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많은 사람만 기부하나? 나눔으로 희망을 배달하는 집배원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2007년 12월 설립한 개인 고액기부자 클럽, '아너소사이어티(Honor Society)'는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기부문화 확산을 위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1억 원 이상 기부하는 아너소사이어티 클럽 회원은 아니지만 우체국에 근무하며 헌혈과 자원봉사 활동으로 나눔문화에 전도사가 된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그를 '희망배달부'라고 불렀다.

500만 원은 내 돈이 아닙니다

지난 2월 25일 아침. 업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지난해 헌혈 200회 달성 기념으로 전화 인터뷰를 했던 임성준(49) 씨였다.

"제가 지금 막 창원에 도착했습니다. 어제 서울에서 상과 상금을 받았는데 마음 바뀌기 전에 기부하려고 전화했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전해 온 말에 당황했지만 이내 임 씨의 뜻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상으로 상금 500만 원도 함께 받았죠. 한 일도 없는데 앞으로 더 잘하라는 뜻이겠죠. 새벽차를 타고 오면서 생각해 보니 상은 제가 가져도 되겠지만, 상금은 제 것이 아니라고 생각돼서 차에서 내리자마자 전화한 거예요. 견물생심이라고 내 돈도 아닌데…. 암튼 지역의 청소년을 위해서 이 상금을 쓰고 싶습니다. 도움 될만한 곳이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받은 상금이 부담스러웠는데 기부한다고 약속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네요."

임 씨는 우편물 집배, 자원봉사단체 운영, 장애인들의 자연체험 행사와 독거노인 방문 도배·장판 보수 공사, 사랑의 연탄 배달, 생필품 지원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2월 24일 (재)청소년을 위한 나눔문화재단에서 수여하는 서담상을 받은 것이었다. 그가 받은 서담상은 '복되고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구름' 이란 뜻으로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나눔의 행동을 실천하는 숨은 일꾼을 찾아 격려하기 위해 2010년에 제정된 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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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나눔문화재단에서 받은 서담상 상금 500만원을 보리학교에 기부한 임성준 집배원(오른쪽에서 세 번째)/박민국 기자

임 씨가 기부를 약속한 상금은 9일 만에 주인을 만났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게 된 학교 밖 청소년과 공평한 교육혜택을 받지 못한 저소득 계층 아동들에게 다양한 진로탐색 경험과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사)창원가온누리센터 보리학교를 선택했다. 그리고 기부금 전달식은 3월 5일 그의 봉사 진원지인 창원우체국 집배실에서 열렸다. 애초 그는 계좌이체를 통해 상금을 기부했지만, 후원을 받은 보리학교 선생님들이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그의 작업장을 방문했다.

"많은 돈도, 큰 일도 아닌데 여기까지 와 주셔서 제가 더 미안합니다. 보리학교 선생님들의 자원봉사를 존경합니다. 이번 기회에 대안위탁학교인 보리학교를 위해 후원자들도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자원봉사'란 공통점을 지닌 '희망'집배원과 '행복'선생님들의 조촐한 기부금 전달식은 10여 분도 걸리지 않았다. 전달식을 지켜보던 동료들은 한결같은 말을 했다.

"임 씨가 얼마나 봉사와 기부를 열심히 하는데 이런 날은 신문이나 방송에서 취재 와야 하는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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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우체국 집배원 임성준 씨./경남도민일보DB

영세민 장남, 마음의 빚을 지다

부산의 대표적인 달동네로 불리는 동구 수정동에서 태어난 임 씨는 3남매의 장남으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시고, 남편의 병원비와 약값을 벌기 위해 행상을 다닌 어머니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임 씨는 12살 때 처음으로 가정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가 살아가며 실천해야 할 약속이 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 도장을 들고 당감동에 간 적이 있어요. 아버지는 움직이지도 못하시고 어머니도 일하시느라 바빠서 제가 대신 복지회관에 가서 3만 4000원을 받아왔어요. 그때 우리 집이 영세민이라 도와준다는 말을 들었어요. 돈을 받으며 언젠가는 이 돈을 꼭 갚겠다고 마음먹었죠. 37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에게는 부모에 대한 원망도 사치였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대신해 일했지만 배고픈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가 부산서중학교에 진학해서도 집안 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난은 그의 중학교 추억을 지켜주지 못했다. 소풍도 수학여행도 가지 못했다. 중학교 3년 생활이 담겨 있는 졸업앨범도 가질 수 없었다.

