울호. 김하경, 2015 재인용)

당시 스무살 남짓한 청춘 남녀들은 기숙사와 공장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 사람 사는 모양새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난 1980년대 발표돼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소설로 평가받는 최순임(본명 고경엽)의 '수출자유지역의 하루'를 통해 마창노련이 결성될 당시 마산수출자유지역 여성노동자의 일상을 들여다보자. 또 지난 2011년 전국금속노동조합이 만든 '정경식 열사 추모 자료집'에 나온 열사 어머니 구술을 통해 창원공단 남성노동자의 일상도 알아보자.

◇저임금 노동에 저당잡힌 청춘들

"영순이는 지난해까지 자취할 때의 생활을 생각해 본다. 급료 절반이 방세로 지출되다 보니 저축은 생각지도 못했고, 절약하기 위해 친구와 같이 생활해도 연탄값, 쌀값을 제외하고 나면 부식비가 적어 김치 하나만 담가 놓고 먹는 게 고작이었다. 그나마 아침은 굶을 때가 많았으니까 지금의 기숙사 생활은 너무 편안했다. 매끼 230원 정도의 식대로 짜인다는 식단이지만,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하루를 출근하면 고작 2100원을 주면서 하루 결근에는 6630원이나 공제를 해 버리다니……. 다행히 그달은 잔업과 특근수당을 1만 5000여 원 받았기에 그런대로 지낼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다달이 불입하는 재형저축 3만 원을 내고 남은 것으로 한 달에 두 번 가던 고향에도 못 가고,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술도, 편찮으신 어머니의 약 한 첩도 못 지어 드릴 뻔했었다."(최순임)

"기숙사에서 살았지만도 공휴일이나 월급날엔 봉투 들고 바로 집으로 가져왔어예. 진동 집에서 댕길라 캤는데, 버스도 없고, 시외버스가 다녔는데 차가 마이 없고예. 택시도 그땐 비쌌거든예. 잔업하고 늦가 집에 올라 캐도 차가 없은게네, 그래 할 수 없이 기숙사에서 살안 기라예.

중간에 월급이 올랐나 싶어 보면 잔업을 많이 했어예. 그때 잔업을 100시간도 넘게 했을 깁니더. 내가 일로 많이 마라 건강을 생각해야지. 그라면 잔업 내가 가끔 합니다. 그래 말을 돌리가 하고, 내가 걱정할까 봐, 회사 참 좋습니다, 더우면 시원하게 해주고, 추우면 따뜻하게 해준다 쿠고 내를 안심시키는 기라예."(정경식 추모 자료집)

◇감시와 통제, 열악한 노동 환경

"오후 작업이 시작되고 현장 내에 조용필의 판이 계속 흘러나온다. 점심 시간 이후에는 조는 사람이 많다고 빠른 템포의 음악을 아주 크게 틀어준다.

'고개 들지 마! 고개 들지 말고 일해.' 갑자기 반장의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일본인인 시라이시 부장이 작업장보다 삼 미터나 높은 센터에서, 팔짱을 끼고 노란 금테안경 너머로 내려다보고 서 있는 모양이다. 이런 경우 잡담을 하거나 작업 외에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 눈에 뜨일 경우, 그 소속 반장은 물론 주임, 계장까지 센터로 불려가서 호된 추궁을 당하기 때문에 모두 겁을 먹고 있는 거다."(최순임)

"우리 경식이 다쳤다는 연락을 받고 얼매나 놀랬는지, 창원병원에, 즈그 아버지하고 뛰갔거든예. 친구들이 옆이세 부축을 하고 계단을 올라가더라구예. 그래 아를 불렀거든예. 경식이가 뒤돌아보더만, 옆에 있는 친구들한테 뭐라 쿠데예, 알리지 말라캤는데 와 우리 부모님한테 기별했나 쿠고, 우리 아 손이예, 얼른 본게네 손바닥이 확 틀어져가 요축에 안 있고 반대쪽에 붙어있더라구예. 눈물이 가려서 잘 안 비고,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도 잘 모리구예. 정신이 없었어요." (정경식 추모 자료집)

◇무력한 노사위원회, 민주노조를 꿈꾸는 노동자들

"정말인지 몰라도 지난해 연초 승급 때는 노동청의 어느 근로감독관이 노사협의회 장소에 나타나서 근로자 대표에게 정부에서 급료 인상은 연 10% 미만으로 묶어 물가를 안정시킬 방침이므로 사용자에게 무리한 강요를 하는 것은 정부시책에 어긋난다며 전·후반기 각각 5%선을 가지고 논하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노사위원들은 그 근로감독관의 말을 어김없이 실행했다."(최순임)

"한 달은 내가 병원에 가니까 친구들이 많이 왔어요. 한 열 명은 왔을 깁니다. 병실에 친구들이 삥 돌아앉았는데, 우리 아가 친구들 보고 노동자는 단결해야 한다, 단결하자, 이런 말을 많이 하는 걸 들었습니다. 민주노조, 뭐 뭐 그런 말을 하는 걸 몇 차례 본 적이 있어예, 앞으로 우리가 선거를 하거들랑 우리 노동자들은 노동자 편에 서 가지고 표를 찍자 쿠대요."(정경식 추모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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