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고 정직하게 변화와 타이밍을 즐겨라

지난해 <피플파워> 의료인 분야 취재를 진행하며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우리 사회 노령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주변에는 많은 요양병원이 개원하고 있다. 초창기 요양병원에 대한 인식은 현대판 '고려장'이 벌어지는 곳이라는 선입견도 존재했다. 그러나 고령화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지금, 요양병원은 없어선 안 될 의료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런 중요한 의료기관의 수장을 만나 경영 철학과 운영 방침을 알아보는 것이 의료인 취재를 담당하는 기자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격월이라도 주변 요양병원을 탐방하고자 한다. 2015년 첫 번째 방문지로 1월 10일 개원 10주년을 맞이한 '정다운 요양병원' 찾았다.

20년 된 소파와 버리지 못하는 감사패

새해 첫 비가 내리던 날, 우산을 접고 정다운요양병원 현관문을 열었다. 벽면에 붙여진 250여 명 병원 전 직원 얼굴 사진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1층 로비 실내 분수에서는 작은 물레방아가 돌고 망개떡 플라스틱 통에서는 누군가에게 전달될 요구르트가 줄줄이 대열을 갖추고 있다. 환자를 맞이하는 접수창구가 고급 휴게실처럼 꾸며져 있다.

"아이고 바쁘실 텐데 뭐 이런 곳까지 찾아오십니까?"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인물이 인사를 던진다.

"카메라 가방을 보니 어제 전화 주신 박 기자님이시죠. 제가 김길화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제 방은 병원 뒤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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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도 제대로 못 나누고 그의 뒤를 따랐다. 1층 로비를 나와 병원 건물 뒤로 돌아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간이 철계단을 밟고 올라가자 조립식으로 만들어진 기다란 사무실이 나왔다. 그는 실내등 스위치를 올리며 안으로 안내한다. 간이 책상과 의자, 그리고 10여 개의 낡은 소파가 첫눈에 들어온다. 한쪽 벽면 전체는 감사패, 위촉장, 상장으로 가득했고, 진열하지 못한 상장과 패들이 바닥에 널려 있는 사무실 모습이었다.

"사무실이 좀 누추합니다. 그래도 저 혼자 쓰는 공간치고는 과분하죠."

화사했던 병원 1층 로비 분위기와는 180도 바뀐 이사장 집무실 환경이다. 김 이사장에게 정식으로 명함을 건네고 인사를 나눴다.

"사실 인터뷰 할 내용이 없을 텐데. 제 인생이 성공한 것도 아니고 인품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난감하네요. 제가 마산과 인연을 맺은 지 올해로 43년째 되는데, 지금까지 제 삶에 남은 것은 지금 앉아계신 소파와 저 상장과 상패들입니다. 이 소파는 제가 직업훈련원을 하면서 사용하던 것이데 버리기 아까워서 고쳐 사용하는데 20년을 함께 했네요. 그리고 저 상장과 감사패가 이곳 마산에 정착하고 살면서 얻은 소중한 재산이고 유산입니다. 결국 돈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말이 저기 감사패에 다 있습니다."

비료공장 사원에서 전화교환원

김길화(65) 정다운요양병원 이사장은 1950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한국전쟁 통에 출생신고를 2년 미뤘고, 두 살 어리게 신고된 김 이사장 호적 나이는 사업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공직에 몸담았던 그의 아버지 때문에 김 이사장은 경주와 울산을 오가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의 학창시절은 복잡했다. 중학교를 1년 늦게 입학했고 경주고등학교 1년을 마치고 다시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울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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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중앙정보부장인 이후락 씨가 울산에 학성고를 설립했는데 학교에 입학만 하면 교복부터 구두, 책가방까지 다 제공했어요. 69년에 입학해서 1회 학성고 졸업생이 되었죠. 기나긴 학창시절이었죠"

그는 1972년 군에 입대해 창원 39사단에서 통신병으로 근무하며 마산과 첫 인연을 맺었다. 그는 군 제대 후 울산 비료공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 생활을 했다.

