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공간은 도시 스토리텔링의 출발

건축가 승효상은 한 팟캐스트 대담 프로그램에서 도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첫 번째는 번잡한 공간이고, 두 번째는 휴식의 공간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경건한 공간이다.

첫 번째 번잡한 공간은 도시라고 하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번화가를 가리킨다. 사람이 모여 살면서 상품과 서비스, 그리고 재화가 활발하게 교환되는 곳이다. 흔히 도시가 살았냐 죽었냐를 따질 때 그 기준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두 번째 휴식의 공간은 주거지와 녹지 정도를 떠올리면 되겠다. 숨가쁜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19세기말에 뉴욕 한복판에 조성된 센트럴 파크는 도시의 생존을 위해 휴식의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세 번째 경건한 공간은 바로 도시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곳이다. 도시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와 신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대표적으로는 종교시설과 묘지 등을 꼽을 수 있다. 번화가나 주거지처럼 시민의 일상생활과 직접 관련돼 있지는 않지만, 도시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인류가 만든 도시의 경건한 공간

인류가 처음 도시를 만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건축물인 지구라트가 도시의 중심이었다. 지구라트의 크기가 높고 클수록 도시를 지키는 신의 힘이 강하다고 여겼다. 아시리아를 멸망시킨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수도 바빌론에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았던(대략 90미터 높이로 추정된다) 바벨탑을 세웠다. 신바빌로니아를 수호하는 신은 모신 일종의 지구라트였다.

바빌론의 모든 시민은 언제 어디서든 일상 속에서 그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뒤집어 말하면 경건한 공간인 바벨탑이 도시의 모든 공간과 시민의 일상을 장악한 셈이었다. 인류 문명 초기에는 이처럼 경건한 공간이 도시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도시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스 문명의 대표도시인 아테네도 경건한 공간이 중심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양한 신들에게서 보호받고자 했던 아테네인들은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신전을 세웠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도시와 다른 점은 도시 안에 인간을 위한 경건한 공간도 함께 뒀다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도시들의 경건한 공간이 오로지 신을 향한 것과는 차이가 나는 부분이었다.

민주주의의 탄생지라고 불리는 프닉스 언덕이 바로 그런 공간이다. 아테네 시민이라면(물론 성인 남자만 해당됐다) 그 누구라도 언덕 연단에 서서 도시 정책에 관해 발언하고 토론할 수 있었다. 연단 앞에는 2만명의 시민이 모일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었고, 거기에서 민회가 열렸다. 가게와 관청, 법정과 재단, 그리고 영웅들의 조각상이 빼곡하게 들어선 광장인 아고라 또한 도시의 전형적인 번잡한 공간인 동시에 민회와 재판 등이 일어나는 경건한 공간 역할을 했다.

로마는 카이사르를 기점으로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바뀌면서 권력자인 황제를 기념하는 건축물들이 경건한 공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특히 로마 시민들의 대표적인 공공 공간인 마르스 광장을 이들 건축물들이 차곡차곡 차지해나가기 시작했다. 후대 황제들은 전임 황제들의 건물보다 더 크고 화려한 기념물을 남기려고 욕심을 냈다.

막대한 건축비용이 황제를 위한 건축물에 투입되는 만큼 시민들을 위한 건축은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서민들이 모여사는 아파트형 주택인 도무스는 골목에 쓰레기가 쌓이고 소음에 시달리는 등 갈수록 주거환경이 나빠졌다. 심지어 건물 자체가 무너지는 일도 흔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황제들은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대신 목욕탕과 구경거리를 잔뜩 만들어서 시민들의 눈을 돌렸다.

로마제국 이후의 유럽 도시들은 권력의 진공 상태에서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안전과 생존을 위해 성벽을 높이 쌓았고, 도시의 중심에는 경건한 공간인 성당을 세웠다. 특히 중세 시대에는 천국에 다다르려는 열망을 담아 고딕양식의 하늘로 치솟는 성당을 건축했다. 도시공동체는 성당이 주는 메시지, 즉 지금 당장의 평화보다는 죽은 뒤에 천국에 간다는 위로에 의지하며 생활했다. 마치 메소포타미아 시대 도시들이 지구라트만 바라보며 생활한 것처럼 중세 유럽의 시민들도 성당만을 바라보며 도시 생활을 이어갔다.

