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 경남]사료 적어 국가 성장·발전과정 연구 부족…1980년대 발굴 본격화 되면서 연구 비약적 발전

1980년 중반 대구와 서울 골동품 가게에 갑자기 화려한 청동기와 철기, 토기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동안 잘 보지 못한 물건이라 도굴꾼들도 진품인지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도굴꾼들은 대담하게 학계 권위자를 찾았다. 물건을 본 학자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엄청난 것들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물었으나 처벌이 두려웠던 도굴꾼들은 좀체 입을 열지 않았다. 도굴꾼들과 1년여간 실랑이를 벌인 끝에야 국립중앙박물관이 겨우 발굴을 시작할 수 있었다. 창원시 의창구 동읍 다호리 유적 이야기다. 이 유적은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에 이르는 초기 철기시대 고분군으로 지금까지 발굴된 것으로는 가장 큰 규모다. 이는 고대 경남 지역에 철기문화가 발달한 상당히 강력한 정치집단이 형성돼 있었다는 뜻이다. 바로 가야 여러 나라들이다.

22.jpg

기록 없어 홀대받던 고대국가

"고대 한반도 국가들은 '삼국'이라는 등식으로 정리되었다. 부여가 고구려의 부속품이 되고 마한의 소국들이 백제의 부속품이 됐듯이 가야는 신라의 부속품이 돼 역사학자들의 일차적 관심 대상에서 사라졌다."(박노자, 2010)

일반적으로 고대 한반도 역사는 고조선, 마한·진한·변한 삼한시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시대로 정리된다. 삼한시대와 삼국시대에 걸쳐 600년 동안 한반도와 역사를 함께한 가야는 학자들의 안중에 없었다. 무엇보다 문헌 기록이 턱없이 부족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삼국사기>에 본기(本紀)가 있다. 하지만 가야 사람이 직접 쓰고 가야를 중심으로 서술한 역사서는 없다. <삼국사기>,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 중국 역사서 <삼국지>에 가야 관련 내용이 있지만 신라, 일본, 중국을 중심으로 서술돼 있다. <삼국유사>에 '가락국기'가 있는데 설화적인 내용이 많아서 자료 활용에는 한계가 있다." (창원대 사학과 남재우 교수)

게다가 해방 이후 가야사 연구라는 게 대부분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거였다. 가야사는 <일본서기>를 토대로 한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다시 말해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를 중심으로 다뤄졌다. 그러면서 가야 자체 성장과 발전 과정에 대한 연구는 부족했다.

발굴과 함께 모습 드러낸 현실 속 가야

가야사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1970∼1980년대 본격적으로 고분 발굴이 이뤄지고부터다. 문헌에서만 보던 나라들이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70, 80년대 이후 낙동강 유역에서 가야 유적을 많이 발굴했다. 공단 조성 과정에서 가야시대 고분 유적들이 발견되기도 했다."(남재우 교수)

김해 수로왕릉

일제강점기부터 이름이 났던 함안 말이산 고분군은 지난 1917년 일본 학자들이 처음 발굴을 시작했다. 그후로는 해방 후까지 내내 도굴에 시달리다가 1986년에 와서야 창원대학교 박물관이 본격적으로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역시 일제강점기 발굴조사가 이뤄진 창녕 교동 고분군도 도굴로 상당 부분이 훼손됐다. 그러다 1980년대 창녕군이 세운 정비 복원 계획에 따라 지난 1992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김해 대표적 가야 유적인 대성동 고군분은 1990년에야 경성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를 시작했다. 김해 봉황동 유적과 패총도 1990년대 유적 정비와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조사가 이뤄졌다.

"가야시대 고분들이 대부분 도굴되어 원형을 잃어 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비밀에 싸인 왕국 가야는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고분들이 발굴되면서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덤들에서는 금동관, 화려한 장신구, 철제 무기 등이 발굴되면서 가야가 고구려, 백제, 신라에 결코 뒤지지 않는 역사와 문화가 있는 나라였음을 알게 됐다."(이희근·김경복, 2001)

산청 전 구형왕릉

고대 한반도는 삼국 아닌 4국시대

가야는 가라에서 온 말이다. 가라는 '마을'이란 뜻이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伽倻(가야)'란 한자는 조선시대부터 사용한 것이다. 학자들은 대체로 <삼국지> 등 기록을 토대로 12개 이상의 가야국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했다고 본다.

"금관가야(김해), 대가야(경북 고령), 아라가야(함안)와 같은 이름은 신라와 고려시대에 붙여줬던 이름들로, 정작 가야 사람들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가야 각국을 부를 때는 가락국, 아라국(안야국), 다라국으로 쓰는 것이 옳다."(이영식, 2009)

함안 성산산성 건물 터

이들 가야국은 통일국가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강한 존재감으로 고대 한반도에서 번영했다. 고분 발굴이 활발했던 1980년대 이후 가야사 연구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그 실체도 상당 부분 드러났다. 이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시대가 아니라 고구려·백제·신라·가야 4국시대로 불러야 하는 이유다.

"가야는 실제 600년 이상 실존했던 나라다. 가야도 나름의 정치 발전 과정이 있고 주변 국가와 관계 속에서 성장했다. 가야사를 복원함으로써 한국 고대사를 더욱 확연하게 드러낼 수 있다. 최소한 한국 고대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함께 언급하는 게 맞다."(남재우 교수)

▶참고 문헌 <가야는 신비의 왕국이었나>(이희근·김경복, 청아출판사, 2001),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 역사여행>(이영식, 지식산업사, 2009), <거꾸로 보는 고대사>(박노자, 한겨레출판, 2010)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