"비료공장에 포대 만드는 곳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죠. 당시 재봉으로 비료 담는 포대를 만들었는데 재봉에 줄이 자주 끊어지는 거에요. 생산성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개선할 요량으로 부산 광복동까지 가서 꼭 맞는 재봉 줄을 구해와서 사용했죠. 포대도 잘 만들어 내는데 직장 동료들이 싫어하는 거에요. 재봉 줄이 끊어져야 휴식도 하고 좋다는 거였죠. 그날로 직장을 그만두었죠. 내 진심을 알아주는 것은 내 사업이다. 그래서 창업을 결심했죠."

그가 창업을 결심하며 떠올린 것은 마산과 전화교환수였다. 당시 마산은 전국 7대 도시 위용을 자랑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설치된 외국인전용 공단 마산수출자유지역과 한일합섬에는 전국에서 몰려 온 소녀 직장인으로 가득했다. 그곳에 사업 아이템이 있었다. 목표를 세우면 바로 실천하는 그는 전화교환기능사 2급 자격증 취득을 위해 서울에 있는 중부통신학원에 등록했다. 그는 유일한 청일점으로 전화교환 기능사학원을 다녔다. 똑같은 강의를 하루에 4번씩 들으며 3개월 속성 과정을 마치고 학원 개설을 위한 자격증을 취득했다.

"예전에는 전화가 오면 구내전화는 일일이 사람이 연결해 주었죠. 당시 그 일을 하는 전화교환원 직업이 괜찮았습니다. 규모가 있는 기업체뿐만 아니라 여관 신축 허가에도 통신분야에 전화교환원이 없으면 안 되었죠. 이거다 싶었죠. 자격증을 따게 해주는 학원 사업을 하자고 결심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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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사기 밀고 포스터 붙이고 강의하고

1975년 마산 창동 불종로 주택은행 2층에 '마산전화교환학원'이란 상호로 그의 첫 학원이 탄생했다. 경리 한 명과 함께 시작한 교육사업은 그를 슈퍼맨으로 만들었다. 매일 아침 마산수출자유지역으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을 상대로 학원 소개 전단을 뿌리고 낮과 밤으로 강의했다. 수업을 마친 저녁 늦은 시간에서 새벽까지 김 이사장은 자전거를 타고 학원 포스터를 붙이러 다녔다. 그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은 곧 진가를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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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화교환기능사 속성 3개월 과정 수강료가 6000원으로 기억하는데, 학원생이 많았습니다. 불과 1년 만에 학원을 확장해서 오동동 아케이드 2층으로 옮겼지요. 전화교환 과목에 유선통신과 무선통신 과목을 추가해서 학원 상호도 '마산통신학원'으로 바꿨지요. 당시 마산수출자유지역에 근무하는 소녀 직장인들은 중졸이 많았어요. 그분들이 낮에는 근무하고 밤에는 자격증을 따기 위해 우리 학원에 온 거죠. 정말 많이 왔죠. 당시 마산전화국이 있었고 이후에 창원전화국이 생겼는데 이 두 군데 전화국에 근무하는 전화교환원 90%는 우리 학원 출신 저의 제자들이었죠."

젊은 나이에 학원 사업에 뛰어든 김 이사장, 그의 학원 운영, 아니 경영 감각은 특별했다. 당시에는 낯설었던 강사실명제를 시행했다. 그는 초창기 혼자 강의할 때부터 반드시 명찰을 달고 수업에 임했다. 자신이 누구이고 내 강의의 책임을 진다는 각오로 학원 수업을 진행한 것이다.

"당시 제가 너무 젊어 보여서 중후하게 보이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 오동동파출소 자리에 '아리랑 이발관'이 있었는데 월대(매월 지급)를 주고 머리를 올리는 드라이를 했습니다. 또 부림시장에 가면 만 원에 넥타이 10개를 주었는데 매일 바꿔가며 연출을 했죠. 훌륭한 강의는 수업을 받으러 오는 학원생들에게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몸가짐으로 임하느냐에 달려있죠."

김 이사장의 학원 변천사는 계속됐다. 그는 결혼 후 신혼여행을 가는 대신 그 돈으로 텔렉스(가입전신)를 두 대 샀다. 그리고 '마산텔렉스학원'이란 이름으로 세 번째 학원 변신을 한다. 학원의 변신 뒤에는 김 이사장의 끝없는 배움이 숨어 있었다.

