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인비도 감탄한 이븐 할둔…이슬람이 있었기에 유럽 근대 문명 가능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한 조롱이 엄청난 유혈테러를 유발하고, 뒤이어 이를 둘러싼 논란으로 전 세계가 뜨겁다. 테러 표적이 된 프랑스 잡지 <샤를리 엡도>는 '표현의 자유'에 충실했다는 입장이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적했듯 타 종교에 대한 공개적인 조롱이 옳은 지에 대해서는 반론이 많다. 

사실 이번 사태 밑바닥에는 유럽이 이슬람을 바라보는 경멸적인 시선이 깔려있다. 미개하고, 완고하고, 뒤떨어진 문명이라는 시각이 그것이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종종 드러내는 극단적인 행동은 상당 부분 이런 인식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이슬람 문명을 이런 식으로 싸잡아 비난하는 건 이슬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처사다.  미국 비교역사학자인 데이비드 루이스는 <신의 용광로>라는 저서에서 "8세기 초 아랍인들은 권력, 종교, 문화, 재화 등 각 부문에서 놀라운 혁명을 이뤘다"며 "근대 유럽은 당시 무슬림이 정복했던 알-안달루스(스페인)에서 공존했던 선진적인 이슬람 문명의 거대한 용광로에서 주조됐다"고 단언한다.

한마디로 이슬람 문명이 없었다면 지금 유럽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알-안달루스에서 주조된 이슬람 인문학을 대표하는 역사학자 이븐 할둔(1332~1406)을 보자. 그가 살았던 시기는 알-안달루스 전성기를 넘긴 때이지만, 그가 남긴 <역사서설(歷史序說 Muquadimah)>은  이슬람 문명이 지닌 저력을 잘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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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븐 할둔./위키피디아

이슬람권 강대국 흥망사쯤으로 불러도 될 듯한 이 책에서 그는 스페인, 마그레브(북아프리카 3국,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지역 왕조 역사를 심층 분석한 뒤 억압적인 정부가 공공부문이나 국가 파멸을 초래한다는, 선구적인 사회경제학적 분석을 내놓는다. 

"힘있는 자들이 인민들의 재물을 빼앗는 행위는 더 많이 벌고자 열심히 일하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꺾는다." "인민들은 일이 없으면 가난에 시달려 늘 실망만 안게 된다." "지배자들은 고정수입 만으로 모자라 새로운 세금을 고안하고, 온갖 재주를 부려 세수 증대를 추구한다!"

21세기 대한민국 현실에 대입시켜도 놀랍지 않다. 그는 또 국가가 흥기하고 몰락하는 원인을 독창적인 언어로 분석한다. 근검절약하고 앞장서서 일하며 연대하는 단체정신, 생활양식, 문명을 '아사비야(Asabya)'로 부르며, 아사비야가 작동하면 그 국가나 민족은 흥기하고 이것이 쇠퇴해 '움란-하다리'-사회미덕이 사라지고 게으르고 사치스런 풍조에 물드는 것-상태에 이르면 몰락한다고 진단한다. 아사비야는 이후 역사학계에서 가장 '분석적이면서도 포괄적인' 조어(造語)중 하나로 각광받는다. 현대 사학자들이 이 개념을 즐겨 사용하는 건 불문가지.

북아프리카 튀니스 출신인 이븐 할둔은 젊은 시절 역량을 인정받아 20세에 관직에 진출한다. 이후 스페인, 마그레브 지역 왕조에서 관리로 일하며 소용돌이치는 권력에 부대끼는 인생을 살았다. 그는 스페인, 마그레브 지역에 산재한 도시-튀니스, 페스, 그라나다 등-를 오가며 그곳에 건립된 도서관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이 과정에서 이슬람 문명이 완성한 방대한 인문지리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40세에 은퇴해 친구 집에서 집필에 몰두하던 이븐 할둔은 말년에 이집트 카이로로 거처를 옮겨 <역사서설>을 출간한다. <역사서설>은 이슬람 문명이 쇠락하면서 잊혀졌으나, 19세기 유럽인들이 이슬람 문헌에 경탄하면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븐 할둔은 자립을 모색하던 1950년대 이슬람 지식인들에게 특히 사랑받았다. 그들은 이븐 할둔을 '쓰라림 속에서도 운명론 속으로 도피하지 않은 정치가' '비합리적 세상에서 합리주의를 살려 관찰과 조사에 헌신한 대학자' '진부한 말 대신 아사비야, 움란처럼 명료한 역사사회 언어를 개척한 선구자'로 받들었다. 

역사학계 거장이었던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서설>에 대해 "독자적인 역사철학을 구상하고 형상화했는데, 그것은 이제껏 어느 곳, 어느 때, 어느 누구에 의해 논의된 것보다 위대한 작업"이라고 평가했다. <川邊小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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