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도시를 바꾸고, 변화는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가 되려면 '변화'는 필수다. 악랄하던 악당이 개과천선을 하든지, 연습생으로 들어와서 슈퍼스타가 되든지, 재벌이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되든지, 정의의 사도가 배반의 화신으로 추락하든지,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두드러질 때 비로소 이야기는 힘을 가진다.

도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도시 이야기는 이를테면 '변화의 기록'이다. 바다를 매립해 신도시를 세우든지, 산을 깎아 도로를 내든지, 논밭을 밀어 마천루를 세우든지, 장터를 밀어내고 유흥가를 만들든지, 아니면 디트로이트처럼 아예 몰락하든지, 크고 작은 다양한 변화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지난 글에서 '도시 이야기의 골간은 도시정치'라고 주장한 이유는 바로 정치가 도시 변화의 방향과 강도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도시공동체가 어떤 정치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도시의 운명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대목에서 각성해야 할 부분은 시민이 정치를 '선택'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금싸라기 땅에 거대한 공원이 들어선 이유

세계의 수도라는 뉴욕에서 가장 사랑 받는 장소는 단연 중앙공원(센트럴파크)이다. 뉴욕 맨해튼 도심 한복판에 직사각형으로 자리잡은 이 공원은 100만평이 넘는 면적으로 서울 여의도 전체(89만평)보다 훨씬 큰 규모를 자랑한다. 금싸라기라는 표현도 모자랄 이 엄청난 땅에 건물을 세우고 세를 놓았으면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을 텐데, 뉴욕의 도시 공동체는 건물과 도로 대신 공원을 선택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센트럴파크가 문을 연 것은 1858년이다. 그보다 7년 전인 1851년에 뉴욕시는 공원법을 제정했고, 1853년 7월에는 시가 사유지였던 해당 토지를 취득할 수 있게 하는(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토지 수용'을 가능하게 하는) 법안을 시의회가 통과시킨다. 여기까지는 인터넷 검색으로 쉽게 알 수 있는 센트럴파크에 관한 사실들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단순 검색으로는 알 수 없는 복잡한 사회문화적 맥락이 있고, 그 실타래를 푸는 정치활동이 있었다.

1800년대 중반 뉴욕은 세계 이민자들의 거대한 집합소였다. 특히 본토의 대기근을 피해 탈출하다시피 이주한 아일랜드인들이 하루에도 수천명이 뉴욕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였다. 당시 뉴욕 인구는 순식간에 열 배 이상 폭증했고, 그 결과 생활환경이 빠른 속도로 피폐해지고 있었다. 기존 뉴욕 시민 입장에선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주민과의 극한적인 갈등도 불가피했다.

그때 뉴욕 상황을 그린 영화가 바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갱스 오브 뉴욕(2002년작)'이다. 영화에서 그려진 대로 당시 뉴욕의 상당 지역이 이주민들로 인해 게토화되어 있었다. 정통 뉴요커들과 아일랜드 이주민들 사이에 주도권 다툼은 서로 피를 뿌리는 전쟁이었다. 그 즈음 대규모 도시공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언론인 윌리엄 브라이언트가 "지금 공원을 만들지 않으면 백년 후 뉴욕은 같은 넓이의 정신병원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같은 사회적 배경 때문이었다.

도심에 대공원을 만들어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1850년대 초에 여러 신문에서 기사와 칼럼의 형식으로 자주 제안되었고 시민들도 이 의제를 광범위하게 공유하고 있었다. 공원에 대한 기대감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사람들은 공원이 육체적인 건강은 물론 정신적인 건강까지도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다.

이 같은 기대감은 영국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정원은 본래 왕족과 소수 귀족의 사냥터였지만 17세기 이후 시민의 힘이 강해지면서 차츰 일반인에게도 개방되기 시작했고, 특히 1842년에는 시민의 세금으로 만든 첫번째 공원인 버켄헤드파크가 영국 리버풀에서 문을 열었다. 특정 신분이 아니어도 시민이 만든 정치체제가 세금을 재원으로 공원을 만들 수 있다는 사례를 만든 것이었다.

02.jpg
맨해튼 한복판에 조성된 센트럴파크./출처 위키피디아

영국의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자 뉴욕에서도 대규모 도시공원 건설이 중요한 정치 아젠다로 부상했다. 당장 시장 선거에서 핵심 공약으로 채택되었다.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신음하던 시민들의 반응 또한 뜨거웠다고 한다. 시민의 염원이 정치체제를 선택하고, 그 체제가 제도와 재원을 만들어 도시를 변화시킨 것이다.