"학원 수업 과목이 추가되면 제가 먼저 과목 자격증을 따야 했죠. 지역에는 가르쳐 주는 곳이 없어서 서울로 갔어요. 빨리 자격증을 따고 마산으로 복귀하려고 속성 과정으로 공부했습니다. 남들보다 한 발 빠르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 몸을 희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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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컴퓨터학원.' 1982년에는 경남 최초, 마산 최초 컴퓨터 학원이 탄생한다. 김 이사장 학원의 네 번째 변신이자 직업 교육으로 나가기 위한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직업 교육에서 요양병원까지

컴퓨터 학원으로 과목을 업그레이드하며 사세도 눈부시게 성장했다. 마산 양덕동 어린교 5거리 기업은행 건물 3, 4, 5층을 학원으로 임대했고 직원도 10여 명으로 늘렸다. 초등학생부터 학교 선생님 보수교육까지 컴퓨터 학원 교육 사업은 영역을 넓혀 갔다.

김 이사장에게 새로운 블루오션 시장이 나타난 것은 1993년, 그 해 직업교육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재단법인 '경남전산 인정 직업훈련원'을 설립했다. 정부로부터 위탁을 받아 성공적인 직장인을 만들기 위한 기술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전화교환원을 양성하는 학원을 시작한 지 18년 만에 전기, 전자, 통신, 용접, 미용, 도배 등 명실상부한 직업능력개발에 한 축을 담당한 것이다.

"임대 보증금도 날려보고 인보증으로 돈도 떼였지만 착하고 정직하게 살면 반드시 보상받는다고 믿었습니다. 아니 저 자신이 증명했습니다. 비록 많은 돈은 벌지는 못했지만 수많은 직장인을 배출했습니다. 지금 현재도 사회 곳곳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는 졸업생을 생각하면 흐뭇합니다. 이것이 바로 돈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말이죠."

직업 교육 훈련 사업이 해를 거듭하면서 그는 직업 교육 패러다임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IMF 금융위기 사태를 겪고 심각한 취업난을 보며 교육제도의 불합리한 점들을 느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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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대학 아니 4년제 대학을 마치고도 다시 직업 훈련 교육을 받으러 오는 학생이 부지기수입니다. 저야 수강신청을 받아 가르치면 되지만 우리나라 교육제도가 낭비적이고 소모적이라고 느낀 거죠. 당시 직업 교육 토론회에 나가면 독일처럼 직업교육, 학문교육을 5:5 정도로 나누어 시키면 사회적응도 빠르고 효율적이라고 주장했죠. 그때가 벌써 15년 전이네요."

그는 직업 교육 분야에서 앞으로의 생존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새로운 사업 아이템은 운명처럼 찾아왔다. 그의 친척이 요양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그걸 보고 의사가 아니어도 경영을 할 수 있는 병원에서 해답을 찾았다. 바로 요양병원. 김 이사장은 재단 설립 10년 만에 경남직업전문학교를 양도하고 1년 간 전국의 요양병원에 벤치마킹을 떠난다. 마침내 2005년 1월 10일 고령화 시대 블루오션 '정다운요양병원'이 첫 진료를 시작한다. 변화와 타이밍을 즐기는 김길화 이사장의 여섯 번째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입원실 벽지에서 화장실 소품까지

개원 10주년을 맞이한 '정다운요양병원'. 양·한방을 아울러 의사 10명과 간호사·간호인·사회복지사 등 240여 명 구성원은 지하 1층부터 지상 7층까지 입원실 48개에 350병상 시설을 하나가 되어 가꾸고 지킨다. 평균 병실 가동률이 90%. 320여 명의 환자를 240여 명의 스태프가 돌보고 있는 것이다. 정다운요양병원은 활기로 가득 차 있다. 병원 이사장에게 스스럼없이 어깨동무하는 병원 스태프들, 환경 미화를 담당하는 청소부 아주머니께 여사님이라 호칭하며 손 잡아주는 병원장, 재단 이사장은 1층 로비에서 요구르트를 내원 고객에게 서비스한다. 고령화 시대를 담당하는 요양병원이지만 활기찬 모습은 소아·청소년과병동을 연상시킨다.

"박 기자님, 맛있는 우리 병원 밥 좀 자랑할게요. 환자도 스태프도 만족도 1000%인 병원밥은 흔치 않습니다. 참 식사 전에 손 씻으러 화장실에 가 보시면 우리 병원 참모습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말 나온 김에 식사하러 갑시다."

