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 경남-경남의 사찰]만해 한용운 독립선언서 작성한 사천 다솔사, 빨치산 비극 품은 산청 대원사 등 근현대사 함께한 곳 많아

사천 다솔사는 단순한 사찰에 그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항일운동' '농촌계몽' '차 문화 부흥'의 공간이 된다. 이곳에서 만해 한용운이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하고, 김동리가 단편소설 <등신불>을 썼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보다는 최범술(1904~1979)이라는 승려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930년대, 최범술이 주지를 맡으면서 다솔사는 본격적인 항일운동 근거지가 된다. 그는 광명학원이라는 야학도 세워 농촌계몽에 앞장섰다. 김동리 역시 야학교사로 힘을 보탰다. 최범술은 이후 차 문화 대중화에도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최범술, 그리고 한용운·김동리 같은 인물이 머물렀던 다솔사는 근대 사상·문화 부흥의 장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로 다가온다.

사찰은 접근성이 중요하다지만, 그래도 산속 깊은 곳이 아무래도 어울린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웬만한 사찰은 다 갈 수 있다. 하지만 반듯한 길 없던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발걸음 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6·25전쟁 전후로 사찰은 아픔의 역사를 감내해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빨치산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가면 산다'는 생각에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산청 대원사·내원사 계곡 같은 곳이다.

도내 사찰에는 우리 사회의 지난 시간이 녹아 있다. 항일운동 장이었던 사천 다솔사. /남석형 기자

대원사는 오늘날 비구니 사찰로, 또한 그 앞 계곡은 발 담그고 더위 날리는 '탁족처'로 유명하다. 대원사로 향하면 갈수록 산이 깊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늦겨울 찾은 대원사는 깊고 고요하다. 1950~60년대 빨치산이 이곳 골짜기에서 활동했다는 것이 충분히 상상된다. 당시 이곳은 핏빛 공간이었다. 빨치산과 토벌대 간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골짜기에 들어온 그 누구도 살아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여기서도 '골로 갔다'는 말이 쓰였다고 한다.

대원사 아래에 자리한 내원사. 이곳 또한 계곡을 품고 있는데 '최후의 빨치산'이 따라붙는다. 1963년 11월 12일, 빨치산 1명이 사살되고 1명은 생포됐다. 이로써 10년간 이어진 빨치산 토벌작전도 막 내렸다. 당시 <경향신문> 기사 내용이다. '지리산망실공비 남녀 2명이 12일 새벽 2시경 약 15분간 경찰과의 교전 끝에 남자는 사살되고 여자는 생포되었다. 이른바 이일영 부대 대원인 지리산망실공비 이홍이(30·본적=산청군 삼장면 홍계리)와 정순덕(29·여·본적=산청군 삼장면 태하리)은 이날 새벽 2시경 지리산 중턱인 산청군 삼장면 내친리 상내원 부락 뒷산에서 신용관 경남도경국장이 진두지휘한 경찰대와 약 15분간 교전한 끝에 '이'는 사살되고 '정'은 2발의 총탄을 다리에 맞아 부상한 채 생포되었다. 경찰은 경남·북 및 전남·북 일대에 출몰하면서 인명 살해·방화 등 만행을 저질러왔던 망실공비는 이 2명의 생포 및 살해로 완전히 소탕되었다고 밝혔다.'

도내 사찰에는 우리 사회의 지난 시간이 녹아 있다. 가슴 아픈 핏빛 공간이었던 산청 대원사 계곡. 경남도민일보 DB

함양 벽송사도 비슷한 배경이다. 오늘날 이곳 안내판에는 큰 글씨로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라고 적어 놓았다. 안내판 내용을 읽다 보면 '벽송사는 빨치산 야전병원으로 이용되었다'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벽송사는 꽤 너른 터에 자리하고 있어 그 당시 야전병원 모습이 짐작된다. 지금 이곳 외형만 보면 긴 세월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당시 빨치산 소탕을 위해 국군이 불을 지르면서 법당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실되었고, 1960년대 중건했기 때문이다. 절터 주변에서는 지금도 종종 사람 뼈가 나온다고 한다. 벽송사에서 몇백m 떨어진 곳에는 서암정사가 있다. 벽송사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山是山 水是水)'. 성철 스님이 전한 이 법어는 오늘날까지 큰 울림으로 남아 있다. 스님은 합천 해인사에서 출가하고, 또 열반했다. 이 때문에 고향 산청 쪽에서는 자신들이 스님을 드러내려 애쓰는 듯하다. 스님이 태어난 산청 단성면 묵곡리에는 2001년 '겁외사'라는 절이 들어섰다. 경내에는 스님이 활동했던 공간을 복원해놓았다. 또한 겁외사 바로 건너편에 자리한 '성철스님 기념관'은 다음달 정식 개관한다. 겁외사·기념관 건립은 성철 스님 딸인 불필 스님 등이 뜻을 모았다고 한다. 하지만 동상·기념관은 소박함과는 거리 있어 보인다. 채움보다는 비움을 강조한 성철 스님이었기에 좀 어색하게 다가온다.

도내 사찰에는 우리 사회의 지난 시간이 녹아 있다. 큰 울림을 주고 떠난 성철 스님 동상이 있는 산청 겁외사. /남석형 기자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는 많은 사람에게 익숙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8년 11월부터 1990년 말까지 은둔생활을 한 곳이다. 그런데 당시 유배지 후보 중에 '고성 문수암'도 있었다고 한다. 그의 측근이기도 했던 허문도 전 국토통일원 장관이 이곳 고성 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여성월간지는 '제2 은둔지로 떠오른 고성 문수암 탐방취재기(1989년 5월호)'를 게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지역민 반대로 결국 백담사로 향했다고 한다. 고성 무이산 깊은 곳에 자리한 문수암에서는 한려수도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유배지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곳에 전 전 대통령이 오려고 했던 걸 보면, 국민이 바라는 진정한 반성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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