"요즘 수돗물 먹고 공부한 지위 높은 분이 화제가 되는데 저도 정말 많이 먹었습니다. 물 먹으면 한 30분은 배가 빵빵합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기운이 빠지고 힘이 없고 그러면 또 가서 마셨죠. 배고픔에 대한 기억은 누구 못지 않게 갖고 있죠. 물 많이 먹으면 화장실도 자주 갔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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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준 집배원./박민국 기자

임 씨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단했던 청소년 시절 이야기를 이어갔다.

배고프고 외로운 중학생의 유일한 탈출구는 글짓기였다. 그는 시를 쓰고 글을 적으며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도와준 선생님이 곁에 있었던 것을 인생의 최대 행운이라고 말했다.

"당시 학교에 박미숙 국어 선생님이 계셨는데 저에게는 인생의 멘토였지요. 어려운 형편에 다른 길로 빠지지 않은 것도 다 선생님 덕분이죠. 제가 글짓기를 하도록 권유하셨고 상도 받게 해 주시고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주신 은사님이셨죠."

1983년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헌신을 뒤로하고 그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돌아가셨다. 아버지도 안 계신 그에게 선택의 조건은 하나, 군 위탁장학생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는 부산디지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사관으로 복무하며 국가에 진 빚을 갚았다.

'행복집배원' 가방에 나눔을 담다

1999년 창원과 인연을 맺은 그가 기부와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10월 집배원 정식 임용이 된 이후부터다. 임 씨는 군대를 전역한 1990년부터 98년까지 실패와 좌절을 겪었다. 그러나 그의 다양한 경험은 서비스 공무원으로 살아가는데 큰 자산이 됐다.

"사회 첫발은 엘리베이터 설치하는 공장에서 시작했지요. 일은 힘든데 돈은 모이지 않아서 5년 만에 근무를 그만두고 1995년 백일도 안된 큰 놈과 아내와 함께 처남을 따라 경기도 고양에 가서 비닐하우스 농사를 지었습니다.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채소 운반 트럭을 몰고 장사를 했죠. 너무 의욕만 앞섰죠. 농사와 장사가 몇 년 만에 승부가 나는 직업이 아니잖아요. 그래도 그때 경험이 지금 고객님들 만날 때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함께 고생했던 집사람에게 많이 미안하죠. 아내에게 평생 갚아야 할 빚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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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준 집배원./박민국 기자

부사관 시절 친구 소개로 만나 전역 후 면사포도 씌어주지 못하고 함께한 아내는 그의 원동력이다. 경기도 생활을 청산하고 창원에 온 것도 아내의 권유 때문이었다.

"손윗 동서가 창원우체국 집배원을 하고 있었어요. IMF 이후 1999년 상시위탁집배원을 마지막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선택했죠.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3D업종으로 인식해서 같이 출발한 입사 동기 12명 중 2명만 남았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리를 누벼야 하는 집배원 일이 쉽지만은 않죠."