18세기 계몽주의가 본격적으로 확대되면서 성당이 도시에서 갖는 위상 또한 빠르게 약화됐다. 대신 시민의 힘이 강해지면서 왕과 귀족들만을 위한 사냥터가 시민을 위한 공원으로 개방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로 프랑스 오를레앙 가문의 왕족인 루이 필립 2세가 상속받은 팔레 로얄을 들 수 있다. 루이 필립 2세는 이곳의 정원과 회랑들을 대중에게 개방했는데, 이후 그곳에 서점과 살롱, 그리고 카페들이 다수 들어서면서 계몽주의 담론이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고, 이 흐름이 마침내는 프랑스 대혁명으로까지 이어졌다. 시민혁명이란 관점에서 팔레 로얄은 파리의 대표적인 성지라고 평가할 수 있다(이상 찰스 몽고메리의 '우리는 도시에서 행복한가' 1장 참조).

우리나라 도시들도 저마다 경건한 공간을 지정하고 정성껏 가꿨다. 성리학을 신봉했던 조선시대에는 사당이 그 역할을 했다. 수도 한양에서는 역대 왕들과 왕비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가 조선왕조의 정체성을 담보하는 가장 경건한 공간이었다. 각각의 가문에서도 저마다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를 올리는 사당을 두고 각별하게 관리했다.

경건한 공간이 꼭 사대부만의 것도 아니었다. 이른바 민초들도 나름의 경건한 공간을 간직하며 살았다. 마을마다 있었던 서낭당과 정자나무 등이 대표적이다. 마을 공동체는 이들 경건한 공간에 모여 마을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제를 정기적으로 올렸다.

경건한 공간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도시의 스토리텔링은 다양한 주체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지만, 도시 전체로 봤을 때는 바로 이 '경건한 공간'이 도시 이야기의 출발점이자 토대가 된다. 각각의 도시가 가꾸고 있는 경건한 공간을 잘 들여다 보면 그 도시와 도시공동체가 추구하는 정체성을 상당 부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교성이 크게 약화된 현대 도시에서 경건한 공간은 과연 어디일까? 하나의 도시가 만들어지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 일어난 곳이나 그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를 모신 묘지 등이 대표적인 경건한 공간이 될 수 있다.

광주를 예로 든다면 누구라도 망월동에 위치한 국립 5.18 민주묘지와 금남로, 그리고 옛 전남도청과 광장을 꼽을 것이다. 오늘날의 광주와 광주시민을 떠올릴 때 1980년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산을 예로 든다면 국립 3.15 민주 묘지와 김주열 열사 시신인양 지점을 꼽을 것이다. 진주라면 어디를 꼽을까? 조선시대 때 왜군과 끝까지 싸웠던 진주성과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물에 뛰어들었던 의암이 그런 곳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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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상 시비를 둘러싼 대립은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3.15정체성과 독재정권에 영합했던 이은상 정체성이 마산의 경건한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충돌하는 현장이었다. /경남도민일보DB

이들 경건한 공간은 도시와 시민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틀이 된다. 경건한 공간이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링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도시공동체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 시민이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를 판단케 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

도시 권력과 경건한 공간의 존폐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도시 권력이 교체될 때 경건한 공간은 자주 존폐의 기로에 선다. 특히 전혀 성격이 다른 권력으로 교체될 때 기존의 경건한 공간은 심각하게 훼손되거나 새로운 권력체제를 상징하는 다른 경건한 공간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최근 국제뉴스에서 테러집단인 IS가 점령지인 이라크 모술 박물관에 소장된 고대 아시리아의 유적과 유물들을 파괴하는 장면이 전세계에 방송된 적이 있다. 기존의 경건한 공간을 파괴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2001년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탈레반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었던 바미얀 석불을 폭파시켰던 것도 물론 같은 맥락이었다.

