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이야기…사찰 재산기부 뜻 아래 국민대학 설립해인-마산대학 거쳐 지금 경남대로

해인사는 경남대학교의 전신인 해인-마산대학과 인연이 깊다.

1945년 해방 후 임시정부 인사들은 '국민대학'을 설립하기로 하고 추진 기성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국민대학 인가 신청은 미군정에 의해 번번이 거부됐다. 여기서 최범술이란 승려가 등장한다.

"당시 조선불교 중앙총무원 총무부장이던 최범술이 해인사의 사찰재산을 기부하여 재단을 구성하겠다는 뜻을 기성회에 전달해 왔다. 이 뜻이 수용된 뒤 1947년 최범술을 이사장으로 재단법인 국민대학 인가를 받았다."

하지만 학생과 교수들은 무능한 최범술 이사장 체계에 불만이 많았다. 한국전쟁으로 부산으로 교사를 옮긴 후 학생과 교수들은 최범술 재단과 결별하고 자체적으로 학교를 운영하는데 이는 나중에 국민대학교로 이어진다. 최범술 재단도 따로 국민대학을 이어가는데 이것이 해인대학이다.

"1952년 국민대학은 다시 경남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 경내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이후 국민대학을 해인대학으로 (개편해) 출범하게 되었다." 이후 해인대학은 진주시내로 잠시 옮겼다가 1955년 마산시 완월동으로 옮긴다. 그리고 1961년 교명을 다시 마산대학으로 바꾼다. 하지만 학교 재단은 늘 돈이 부족했다.

해인사 전경.

"당시 최범술 학장이 이사장으로 취임할 당시 재단에 기부하기로 한 해인사 일부 재산이 당시 학장이었던 최범술 개인의 의지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결국 해인사 대중들의 산문회의 추인을 받지 못해 해인사 재원은 해인학원 재산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해인대학은 경영이 어려워졌고 마침내 재단이 교체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재단은 1967년 학교법인 삼양학원에 경영권을 양도했다. 해인-마산대학과 불교계의 인연은 여기서 끊긴다. 이후 마산대학은 마산실업초급학교로, 다시 경남대학교로 이어진다.

※참고 문헌 <한국불교사연구>(고영섭, 한국학술정보,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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