그가 처음으로 나눔을 위해 실천한 일은 2004년 경남아동복지협회 후원회원으로 가입한 것이다. 그의 기부 금액은 많지 않았다. '작지만 끝까지', 그가 나눔을 실천하며 지키는 원칙이다. 임 씨의 나눔 생활은 동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010년 창원우체국에 '징검다리' 봉사 동아리가 탄생했다. 그와 동료 4명은 누군가의 디딤돌 역할을 하는 징검다리처럼 몸이 불편하거나 소외된 이웃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의기투합했다. 그가 5년째 회장을 맡은 '징검다리' 봉사단 회원은 32명으로 늘었다. 장애인들과 소풍을 떠나기도 하며 복지시설인 마산 애리원과 인연을 맺어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고 있다. 또한 저소득층 아동의 자립을 도우며 봉사단 32명 회원 모두가 기부자가 낸 금액 만큼 정부가 보전해주는 '디딤씨앗통장'을 만들어 나눔문화를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비록 적지만 한 달 회비 만 원으로 아이들에게 희망을 심어 줄 수가 있어 보람이 있습니다. 후원과 기부는 자신의 처지에 맞게 해야 합니다. 금액이 적더라도 꾸준히 실천하는 게 중요하죠. 무리하게 후원하다 끊어버리면 수혜자 아동들은 좌절하죠. 제가 12살 때 영세민 아들 자격으로 후원금을 받아 본 경험이 있잖아요."

나눔은 일상 새로운 꿈 '시작'

임 씨는 현재 '징검다리봉사단', '경남헌혈사랑봉사단', '창원시자원봉사단체협의회' 등의 단체에서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또한 그가 고등학교 시절 호기심에 시작한 '피 나눔' 헌혈은 220회를 넘었다. 그는 연간 50만 통의 우편물을 전달하기 위해 오전 8시 출근, 오전 9시 집배업무, 오후 4~5시 우편물 분류 작업, 오후 8시께 퇴근을 한다. 임 씨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반복되는 업무 속에 피곤할 법도 하지만 토요일 만은 나눔을 위해 약속을 비워둔다. '징검다리봉사단' 문을 연 후 5년째 이어지는 일상이다.

"오는 4월엔 합천 해인사로 중증장애인들과 소풍을 갈 겁니다. 사찰에 계단이 많아서 걱정이지만 봉사자님들 힘이 좋아서 믿어야죠. 작년 가을 나들이엔 밀양 케이블카를 탔는데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친구들 휠체어 밀고 당기고 들고 산 정상까지 힘들게 올라갔죠. 힘들면 힘들수록,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나눔 바이러스는 넓게 퍼져 나가더라고요."

나눔 바이러스 효과는 그에게도 찾아왔다. 4년 전 수소문 끝에 중학교 시절 버팀목 역할을 해 주던 박미숙 선생님을 다시 만난 것이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나누며 살라고 박 선생님을 만나게 해 준 것 같아요. 선생님을 뵙고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던 어릴 적 꿈을 꺼냈습니다. 시를 쓰기 시작했죠. 단어와 단어를 연결해 제 심정을 표현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더라고요. 박 기자님과 소중한 시간을 함께 나누기 위해 어제 시 한 편을 적었습니다. 졸필인데 여기 있습니다."

임 씨는 A4 용지에 프린터 해 온 자작시를 건내며 시계를 보았다. 그는 대학에 재학 중인 아들과 딸의 학자금 대출 서류 준비를 위해 약속이 있다고 했다.

의아했다. 임 씨 본인의 공로로 주어진 상금은 자신의 돈이 아니라며 남의 집 아이들에 장학금으로 내놓고 정작 그의 자녀들은 학자금 대출을 받아 학업을 시키는 이유가 궁금했다.

"당장 상금이나 기부하는 후원금이 없어도 우리 가족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눔을 받는 사람에겐 그 돈은 희망이고 꿈이고 미래죠. 가진 것이 많아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가질 수 있어서 나누는 거죠."

 세월이 흘러서 가야지

 아무도 모르게 가야지

 세상 친구들

 고백마저도 떨치고

 참고 참고 가야지

 가슴속 깊이 간직한

 조그만 비밀이라도

 참고 참고 가야지

 세월이 흘러

 세월이 흘러서 가야지

 아무도 모르게 가야지

 「아무도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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