우리나라 도시들도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일제가 조선을 지배했을 때 가장 먼저 훼손한 것이 도시 혹은 마을공동체의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궁궐과 종묘를 훼손하고 사낭당을 허물고 무속을 미신으로 격하시키는 대신 일제의 경건한 공간인 신사를 곳곳에 세워 강제로 참배토록 했다. 특히 조선 개국에 큰 역할을 한 무학대사를 모신 남산 꼭대기의 국사당을 헐고 그 능선에 대규모 신사인 조선신궁을 세움으로써 일제는 조선 점령의 마침표를 찍었다.

물론 해방이 되자 일제의 경건한 공간들도 빠르게 철거됐고, 이후 다양한 공공시설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예를 들어 남산의 조선신궁 자리에는 도서관이 들어섰고, 진해 신사 자리에는 남산초등학교가, 마산 신사 자리에는 제일여고가 들어섰다.

경건한 공간에 대한 생각은 국가나 종교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세력간에도 첨예하게 대립됐다. 해방 이후 효창원은 김구 선생이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이동녕 등 다수의 독립운동가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를 모시면서 성역화됐고, 김구 선생도 이곳에 묻히면서 해방된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대표적인 경건한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친일 세력과 손잡으며 정권을 잡는데 성공한 이승만 대통령은 이곳이 매우 불편할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 1959년 6월에 아시아 축구 선수권대회 유치가 확정된 것을 핑계로 바로 이곳에 운동장을 짓게 된다. 이후 이곳은 효창원이라 불리는 대신 효창운동장으로 불리며 '세속화'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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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를 비롯해 독립운동가와 임시정부 요인들을 모신 경건한 공간 효창원이 불편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를 핑계로 이곳에 운동장을 건설할 것을 지시했다./김태훈

지난 2013년 내내 마산역 앞을 뜨겁게 달군 이은상 시비 사건도 마산이란 도시공동체의 경건한 공간에 대한 갈등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독재에 저항했던 3·15의 정체성과 권력에 부화뇌동하고 양지만을 쫓았던 이은상의 정체성이 충돌하는 현장이었다. 마산의 경건한 공간을 둘러싼 이같은 갈등은 기존 마산문학관을 이은상의 호를 딴 노산문학관으로 바꾸려는 창원시와 이를 저지하려는 시민단체가 대립하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경건한 공간이 살아야 도시 이야기가 산다

이처럼 경건한 공간에 대한 갈등이 있다는 것은 역으로 경건한 공간에 대한 도시 공동체의 열망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좋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갈등 상황보다 더 나쁜 것은 경건한 공간을 도시가 갖고 있더라도 시민들이 무관심한 경우일 것이다. 마치 중세시대 도시의 중심을 차지했던 성당이 오늘날은 한낱 관광객의 사진 배경으로 전락한 것처럼 말이다.

경건한 공간에 대한 공감대가 높은 도시와 그렇지 못한 도시는 같을 수가 없다. 경건한 공간에 대한 공감대는 시민들이 자기 도시에 대해 느끼는 자부심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자기 도시에 대한 자부심을 다수가 갖고 있는 도시와 그렇지 못한 도시는 특히 문제 해결 능력에서 차이가 난다. 공통으로 추구하는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집합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 때 도시의 미래와 운명은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경건한 공간에 대한 공감대를 높이기 위해서는 유기적인 스토리텔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 공간에 대해서 시민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들을 제공해야 한다. 조상들은 유기적인 스토리텔링을 위해 정기적으로 '제사'를 올리고 '축제'를 열었다. 예법과 격식을 갖춘 의식과 해원상생의 축제에 공동체를 참여시킴으로써 경건한 공간의 영향력을 현실 속에 새기고 또 확장한 것이다.

이 부분에 우리의 고민과 숙제가 있다. 현대 한국 사회는 더 이상 종교성이 압도적으로 지배하지 못한다.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도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다. 사람들의 이동도 잦고 예전 같은 소속감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이런 변화 가운데서 과연 도시의 경건한 공간이 예전처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영향력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면 경건한 공간을 새로 만들어야 할까?

도시는 저마다의 문제와 고민을 안고 있다. 따라서 해법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도시의 스토리텔링은 도시의 경건한 공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은 모두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질문부터 시작해보자. 우리 도시의 경건한 공간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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