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체육,'배희욱호' 닻을 올리다

지난해 10월 제주에서 열린 제95회 전국체전에서 경남은 경기도, 서울에 이어 종합 3위를 차지하며 당당히 시상대에 올랐다. 전국체전에서 거대공룡을 손꼽히는 경기, 서울에 이어 3위에 오른 것은 실질적인 1위라며 한껏 고무된 분위기였다.

거의 모든 포커스는 권영민 상근부회장에 집중됐다. 14년 연속 전국체전 상위권을 최전선에서 지휘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렇지만 선수단 총감독인 배희욱 사무처장의 공도 빼놓을 수 없었다. 인터뷰를 요청할 때마다 그는 '주연을 인터뷰해야지. 조연은 뒤에서 조용히 있는 게 편하다'며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권 부회장이 위기를 정면 돌파하는 '용장(勇將)' 스타일이었다면, 배 처장은 이해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덕장(德將)'에 비유된다.

서로 다른 스타일의 두 사람은 지난해부터 '투톱 체제'를 형성하며 경남 체육을 정상의 반열에 올려놨다.

하지만, 지난달 권영민 상근부회장이 퇴임하면서 경남체육 수장의 자리는 배희욱 사무처장에게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예상했던 선임이라 놀라움보다는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조연에서 주연으로 우뚝 선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했다. 경남체육의 새로운 선장이 된 경상남도체육회 배희욱(58) 사무처장을 만났다.

마산상고-경남대, 씨름의 엘리트 코스 밟다

"작정하고 온 것 같은데 살살 좀 해주세요."

10년 가까이 기자와 알고 지내면서도 진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경험이 적었던 탓인지 그는 적잖이 긴장한 듯 보였다. 사진부터 촬영했는데 멋쩍은 듯 머뭇거리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색함부터 떨쳐야겠다는 생각에 편히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부터 골랐다.

배희욱 처장은 언급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씨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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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희욱 경남도체육회 사무처장(오른쪽)./박일호 기자

풍채를 보면 알겠지만 그의 전공은 씨름이다.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와 경남대로 이어지는 씨름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울산대 씨름부 감독을 8년이나 맡았으니 핏속까지 씨름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원 소계동이 고향이라 창원초등학교를 다녔어요. 친구들끼리 모여 씨름을 즐겼는데 태어날 때부터 우량아 소릴 들을 만큼 체격이 컸고, 승부욕도 남달라 씨름을 곧잘 한다고 주위에 소문이 좀 났나 봐요.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체육 선생님의 추천으로 마산상고에 진학했습니다."

4남 중 장남이 운동한다고 했지만 집안의 큰 반대는 없었다.

그렇다고 요즘처럼 극성스러운 지원도 없었다. 그냥 아들 한 명 정도는 씨름판에서 키워도 되겠다 싶었던 게 당시 시대적 분위기였다고 배 처장은 회고했다.

솔직히 궁금했다.

그래서 씨름은 얼마나 잘했는지 물었다.

"씨름을 썩 잘한 것 같지는 않아요. 70년대 씨름에 관심이 많았던 분들도 제 이름을 기억하는 분이 거의 없거든요. 제 기억으로는 76년도에 열린 통일장사(당시 아마추어 대회 가운데 최대 규모)에서 8위를 한 게 있을 거에요. 체급을 가리지 않고 모든 선수들이 출전해 그야말로 왕중왕을 가리는 대회인데, 거기서 8강에 들었죠. 그 기록은 아직도 남아있을 것 같네요.(웃음)"

실제로 그가 얼마나 뛰어난 씨름 선수였느냐의 질문에는 물음표를 남겨야 할 것 같다.

당시 기록은 대부분 수기로 작성되어서 현재로선 찾을 방법이 없을뿐더러, 창원역 근처에 있던 집이 철거되면서 그의 입상 경력을 증명할 트로피와 상장 대부분이 분실됐다고 해명(?)했기 때문에.

김성률, 정근종, 황경수, 백승만, 천평실.

60·70년대 민속 씨름계를 주름잡았던 이들과 함께 배 처장은 씨름을 했다.

당시 마산씨름은 마산상고, 경남대, 일반부 선수들이 상고 씨름장에서 매일 같이 합동 훈련을 했다.

"요즘같이 지도자가 하나씩 기술을 가르쳐주지는 않았어요. 그냥 체급이 비슷한 선배가 샅바를 잡아주면 거기서 배우는 거에요. 저도 김성률 선배나 정근종 선배한테 많이 배웠죠, 요즘은 이런 걸 연계육성이라 하죠. 중학생 선수부터 일반부 선수까지 한 곳에서 운동하다 보니 마산씨름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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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희욱 경남도체육회 사무처장./박일호 기자

선수에서 교사로, 다시 감독으로

1979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는 갈림길에 섰다.

선수 생활을 계속 하느냐, 아니면 직업인의 길을 갈 것인지 고민의 고민을 거듭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월급을 받으며 씨름을 할 수 있는 실업팀은 부산에 연고를 둔 '부산공동어시장'과 인천의 '인천상공회의소' 2곳뿐이었다.

그는 지역적으로 가까운 부산공동어시장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싶어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씨름의 꿈을 잠시 접고 그는 체육교육학과에서 받은 교사자격증으로 체육교사가 됐다.

당시에는 신규 교사 수가 적어 누구나 원하면 쉽게 학교에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창원남고등학교 체육교사로 발령받는 그는 6년간 교직생활을 했다.

교사로 근무하며 평생의 든든한 배필도 만났다.

그의 부임 첫해이던 1979년 8월 강한 폭우를 동반한 태풍 '주디'가 경남을 강타했다. 당시 진해여좌검문소 일대에 도로가 유실되고 통신이 두절 되는 등 혼잡한 상태가 계속됐다.

