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 경남-경남에서 만나는 이순신] 경남 곳곳의 이순신 흔적…3년 7개월 통영에 주둔, 사천·거제·남해 오가며, 뭍에는 '백의종군로'도

'한려수도'는 통영 한산도에서부터 고성~사천~남해~여수에 이르는 남해 연안 물길이다. 그리고 이순신 흔적이기도 하다.

통영은 이순신을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고장이다. 이름부터 그 숨결이 담겨 있다. 이전 지명인 충무는 '충무공(忠武公)'에서, 현재 통영은 이순신이 최초 삼도수군통제사로 있었던 '통제영(統制營)'에서 따왔다.

통영 강구안에 가면 이순신에 푹 빠진 남자 박정욱(56) 문화해설사를 만날 수 있다. 그는 '인간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순신이 태어난 곳이 지금 서울 인현동 쪽이죠. 원균·류성룡이 함께 사는 곳이었다니 좀 사는 동네였겠죠. 하지만 할아버지가 기묘사화(己卯士禍·1519)에 연루되면서 아버지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으니 형편도 어려웠겠죠. 그러니 잘살던 동네에서 버티기 힘들어 외갓집 있는 충남 아산으로 간 거죠. 어린 마음에 상처가 얼마나 컸겠어요. 이후 21살에 결혼해 처가살이하고, 23살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이미 성장기 지난 나이라 뻣뻣한 몸이었으니 쉽지 않았을 겁니다. 시험을 치다 말에서 떨어진 것도 그런 부분이 있었지 않았겠어요. 4수 끝에 무과 시험에 합격합니다. 그때 나이가 이미 32살입니다. 지금도 이르지 않은 이 나이에 말단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거죠. 그것도 합격 후 10개월 후에나 함경도 변방에 발령받습니다. 10~20대 마음고생 하다 30대 들어서야 늦은 기회를 얻은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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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간을 보낸 이순신은 40대 후반에 인생의 절정기를 보낸다. 3년 7개월(1593~1597)간 삼도수군통제사로 있던 통영 한산도에서다. 군사를 직접 뽑고 훈련했으며, 이에 필요한 돈·식량도 스스로 해결했다. 백성들은 안전한 이순신 품으로 모여들었다. 그가 꿈꾸던 '수국'이 이곳 한산도에서 펼쳐졌다.

오늘날 통영항에서 뱃길로 25분이면 한산도에 도착한다. 작전지휘소 격인 '제승당'보다 '수루'에 사람들이 더 몰린다. 달 밝은 밤 아닐지라도 한산도가(閑山島歌)를 읊으며 400년 전 인간 이순신을 느끼기 위함일 것이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 장군이 눈 감은 직후에도 통영 사람들은 마음을 잊지 않았다. 1599년 백성들이 직접 나서 그를 기리는 작은 초가집을 만들었다. 이곳은 300여 년 지난 1877년에야 사당으로 모양새를 갖췄다. 오늘날 통영 당동에 자리한 '착량묘(鑿梁廟)'다. 지금 착량묘 바로 아래에는 동양 최초 '해저터널(1932)'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또한 이순신과 엮인다. 한산대첩(1592) 당시 목숨 잃은 왜적 시체가 한산 앞바다에 말도 못했다고 한다. 썰물 때 땅이 드러나면 그들이 묻힌 땅을 걸어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자신들 조상이 묻힌 곳에 조선인들 발길이 오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해저터널을 만들었다고 한다.

통영 명정동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사당인 '충렬사'가 있고, 강구안에는 거북선이 늘 정박해 있으며, 정량동에는 아예 이름까지 딴 '이순신 공원'이 있다. 이러한 여러 흔적에 어떤 이들은 '또 다른 통영 매력이 감춰지는 면이 있다'며 아쉬워하기도 한다.

이웃 고성에는 '당항포 관광지'가 있다. 이제는 고성공룡세계엑스포 주행사장이 퍼뜩 떠올려진다. 그래도 당항포해전이 먼저겠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 시절인 1592년 왜선 26척, 삼도수군통제사이던 1594년 왜선 31척을 당항포에서 격파했다. 현재 이곳에는 사당·전승기념관이 있다. 위패·영정을 모신 '송충사'에서는 당항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눈을 시리게 만드는 이 맑은 바다를 핏빛으로 물들여야했을 이순신 모습이 그려진다.

사천은 이순신보다 거북선과 더 엮여 있다. 사천해전(1592)은 '이순신이 거북선을 앞세운 최초 전투'라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사천 대방동에는 고려시대 만들어진 대방진굴항이 있다. 바깥에서 안쪽이 보이지 않는 독특한 구조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이곳에 숨겨두고, 배에 어패류가 달라붙지 않도록 민물로 채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 규모에서 그 거대한 거북선이 이 항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지 의아한데, 1820년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바뀌었다고 한다.

사천 용현면에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쌓은 '선진리왜성'이 있는데, 여기에 '이충무공 사천해전 승첩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거제에는 이순신 첫 승전지 의미를 담은 '옥포대첩(1592) 기념공원'이 있다. 거제시 하청면에 있는 '칠천량해전(1597) 공원'은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유일한 패배 기록을 담고 있다. 아픈 역사를 담은 곳이기도 하지만, 원균이 조선 수군을 이끌다 패한 것이기에, 새삼 이순신 빈자리가 얼마나 컸는지를 느낄 수 있기도 하다.

이제 이순신이 눈 감은 곳으로 시선을 향해야겠다. 남해 고현면에 있는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戰歿遺墟)'는 또 다른 이름이 '이락사(李落祠)'다. 이곳에는 '대성운해(大星隕海·큰 별이 바다에 잠겼다)'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 현판이 있다. 이곳 '첨망대'에서는 이순신이 떠난 노량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다. 이순신이 순국한 노량바다를 두고 남해와 옆 동네 하동은 신경전을 펼치기도 한다.

남해 설철면에는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 '남해 충렬사'가 있는데, 통영에 있는 곳과 구분하기 위해 충렬사 앞에 '남해'를 덧붙였다고 한다.

바다 아닌 곳에서는 백의종군로가 하동·산청·합천 등에 걸쳐 있으니, 가히 경남에서는 어디를 가도 이순신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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