센트럴파크가 개장한지 벌써 150여년이 지났지만 설계자인 옴스테드가 처음 고안했던 기본 골격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공원을 통해 도시를 치유하고자 했던 믿음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물론 20세기 초중반 센트럴파크는 관료화와 도덕적 해이가 일상이 되고 불법과 우범지대로 전락하는 등 도시의 심각한 골치덩어리가 되기도 하지만 뉴욕 공동체는 공원을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오늘날의 명소로 성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권력자를 위한 도시 서울

우리나라의 대표 도시인 서울은 그 반대의 사례를 잘 보여준다. 지금 서울의 골격은 대부분 박정희 시대에 불도저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김현옥 시장 때 만들어졌다. 지난 글에도 밝혔듯이 박정희 쿠데타 세력은 집권하자마자 지방자치제도를 무력화시키고 모든 기관에 군출신 인사나 쿠데타 세력에 협조적인 관료를 '파견'했다. 1966년 4월에 서울 시장이 된 김현옥도 물론 쿠데타에 참여한 군인 출신이다.

당시 서울도 19세기 말의 뉴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서울로 서울로 몰려들었다. 서울시 도시계획에 오랫동안 참여했던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에 따르면(이하 중앙일보 2003년 '서울만들기' 연재 인터뷰 참조) 서울 도시 개발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1966년부터 80년까지 15년간 인구가 489만여 명, 하루 평균 900명 가까이 늘어났다고 한다. 주택과 식수는 늘 모자랐고, 사람들이 배출하는 쓰레기는 거리 구석구석을 메웠다.

뉴요커들이 아일랜드 이주민을 싫어했던 것만큼 서울 토박이들도 시골 출신들을 무척 싫어했다. 전쟁 후 고향을 떠나 서울을 찾은 사람들에게는 예외 없이 '시굴띠기(시굴은 시골의 서울 사투리다)'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어느 곳에서나 놀림을 받았다. 1960년대 초에 서울 시장을 맡았던 서울토박이 윤치영(윤보선의 삼촌이다)은 서울시 국정감사장에서 "좀 더 좋은 도시를 만들 수 없느냐"고 따지던 국회의원을 향해 "농촌 인구가 서울로 모여들지 않게 하려면 서울을 좋은 도시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서울을 방치해 두는 것은 바로 서울 인구집중을 방지하는 한 방안입니다"라는 황당한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윤 시장은 1964년에 국회에 '지방민의 서울이주를 허가제로 하는 입법'을 요구했고, 이 내용이 라디오와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서울의 인구집중 문제가 사회적인 의제로 부상했다. 이 분위기 속에서 같은 해에 우리나라 최초의 '대도시 인구집중 방지책'이 만들어지면서 오늘날 수도권 규제정책과 지역균형발전 정책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쿠데타 이후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하고 있던 박정희에게 윤치영의 소극적인 도시정책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박정희는 윤치영을 해임하고 자신의 부하이자 쿠데타 동지였던 김현옥 부산시장을 서울로 불러올렸다. 당시 갓 마흔 살을 넘겼던 김현옥은 서울시 문제를 해결하되 시민의 관점이 아니라 대통령의 관점에서 추진했다. 시장의 임명권이 시민의 손이 아니라 대통령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축된 '시민아파트'였다. 1968년 6월에 첫삽을 뜬 최초의 시민아파트(훗날 금화아파트로 불림)는 시장의 직접 지시에 따라 서대문구 냉천동 해발 203미터 고지대에 터를 잡았다. 주민 입장에서도 불편한 곳이었지만 자재 운반이 어려워 공사에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김 시장이 고지대를 부지로 선정한 이유는 "높은 데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이기" 때문이었다.

권력자를 위한 도시의 비참한 결말

냉천동 금화아파트가 좋은 평가를 받자 김 시장은 1969년부터 시민아파트 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김 시장이 지어올린 아파트가 그 해에만 서른 두 곳에 406개 동 1만 5000가구에 달했다. 물론 이때 지은 모든 아파트들은 청와대에서 잘 보이는 고지대에 들어섰다. 그 중에 유명한 곳이 마포구 와우산에 들어선 와우지구 시민아파트였다.

16개 동으로 구성된 와우지구 시민아파트는 1969년 12월에 준공돼 70년 3월부터 입주가 시작됐지만 이미 벽 곳곳에 금이 가 있었다. 급기야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4월 8일 새벽에 15동이 무너져서 당시 주민 73명 중 33명이 죽고 40명이 부상하는 처참한 사고로 일어났고, 그 책임을 지고 4월 16일에 김현옥은 서울 시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물론 김 시장이 최고 권력자의 눈에 들기 위해 무리수를 둔 것이 시민 아파트뿐만이 아니었다. 김현옥 시장 전에 지어지긴 했지만 워커힐 호텔을 박정희 대통령이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울 동부권의 도로 개발에 도시 행정력을 집중했다. 아울러 서울 도심에서 워커힐 호텔까지 가장 효과적으로 이어주는 청계고가도로 건설을 다른 정부 부처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철시킨 장본인 또한 김현옥이었다.

03.jpg
1970년 4월 8일 새벽에 붕괴된 와우아파트.

