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던 자동차대리점 접고 농사에 뛰어든 까닭  

잘 정돈된 농장. 전체 4500평 중 빨간 파프리카만 심은 1500평 규모의 시설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학창시절 학교 운동장에서 아침 조회를 하려고 학년별로 줄 맞춰 교장 선생님을 기다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쓰러짐도 방지하고 관리하기 쉽도록 파프리카 가지에 묶은 줄이 천장에 연결돼 하늘로 치솟은 큰 키를 자랑하고, 한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일렬로 선 파프리카 줄기가 반기듯 맞는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긴 유리온실 줄기 사이로 군데군데 채 익지 않은 파프리카가 빨간 고개를 내민다.

"자랑할 만한 특별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바쁜 걸음을 해 주시니 고맙습니더. 며칠 전 파프리카 수확을 해 지금은 익은 것들이 많이 없는데 우짭니꺼? 사진 잘 안 나오는 거 아닙니꺼?"

고성군 마암면 장산리 51-1번지 시설하우스에서 파프리카 농사를 짓는 만수팜 강준순(53) 대표. 강 사장의 웃음 머금은 푸근한 인사에서 어릴 적 시골 고향 마을에서 보았던 옆집 아저씨 얼굴이 스쳐간다.

자동차 세일즈맨, 파프리카 농부 되기까지

유리온실 3000평, 비닐온실 1500평의 농장에서 근로자 4명과 함께 파프리카를 재배하느라 하루도 쉴 틈이 없는 강준순 사장. 강 사장은 4개 동 4500평의 농장에서 연간 150t의 파프리카를 생산해 이 중 120t을 일본으로 수출한다. 강 사장이 파프리카 농사로 한 해 올리는 매출은 6억 원 이상이며, 1억 5000만 원에서 2억 원의 순익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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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강 사장이 파프리카 농사로 강소농 반열에 오른 이력이 궁금했다. 원래 농사를 지었던 것일까?

"아닙니다. 농사를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신마산(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자동차 판매 대리점을 운영했습니다. 그런데 한 고객이 뜬금없이 파프리카를 재배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며 전업해 볼 생각이 없는지 묻더라고요. 당시엔 그냥 흘려듣고 말았는데, 그 후에도 몇 차례 똑같은 말씀을 해 결국 그 사람의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자동차 영업이 잘되지 않아 그 고객이 전업을 권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 사장의 과거 아픈 기억이 아니었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재차 물었다. 그랬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자동차 판매요? 아주 잘했습니다. 마산에서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잘했습니다. 1·2등을 다투었습니다. 돈도 제법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 그가 잘 나가던 자동차 영업을 그만두었다니 그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커졌다.

"하루는 파프리카를 추천한 그 고객에게 주문한 승용차를 전달하고자 농장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엔 농사짓는 사람으로서 쉽게 탈 수 없었던 승용차를 주문했었습니다. 대우자동차가 생산한 고급 승용차인 프린스 모델에서도 최고급 차종을 주문했었습니다. 도대체 그 고객은 농사를 지으면서 얼마나 돈이 많아 이런 고급 승용차를 주문했나 싶어 참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고객이 주문한 승용차를 직접 몰고 그분이 운영하는 농장을 가게 됐습니다. 바로 파프리카 농장이었고, 이후 내 인생의 일대 전환기가 된 것이죠."

예상했던 가족의 반대, '강 고집' 못 꺾어

강 사장이 농부의 길로 들어선 과정을 듣노라니 가족의 반대는 불 보듯 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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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집사람과 한 달 넘도록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사실 지금 생각해봐도 아내와 가족의 반대는 당연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이란 사람이 그동안 잘 운영해 오던 자동차 영업점을 접고 아무 연고도 없는 고성에서 파프리카 농사를 짓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는데 '당신 마음대로 해 보시라'고 할 아내가 있겠습니까? 무책임하다고 생각했겠죠."

어느 가족인들 그렇게 반대하지 않았을까? 비록 영업직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직업 특성상 힘들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직접 몸으로 부딪혀 가며 하는 농사일과 비교할 수 있을까. 더구나 농사를 지어본 사람이라면 또 그럴 수도 있겠다 싶겠지만 농사는 전혀 지어보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직업이 없어 가족이 생활고에 시달리던 것도 아닌 상황에서 가장이란 사람이 한참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아이들이 세 명이나 있는데 잘나가던 자동차 판매점을 접고 파프리카 농사를 지으러 고성에 가겠다니 쉽게 허락할 수 있었겠나 싶었다.

하지만, 강 사장은 파프리카 농사를 짓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점점 더 '농업은 말 그대로 옛날처럼 자연에 순응해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아닌 산업'이라는 확신이 굳어갔고, 가족을 설득해 가면서 틈만 나면 파프리카 농장에 가 1년 넘게 일을 배웠다.

마침내 2007년 경매로 나온 시설하우스가 있어 낙찰을 받았다. 이어 부족한 자금은 그동안 모아 두었던 돈과 은행 융자 등을 통해 마련했고, 파프리카를 재배할 수 있도록 하우스 내부 철거작업과 시설 개선, 농지 매입 등 15억 원을 들여 파프리카 농사를 짓기 위한 작업을 마쳤다.