화장실은 화장하는 '파우더룸'을 떠올리게 했다. 깔끔하고 냄새도 없고 컴퓨터가 있어 누구나 온라인과 소통할 수 있도록 시설을 꾸몄다. 입원실 벽지도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방방이 벽지가 달라 새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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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측면에서도 정다운요양병원은 특이한 시스템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재단 이사장은 결재를 하지 않은다. 각 부서장의 결재가 김 이사장 결재 칸을 대신한다. 병원 경영은 구성원 모두가 함께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임금 인상도 부서장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정한다. 매년 병원 송년회 모임에선 직원들이 뽑은 우수 직원에게 재단이 자동차를 한 대씩 선물한다. 또 미혼 구성원을 위해 기숙사를 마련해 운영 중이다.

정다운요양병원 문화도 독특하다. 올해로 10회를 맞이하는 정다운그림그리기 대회 수상작들로 병원 복도는 갤러리를 방불케 한다. 또 병원에는 김 이사장이 받은 감사패에 응답이라도 하듯 자발적인 봉사단체 방문이 줄을 있는다. 목욕 봉사, 빨래 봉사 등 사진으로 남긴 봉사 기록도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다.

"매년 신년회에 행운의 2달을 봉투에 넣어 친필로 행운 소식을 적어 직원들에게 나누어 줄 때 뿌듯합니다. 또 직원 생일이나 기념일에 친필로 편지를 적어 보내지요 정말 작은 일이지만 구성원들이 좋아합니다. 행복은 물질이 아닌, 진정성 있는 작은 관심과 정성으로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습니다."

'Stand by me', '있을 때 잘해' 그리고 '아너소사이어티'

김 이사장은 '정다운표' 점심 후 병실을 돌았다. 각층 별로 있는 간호부장이 동행하며 환자들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고객상담실로 향해 차 한잔을 나누며 미래를 이야기했다.

"제가 사업에서는 실패해 본 것이 없습니다. 돌이켜 보면 확실한 '을'로 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예전에 학연, 지연 때문에 설움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경주 출신이지만 본적은 경남 마산시 산호동 463번지입니다. 이제는 마산이 제 고향입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도 사업을 병행하면서 마쳤습니다. 몇 배로 힘들었습니다. 명색이 제가 병원 재단 이사장인데 저의 학벌 때문에 우리 병원 의사, 간호사 구성원들이 어디 나가 기죽지 말라고 제가 박사까지 공부했습니다."

김 이사장은 2012년 경남대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나이 62세 되던 때였다.

그의 남보다 한 발 빠른 도전은 계속된다. 2015년 그는 새로운 거사를 계획하고 있다. 요양병원보다 한 걸음 더 나간 '실버타운 메디컬' 사업을 구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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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병실 돌면서 할머니의 '마음이 아프다'는 말 들으셨죠. 가족이 면회를 안 오면 아픈 거예요. 한 달에 십여 분 정도 운명하시죠. 10년 병원을 운영했으니까 1200명 정도 장례식을 치렀지요. 그중에 어느 한 분도 돈 가지고 저 세상으로 가시는 것을 못 봤습니다. 요양병원 운영하며 느낀 것이, 아니 우리가 느껴야 할 것은 'Stand by me(네 곁에 있어주고)', '있을 때 잘해' 라는 것, 두 개 다 노래 제목입니다. 결국 돈보다는 사람이라는 것을 운명처럼 느낍니다."

김 이사장은 사업적 영역을 떠나 인생의 마지막 실천과제는 1억 원 이상 기부하는 개인에게 자격을 주는 '아너소사이어티'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고액 기부자 클럽에 가입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온 몸으로 하루를 맞이한다고 했다. 4시간의 인터뷰를 마치자 그를 만날 때 내리던 비가 그치고 하늘은 맑게 개여 있었다. 병원 현관까지 그가 배웅을 해 준다.

"박 기자님 올해는 우리 모두 잘 될 겁니다. 저도 '을'로 평생을 살았는데 작년에는 갑오년이라 '갑'질을 했지만 올해는 을미년이라 '을'들에게 희망이 있을 겁니다. 화이팅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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