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일존(朱子一尊)'에 항거했던 선비 윤휴(尹鑴)

1876년 일본을 방문한 제 1차 수신사 김기수는 <일동기유(日東記游)>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책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접대를 맡았던 일본인 구키 류이치가 "귀국의 학문은 오로지 주자(朱子)만을 숭상합니까? 아니면 그밖에 숭상하는 다른 것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김기수는 "우리나라 학문은 500년 동안 오로지 주자만 알 뿐입니다. 주자를 배반하는 자는 즉시 난적으로 처단합니다. 과거에 응시하는 문자에도 부처나 노자의 말을 쓰는 자는 용서하지 않습니다!"고 답했다.

이른바 '주자일존(朱子一尊)'이다. 주자만이 유학을 설명할 권능을 지녔다는 '무시무시한' 답변이다. 그렇다면 조선 학자들은 모두 이런 방침을 수긍하고 따랐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많지는 않지만 주자일존에 반기를 든 학자는 제법 있다. 조선후기 문신 윤휴(尹 1617~1680)는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경전의 오묘한 뜻을 주자만 알고 어찌 우리들은 모른단 말이냐"고 부르짖었다. 정주학, 또는 주자학으로 불리는 성리학이 유교해석을 독점하고 있던 시절 이 말은 큰 반향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주자학을 옹위하던 노론 영수 송시열(宋時烈)은 이 말에 놀라 윤휴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효종실록(孝宗實錄)>에는 다음과 같은 평이 전해진다. "윤휴는 소싯적부터 글을 읽어 이름이 있었는데, 논변(論辯)이 있을 때면 반드시 자기 견해를 옳게 여겼다. 그리고 그의 학문은 대부분 정자(程子)와 주자의 견해에 배치됐다. 그 무리들이 이를 서로 받들어 칭찬했으므로 식자들이 우려했다."

송시열을 따르는 사관(史官)들이 쓴 글이다. 윤휴를 배척하는 기세가 역력하게 느껴진다. 윤휴는 가계(家系) 자체가 정통 성리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래서 지배세력과는 다른 관점을 형성할 수 있었다. 독서나 강의에서 기존 주해(註解)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언론과 식견이 남달리 뛰어나 그와 교유한 송시열도 처음에는 "윤휴는 학문이 높아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없으며, 선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이치를 발견해냈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런 관계는 윤휴가 유교 경전 중 하나인 중용(中庸) 주석을 기존 학설과 다르게 달면서 적대적으로 변한다. 송시열은 이 소식이 전해지자 윤휴를 찾아가 '감히 성인인 주자를 업신여긴다'며 강하게 책망한다. 이 때 나온 답변이 '경전의 오묘한 뜻을 주자만 알고 어찌 우리들은 모른단 말이냐'다. 그는 주자의 해석을 통하지 않고도 공자 사상이나, 유교 이상에 다가설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는 병자호란 직후였다. 충격적인 패배와 굴욕 때문에 사회 시스템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들은 이 때 주자학 유일사상 체계를 강화하는 복고노선을 지향했다. 흔들리는 지배층 이익을 공고히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에 따라 성리학 핵심도 행동규범에 불과한 예학(禮學)으로 옮겨갔다. 피지배 민중들이 이런 사상 공세 속에서 시스템을 바꿀 동력을 얻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윤휴는 사상적으로는 주자일존에 반대하면서, 현실적으로는 병자호란 주범인 '청나라를 정벌하는' 북벌(北伐)에 집중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모순을 드러낸 사회체제를 새롭게 정비해야했다.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집단이 윤휴를 배척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결국 사문난적(斯文亂賊 유교 정통을 어지럽히는 도적)으로 몰려 유배지에서 사사(賜死) 당하고 만다. 

재일 사학자 강재언은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의 몰락은 주자학, 특히 현실과 동떨어진 성리학에 치중하면서 실학 성격의 모든 학문을 배척한 '주자일존'에 큰 원인이 있다." 윤휴는 그같은 병폐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여실히 입증하는 역사적 증인이다. 

<川邊小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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