학생들이 태풍 복구사업에 투입됐고 그는 인솔자로 현장을 찾았다. 당시 보건소에서는 혹시 모를 학생들의 안전 고를 위해 파견을 나왔는데 그의 학교 선배가 나와있었던 것.

그 선배는 함께 나온 보건소 후배를 소개했고, 결국 둘은 결혼까지 골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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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희욱 경남도체육회 사무처장./박일호 기자

순탄하게 흘러가던 교사 배희욱의 인생은 또 한 번 전환점을 맞는다.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주말이나 쉬는 날이면 씨름장을 찾아 선후배들과 씨름을 하던 그에게 황경수 감독이 솔깃한 제안을 했다.

당시 민속씨름의 최대어였던 이만기(경남대)에게 현대는 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최고 계약금인 2억 원을 안기며 영입에 성공했고, 황경수 감독이 현대 씨름단 감독으로 내정됐다.

황 감독은 배 처장에게 "현대에서 함께 운동할 수 있는 대학팀을 창단할 예정인데, 울산대 초대 감독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고, 가슴 한 곳에 씨름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던 그는 교사직을 그만두고 울산행을 택했다.

"결혼도 했고 자식도 있는 처지여서 고민할 법도 했는데, 당시에는 별 다른 고민 없이 선배가 시키는 대로 과감히 사표를 썼죠. 지금 생각해도 간 큰 남자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는 1985년부터 1993년까지 8년간 울산대 감독을 재직하며 숱한 스타 플레이어를 키워냈다.

백두장사를 지낸 남동하(한림대 감독), 천하장사 출신의 신봉민(전 현대삼호중공업 코끼리씨름단 코치) 등이 그의 제자다.

"당시 울산대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선수들이 씨름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완벽한 지원이 이뤄졌어요. 지금도 대학씨름의 강호로 군림하는 울산대 씨름부의 초석을 닦은 것 같아 내 프로필에 없어선 안 될 중요한 경력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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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희욱 경남도체육회 사무처장./박일호 기자

체육인에게 공감받는 사무처장 되고파

그는 1993년 4월 그토록 잘 나가던 대학 감독을 돌연 그만뒀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당시 대학선배로 알고 지내던 박소둘 전 도체육회 사무처장의 추천으로 도체육회에 직원으로 입사했다.

"8년간 가족과 떨어져 지내다 보니 그리움이 많았죠. 아들 둘이 커갈수록 엄마 혼자 힘만으로 키울 수 없다는 생각을 했고, 아버지가 필요한 시기가 판단해 가족 곁으로 돌아왔죠."

훈련과장으로 입사한 그는 운영부장 등 21년간 체육회 요직을 두루 거치며 지난해 4월 경남체육의 새로운 수장에 선임됐다.

체육회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면 당연히 사무처장직에 오르는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당연한 이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도체육회 예산은 100% 도에서 지원을 받기 때문에 정치적인 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경남은 예외지만 많은 시도에서 체육회 사무처장을 자치단체장 선거의 전리품으로 판단해 체육과 무관한 인사가 맡은 일도 잦다.

이런 현실을 잘 아는 배 처장은 경기인 출신으로 성적과 원만한 체육회 운영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함께 이루려 노력 중이다.

"항상 말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게 지론입니다. 체육회에서 지도자와 선수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지 못하면 성적도 곤두박질치게 되죠. 사무처장이 권위를 앞세우는 자리가 아니라 체육인과 소통하는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책임이 막중한 자리죠. 권영민 부회장과 박소둘 전 처장이 해 온 과업을 잘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전문 경기인 출신이기 때문에 더 잘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게 솔직한 마음이죠. 최선을 다한다면 잘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전문 체육인 출신 사무처장이라는 주위의 기대에도 그는 자신있다고 답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지도자와 경기단체 전무이사 등 대다수와 선·후배 관계로 얽혀 있죠. 선수 출신끼리 끈끈한 유대감도 있기에 잘 도와주리라 믿습니다. 사무처를 담당해야 하지만 현장도 특히 신경을 쓸 겁니다. 사무실보다는 현장에서 직접 선수와 지도자를 만나 현안을 듣고 같이 고민하는 사무처장이 되고 싶어요. (저에게) 가장 큰 장점은 현장 경험이라고 봐요. 울산대 씨름부 감독을 지내는 등 현장 경험도 있고, 20년 간 쌓아온 체육행정 노하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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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희욱 경남도체육회 사무처장./박일호 기자

경남 체육의 최고 수장에 올랐지만 그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의전용 차량은 업무용으로 돌리고 그는 손수 운전을 해 사무실로 출근한다. 점심도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직원들과 함께한다.

이날도 그의 단골식당에서 6000원짜리 가정식 백반을 먹었다.

"20년이 넘게 체육회 생활을 하는 데 직원들이며 지도자들이 제 스타일을 훤하게 알잖아요. 그런데 직책이 조금 높아졌다고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좀 우습잖아요. 제대하는 그날까지 아마 단골 식당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항상 점심 생각나면 그 식당에서 오시면 될 겁니다."

배희욱 처장에게 기대의 시선이 모이는 것은 그가 20년이 넘는 체육회 생활 내내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을 위해 그는 늘 생각했고 열정적으로 말했으며 함께 행동했다.

그리고 그 생각과 말, 행동이 일치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거대한 조직을 이끌고자 자신부터 다져왔던 체육인 배희욱. 새로운 출발선에서 도전하는 배희욱 감독과 그가 키를 쥔 경남체육의 미래를 상당히 밝게 점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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