당시 김시장이 얼마나 많은 공사를 한꺼번에 추진했던지 전국적으로 시멘트와 철근, 골재 등의 건축자재 파동이 일어났다. 경제기획원장관이 직접 나서서 건설공사를 중지하거나 속도 조절을 하라고 지시했지만, 오로지 청와대 바라기였던 김 시장은 그 지시를 전혀 듣지 않았다. 동시다발로 공사를 벌이니 시 재정 또한 바닥이 났다. 김 시장은 서울 도심의 시유지를 팔아서 부족한 재원을 메웠다. 그때 매각한 시유지 중 상당수는 '도심 녹지' 또는 '공원 후보지'였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울 도시기본계획에서 명동 일대는 녹지로 지정돼 있었다. 그 계획대로라면 서울의 도심 한복판에 대규모 공원이 들어설 수도 있었다. 서울의 궁궐과 도심의 녹지가 어우러졌다면, 지금의 서울은 매우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김현옥은 박정희의 눈에 들기 위해 녹지를 다 팔아치웠고, 그 자리는 부동산 사업자들이 세운 마천루가 빼곡하게 들어섰다. 물론 현재까지.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김현옥이 만든 불도저식 도시개발 모델이 김현옥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고, 서울을 흉내내고 싶어하는 전국 도시들로 확산됐다는 사실이다. 부수고 길을 내고 높게 지어올려야 시장이 일 열심히 한다, 도시가 발전하고 있다고 여기는 풍토가 이때부터 생겨났다. 전국에 수많은 김현옥들이 도시 권력을 거머쥐고 시민이 아닌 권력자를 위한 도시 건설에 매달렸다.

그 결말은 비참했다. 1970년 4월 와우아파트가 무너진지 1년 만에 21층짜리 대연각호텔에 큰 불이 나며 사망자 166명을 포함해 234명의 사상자를 냈다. 특히 70년대의 무리한 개발사업은 그 수명이 다한 90년대에 이르러 대형사고들로 이어졌다. 91년 1월에는 청주 우암상가아파트가 무너져 12명이 사망했고, 93년 3월에는 부산 구포역 인근에서 무궁화호가 전복해 78명이 죽었다. 94년 10월에는 서울 성수대교 상판 50여 미터가 내려앉아 32명이, 두 달 뒤에는 서울 아현동 가스공급기지가 폭발해 12명이 숨졌다. 95년 4월에는 대구 지하철공사장에서 가스가 폭발해 101명이, 6월에는 서초동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502명이 사망했다.

좋은 도시 정치는 시민에게 희망을 준다

20세기 말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는 그야말로 생지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콜롬비아 정부와 혁명군(FARC) 사이의 내전이 수십년 간 이어지면서 수많은 난민들이 수도 보고타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8만 명 가까이가 보고타로 이주하면서 시 외곽에는 거대한 슬럼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치안 상태도 엉망이었다.

1995년 한 해만 살인 범죄가 3363건(인구 10만명 당 살인사건 피해자 60명, 우리나라 2013년 평균은 1.9명), 교통사고 사망자수는 1387명이었다. 납치와 암살이 빈번해 선거 운동을 할 때도 방탄차량을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그러나 1997년에 엔리케 페날로사(Enrique Penalosa)가 삼수만에 시장에 취임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고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방해하는 정책을 내놓았다. 그가 시장으로 당선되기 전 보고타시는 일본국제협력기구(jica)에 교통 문제 해결방안 용역을 발주했는데, 그 결론이 50억 달러를 들여 고가 고속도로망을 건설하라는 것이었다. 엔리케는 이 사업이 일본 자동차 기업과 보고타 엘리트에게만 이득이 된다고 비판하고 그 예산을 보행공간과 버스를 활용한 대중교통을 확대하고, 공공시설을 건설하는 데 투입했다.

예를 들면 빨간색의 섹시한 디자인으로 무장한 '트랜스밀레니오 버스시스템'을 완성해 교외 슬럼가와 도심간의 이동을 편리하게 했고, 버스 이용자들이 자가용 이용자들에 비해 주눅들지 않도록 했다. 시내 곳곳에 600여 개의 공원을 조성하고 나무 10만 그루를 심었으며 곳곳에 도서관을 세웠다.

01.jpg
2013년 한 TED 콘퍼런스에서 "왜 버스가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나타내는가?"란 주제로 강연하고 있는 엔리케 페날로사 보고타 전 시장.

엔리케 사례를 연구해 '우리는 도시에서 행복한가'라는 책을 펴낸 찰스 몽고메리는 이와 같은 일련의 시도들이 엔리케에겐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고 평가한. 엔리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도시의 모든 부분은 인간이 신성한 존재라는 사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시민들의 삶과 생각이 바뀌었다. 그가 임기를 마칠 때쯤엔 보고타 시민의 4분의 3이 보고타의 미래를 낙관했다. 세계 최악의 도시에서 살 만한 도시로 거듭난 것이다. 다음은 그가 시장 선거 때 연설한 내용 중 한 대목이다.

"우리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새들이 날아다녀야 하듯, 인간은 걸어다녀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겐 아름다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자연과 접촉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소외 당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과 평등하다는 감각을 느끼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