탄탄대로만 아닌 농사, 우여곡절도 많아

자동차 영업에서 파프리카 농사로 뛰어든 강 사장의 판단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농장을 갖기 전 1년 동안 파프리카 재배 기술을 배운 덕도 있었겠지만, 고교시절 농업계열 고등학교를 다니 것도 한밑천이 됐다.

2년 동안 무난히 농사를 지었다. 이제 강 사장에겐 자신감도 생겼다. 그래서 더 많은 수확을 위해 친환경적인 시설로 하우스를 개선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여기에는 고성군에서 불기 시작한 '생명환경농법'의 영향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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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그렇게 시작된 시설개선 작업 중 지난 2009년 9월 유리하우스를 더 높게 지으려다 한 동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엔 보험에 가입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몰라 무보험 상태에서 당한 사고라 파프리카 농사를 시작한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삼각형 모양의 지붕 골조가 그대로 땅에 떨어지면서 근로자들이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고를 당하고 보니 당시 주위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야반도주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또다시 가족의 반대가 시작됐다. 누구나 쉽게 지을 수 없는 농사란 걸 알았으니 예전에 했던 자동차 영업을 다시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 사장은 포기할 수 없었다. 이제 겨우 한 번 고비를 맞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무너진 시설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또다시 거금이 필요한데 자금 마련이 여의치 않았다.

"엄청난 고민을 했습니다. 한 달 만에 몸무게가 20㎏ 정도 빠졌습니다. 그런데 역시 고마운 것은 가족과 친척이었습니다. 처형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아파트를 처분해 제게 용기를 주었고, 제가 갖고 있던 아파트도 팔아 재기할 수 있는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고성농업기술센터의 지원도 큰 힘이 되었고요."

일본에 편중된 시장, 내수 확대 등 다변화 필요

강 사장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또 궁금함이 생겼다. 누구나 1년 정도 재배기술을 익히면 파프리카 농사를 지어 주위의 부러움을 받는 강소농이 될 수 있는 걸까? 강 사장은 어림없는 소리라고 단언한다. 우선 탄탄한 판로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설이나 환경개선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없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단다.

지난해만 해도 강 사장은 기금과 도·군비, 자부담 등 4억 7000만 원을 들여 배수시설, 수평커튼, 이산화탄소 배관, 양액시스템, 전기 및 유동 팬시설, 인터넷복합환경 자동제어시스템 등 고품질의 파프리카를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보강했다. 더구나 파프리카 농사가 고소득을 올리는 작물로 알려지면서 너도나도 시설확대 등 투자에 나서 남들과 같은 재배 방식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지난 2009년부터 2012년까지는 수출이 잘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규모의 대형화 바람이 불었죠. 또 최근엔 주 수출국인 일본의 엔저 현상이 심화하면서 농산물 제값받기가 아주 어려워져 시장다변화는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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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강 사장은 무조건 수출만이 살길이란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느꼈다. 내수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이런 고민을 타개하고자 지난해 7월 농부들이 직접 운영하는 농축수산물 직거래 쇼핑몰인 '좋아요 농부들(likefarmers.co.kr)'을 만들었다. 이 쇼핑몰에선 곡류뿐만 아니라 채소류, 과일류, 농산가공품, 버섯·건강·약용·차, 화훼, 수산물·건어물, 씨앗·모종·퇴비, 체험·휴양에 이르기까지 농민들이 생산한 것들을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고 있다.

특히 '좋아요 농부들' 입점을 희망하는 농민들에 대해 엄격한 규정을 뒀다. 중간 유통상인의 입점을 원천적으로 제한하고자 반드시 생산자와 판매자가 동일인 이도록 했으며,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해 농민과 소비자 모두 만족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이런 까닭에 지난해 11월 11일 진주에서 개장식을 할 당시 50명이던 입점 농민이 불과 두 달여 만에 전국에서 145명이 입점을 신청했으며, 현재 95개 농가가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강 사장이 입점 농민들로부터 10%의 수수료를 받아 운영비 등으로 사용하는데 경비를 제외하면 수익이 2%에 불과해 아직은 적자다. 하지만, 그는 농민들이 잘사는 미래를 위해 적자를 감수하고 있다.

"나 혼자만 농사 잘 짓는다고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파프리카만 하더라도 이미 중국에서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 시설에서 재배하는 곳이 많습니다. 수출시장도 안심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상황에서 정직한 농민들이 잘사는 방법을 고민하다 '좋아요 농부들'이란 쇼핑몰을 만들게 된 것이죠. 하지만, 여느 쇼핑몰처럼 똑같은 방법으로 운영한다면 그저 하나의 쇼핑몰에 불과할 겁니다. 소비자들이 신뢰할 수 있는 좋은 먹을거리를 판매하는 쇼핑몰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입점 신청 농민에 대한 검증을 까다롭게 합니다."

강 사장의 이런 뚝심은 '좋아요 농부들' 소개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정직하지 않으면 이 세상 어디에서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신뢰받지 못하면 이 세상 어느 곳에도 발붙일 수 없습니다. 우리 농산물을 살려야 좋은 먹을거리, 안전한 농산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좋아요 농부들'은 자연의 명을 받아 생명을 소중히 하는 아름다운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다소 무모한 것만 같았던 강 사장의 파프리카 도전기. 그의 이야기를 듣고 농장을 나서면서 성공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과 성실함,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소비자들의 신뢰감이 만든 결정체였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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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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