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 5월 29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하와이 망명길에 오른다. 한 달 전인 4월 26일 오후 1시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한다고 발표했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종신대통령이 될 기반을 마련하고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하려던 그를 끝내 몰아낸 것은 4·19혁명이었다.

# 창원시 마산합포구 중앙동 마산의료원 입구 한쪽에 아담한 비석이 있다. 4·19혁명기념사업회가 혁명 50주년을 기념해 2011년 세운 '4·19 혁명의 진원지' 표지다. 비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960년 자유당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이곳에서 가장 치열하게 항쟁이 전개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의로운 마산시민의 투쟁정신은 곧 4·19혁명 승리의 시발점이 되었다."

◇질문 1.왜, 4·19혁명 진원지 표시가 마산의료원 앞에 있는 걸까.

4월 11일 이날 우연히 시내 내려오니깐 김주열 시체가 도립마산병원(현 마산의료원)에 있다길래 뛰어갔지. 뛰어가니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고 특히 제일여고 아이들이 참 잘했어. 글을 적어 놓은 게 "학도여 일어나자"라고 벽보를 붙여놨더라고. (하총치·당시 20세)

3·15민주묘지 동상에 빗방울이 눈물처럼 맺혀 있다. /경남도민일보 DB

이튿날 4월 12일 학교에 가자, 학교 분위기로는 도저히 수업이 이루어질 수가 없었으며 전교생들의 감정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중략) 사태가 만만치 않음을 느끼고 또 김주열 군의 처참한 주검을 어떻게 그냥 보고 있겠는가 하는 분노와 정의감에 불타, 첫 수업을 마친 후 10시경 전체 대의원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많은 의견이 제안되었으나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김주열 군의 억울한 주검에 항의하여 시위에 나서자고 만장일치로 가결, 전교생 1500여 명을 운동장에 집결시켰습니다. (박문달·당시 19세·마산고 3학년)

제2차 마산의거는 3월 15일 사망한 김주열 시신이 4월 11일 오전 11시쯤 중앙부두에 처참한 모습으로 떠오른 것이 직접적인 요인이다. 제2차 마산의거는 제1차보다도 더 큰 규모로, 그것도 4월 11일부터 13일까지 사흘간이나 전개됨으로써 3·15선거의 부정과 이승만 정권의 폭력성과 독재가 다시 국내외에 크게 부각되었다. (서중석, 2010년)

4·19혁명은 3·15항쟁에서 시작되었으므로 결과적으로 보면 3·15항쟁이 있었기 때문에 4·19혁명이 있을 수 있었는데, 사실 3·15항쟁은 4·19혁명에 가려져 그 독자적 위치와 의미가 평가되고 있지 않은 현실이다. (강만길, 1999)

◇질문 2. 그렇다면, 1960년 3월 15일 마산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중성동 투표소에 오전 7시 10분에 도착하여 투표용지를 받아들고 기표소에 들어가니 과연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표를 하는데 절대 비밀이 보장되어 있어야 함에도 항간이나 지상보도 그대로 중간 기표소에 들어가면 양편 기표소에서 기표하는 것을 마음대로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강경술·당시 54세·민주당원)

3월 15일 민주당(마산시당)의 선거포기 선언으로 전 시내가 술렁거리자 나는 자신도 모르게 오동동 민주당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무슨 정치적 관심이나 부정선거에 대한 분노보다는 반공청년당 등 자유당 패거리가 하는 일들이 눈에 너무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그게 3·15 당일 오후 2시경이었다. (김기철·당시 17세)

시청 앞으로 와 하고 고함을 지르며 갔는데 조금 있으니까 막 총알이 땅땅 날아오는 거예요. 옆 사람들이 쓰러지고 뒤에 사람도 쓰러지고 그랬어요. 그런데 순간 다리가 뜨끔하고 걸음 걷기가 불편하기 시작했어요. 다리를 만져보니까 뭔가 축축하더라고. 손에 보니까 피가 있더라고. (문동근·당시 17세)

차츰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팔과 다리는 무지낭창으로 타격을 받았으며 관절에 통증이 심해 움직일 수 없었다. (중략) 간신히 일어났다. 몸뚱이는 피에 젖어 온몸이 적적했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나는 그만 천지가 공노할 참사를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다름 아니라 오른쪽 옆에는 친구 용실 군의 시체와 왼쪽에는 또 다른 내 나이 또래의 시체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기겁을 하여 밖으로 기어나갔다. 바로 시청 지하실이었던 것이다. (김무신·당시 18세·마산고 2학년)

◇질문 3. 3·15마산의거는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3·15항쟁 역시 수많은 마산시민에게 피의 상처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4·19혁명으로 연결되어 대규모 항쟁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부당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직적이라기보다 즉흥적 성격이 강했던 3·15항쟁이 갖는 힘은 바로 이 점에서 정당하게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전례에 따라 북측과 연결된 사건으로 조작하여 진압하려 했지만 정권이 갖는 반역사성과 비민주성이 워낙 깊어서 즉흥적으로 출발한 항쟁 자체를 진압할 수 없었고, 오히려 확대되면서 4·19혁명으로 연결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승만 정권은 우리 역사상 민중항쟁으로 무너진 최초의 정권이 되었다. (강만길, 1999)

8·15 이후 현대사에서 민중항쟁으로 정권이 붕괴한 경우는 3번 있었다.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직접적인 계기인 4·19혁명과 박정희 정권 붕괴의 간접적 계기인 부마항쟁, 그리고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린 1987년 민주화운동이 그것이다. 마산의 민중항쟁이 그 두 차례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남북한 분단 정권 수립 이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10년 동안 강하게 경직되었던 우리 사회에 민주화운동으로서의 민중항쟁의 효시가 된 역사적 사건이 바로 마산의 3·15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1960, 70년대를 거치면서 민중항쟁은 주기적으로 계속되었고, 그것은 유신독재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운동으로 정착되었다. (강만길, 1999)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3월 9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3·15의거를 국가기념일로 정하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일부 개정령안'을 의결하고, 3월 12일에 공포하였다.> ※ 참고자료 <3·15의거 학술논문총서>, <3·15의거증언록, 우리는 이렇게 싸웠다>(3·15의거기념사업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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