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전(評傳)을 쓴 작가 볼튼 킹은 도입부에서 말년의 그를 "아이들과 따뜻하게 놀아주던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로 묘사한다. 젊은 시절 갸날픈 몸매, 짙은 피부색, 검은 머리와 턱수염으로 유명했던 그는 외모만 놓고 보면 전형적인 예술가형이었다. 실제로 그는 대학을 졸업했을 때 극작가나 역사소설가가 되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잔인한 운명은 그를 신산한 삶으로 몰아넣는다. 압제와 분열로 신음하던 조국 때문이었다. 이태리 통일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쥬세페 마치니(1805~1872).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많지만, 가장 명료하게 그를 대변하는 평가는 두 가지다. 평생 한 번도 자신이 품었던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 실패를 훈장처럼 달고 살면서도 조국과 공화정에 대한 애정을 견지했던 지도자.

19세기에 접어들어서도 이태리는 소국이 난립하는 모양새를 벗어나지 못했다. 여기다 북부는 외세(外勢)인 오스트리아 제국이 병탄한 상태였다. 하지만 오랜 분열은 통합을 지향하는 법. 민족주의 사조가 대두되면서 같은 언어를 지닌 이태리를 한 국가로 묶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1861년 통일이 선포되기까지 이태리 독립은 사르데냐 왕국 재상이었던 카부르가 주도했다. 의용군을 몰고 남부 이태리를 공략, 국왕에게 헌납한 가리발디는 군사적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반면 마치니는 오로지(?) 실패만을 거듭했다.

그 이력을 보자. 1833년 피에몬테에서 일으키려던 무장봉기는 사전에 발각돼 12명이 처형당하고, 마치니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뒤이어 스위스에서 피에몬테 왕국을 무장공격하려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1849년 혁명으로 교황이 쫓겨난 로마로 간 그는 3인 집정관 중 한 사람으로 실질적인 공화정의 수반이 됐다. 그러나 교회 및 사회개혁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음에도 프랑스 군대가 진입하면서 다시 로마를 떠나야 했다. 이후 이태리를 지배하던 왕국들을 뒤집어 엎으려 끊임없이 봉기를 계획했지만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실패라는 훈장이 잘 어울리는 여정이다. 역사는 승자만을 기억한다고 했던가. 마치니는 이 관점에서 볼 때 철저한 실패자다. 하지만 그가 생존했던 당대를 벗어나는 순간 마치니는 승리자가 된다. 오늘날 그는 근대 이태리 건설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첫 손 꼽힌다. 독립 3걸(傑-카부르, 가리발디, 마치니) 중 그를 먼저 내세우는데 주저하는 역사가는 드물다.

카부르와 가리발디가 화려한 성공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면, 마치니는 이태리인들의 내면을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청년 이태리당을 창당해 독립공화국이란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으며, 이를 실천으로 옮긴 그의 행보는 압제와 분열에 신음하던 이태리인들을 뒤흔들었다.

오랜 기간 망명했던 런던에서는 이태리 문제를 국제적으로 환기시키려고 노력했으며, 청년 이태리당에 이어 청년 유럽당을 결성, 민족주의 문제를 보편적인 유럽 문제로 끌어올리는데 기여했다. 가리발디가 주도하고 전 유럽이 환호했던 남부 이태리 정벌도 사실은 그가 초기에 구상한 계획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끊임없이 압제세력을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민 건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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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니./위키피디아
마치니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젊은 시절 아름다운 미망인 주디타 시돌리와 연인으로 지낸긴 했지만 결코 결혼에 정신을 뺏기진(?) 않았다. 이 사실은 그가 쌓아올린 전설에 더 처연한 이끼를 보탠다. 인자한 얼굴로 아이들과 놀아주던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는 1872년 피사에서 늑막염으로 죽었다. 통일에도 불구하고 왕정(王政)은 이태리가 갈 길이 아니라고 비판하던 마치니. 그가 꿈꾸던 이상인 공화국은 1947년에야 이룩된다. 장례가 치러질 때 운집한 인파는 무려 10만명이 넘었다. 실패와 고독, 궁핍속에 생을 마친 마치니는 이를 어떻게 봤을까? <川邊小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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