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완성된다

도시 이야기를 창조하는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위대한 사람'을 기리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류 최초의 이야기라는 길가메시 서사시도 수메르의 도시국가 우르크의 왕을 지낸 길가메시에 관한 것이다. 도시공동체의 이야기를 만드는 데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방법은 현대 도시에서도 널리 애용되고 있다. 내 고향 창원도 예외가 아니다.

권위적 도시 스토리텔링, 최윤덕의 예

경남 창원시청 옆에는 최윤덕 장상의 기마상이 늠름하게 서있다. 좌대 높이 6미터에 동상 높이 6.5미터까지 합치면 12미터가 넘는다. 기마상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란다. 동상 세우는 예산만 8억원이 들었다. 

도시 심장부에 이 동상이 서기까지 대략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1992년 한 학술세미나를 시작으로 도심 공원에 신도비 건립, 관련 책자와 홍보 만화책 등을 발간하는가하면,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해 TV에 방영했다고 한다. 동상이 세워진 게 2010년 11월이니 18년 가까이 공을 들인 결과다.

그러나 창원시민 대다수에게 이 동상은 여전히 낯설고 생뚱맞다. 동상을 세운 창원시는 "600년 창원 역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창원이 낳은 위대한 인물의 재조명을 통해 후대에 귀감으로 삼도록 하고자" 했고, "동상 제작과정에서도 얼굴을 완성하자 동상이 갑자기 흔들리는 현상이 나타나 장상의 영험한 기운을 느꼈다"고 했지만(창원시 보도자료 참조), 창원 시민들이 21세기의 창원시에서 최윤덕이란 인물을 도시 정체성의 표상으로 기려야 할 이유를 찾기가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최윤덕 장상 이름을 내걸고 치러지고 있는 각종 행사들도 100만 도시의 상징 치고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성대하게 펼쳐지고 있다는 게 전국 궁도대회인데, 이 대회는 각 지역 궁도협회가 개최하는 대회와의 차이점을 찾기 어려운 그저 하나의 대회일 뿐이고, 2014년 4월에 열린 창원시 주최 '제1회 최윤덕장상배국제무술대회'는 '제151회 월드 K-1 킥복싱 무에타이 국제전 및 한국 타이틀매치 전초전'의 다른 이름이었다. 100만 인구 도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동상까지 세우며 최윤덕 이야기를 만들어냈지만, 정작 궁도협회와 격투단체에 이름 빌려주는 정도밖에는 구실을 못하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최윤덕 이야기는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생가터에 대한 논란에서부터 동상 건립 과정이 졸속이었다는 지적이 뒤를 이었다. 특히 국가 표준영정 지정절차를 밟지 않고 동상 건립을 주도했던 모 기관장의 아들이 임의로 그린 영정을 동상제작에 사용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600년을 이어온 도시 역사와 마산과 진해가 통합된 새로운 창원시의 정체성을 표상할 인물로 내세워졌지만, 졸지에 분란과 냉소의 아이콘으로 전락해버렸다.

겉으로 보이는 동상 설립 과정은 그리 나쁘지 않다. 도시 탄생 600년을 염두에 두고 18년 전부터 준비했고, 수많은 전문가들이 동원됐을 것이며, 또 그 인물을 시민들에게 홍보하기 위해 만화책, 다큐멘터리, 독후감 쓰기 대회 등 시민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시도들을 펼쳤다. 문제가 됐던 세부 사항들에 대해서는 시비를 다툴 여지가 있긴 하지만, 큰 틀에서 본 행정 절차는 무난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시민들은 최윤덕 이야기를 흔쾌히 자기 도시의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최윤덕 이야기를 주도한 입장에서 보면 북방 영토를 확장하고, 대마도 정벌에 앞장 섰던 조선 초기 장수로 동향인인 지역민의 자긍심과 호연지기를 키우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일 텐데, 왜 시민들은 마음 한 켠을 최윤덕에게 내주지 않는 걸까?

이 사례는 기존의 권위적인 도시 스토리텔링의 전형을 보여준다. 인류가 도시를 만들었을 때부터 지속되어온, 도시를 장악한 지배 권력이 시민의 통합과 자기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창안한 이야기 전략 말이다. 이야기는 당연히 위에서 만들어 아래로 퍼트리게 된다. 도시가 추구하는 인간상, 정확하게는 도시의 권력이 선호하는 모델이 고안되고 확산된다.

인류 최초의 이야기라는 길가메시 서사시는 수메르의 우르크라는 도시국가의 왕에 대한 이야기다. 로물루스 신화는 천년을 지속한 로마의 시조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다. 단군신화는 평양을 근거지로 살아가던 원주민들을 지배하게 된 정복자 단군에 관한 이야기다. 세종이 편찬한 용비어천가는 고려 왕조를 뒤엎은 이씨 가문이 과연 그럴 만했다는 걸 당시 지배층과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고안됐다. 

현대 사회에서도 권위적인 스토리텔링은 지배 권력의 중요한 전략으로 활용된다. 1980년에 내란과 군사반란으로 전두환이 정권을 잡자 당시 방송과 언론은 일제히 전두환 스토리텔링을 쏟아냈다. "나보다 국가를 앞세운다"든지 "이해관계 얽매이지 않고 남에게 주기 좋아한다"든지 심지어 "단군 이래 성군"이라는 낯뜨거운 칭송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배 반대편의 이야기들

하지만 옛날이라고 해서 지배자의 이야기만 있었던 건 아니다. 로마는 기원전 510년에 이미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택했고, 그로부터 15년 뒤에는 평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호민관이란 공직을 만들었다. 기원전 2세기경에 호민관을 지낸 크라쿠스 형제는 농민과 빈민, 무산자들에게 땅을 나눠주는 혁명적인 토지개혁을 도모하다가 귀족들의 반발로 암살되기도 했다.

역사 속 그라쿠스 형제는 귀족들의 반발로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서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이들에게 깊은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라쿠스의 이야기는 근대가 열리며 마침내 꽃을 피웠다. 절대 왕정을 뒤엎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잉글랜드 왕정에 대항한 미국의 독립 혁명도 성공했다. 영국에서는 왕정을 없애는 대신 그 권한을 민의 힘으로 제한하는 입헌군주제를 도입했다.

산업혁명 이후 절대 왕정 대신 자본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배하는 자본은 광고와 판타지로 장미빛 미래를 이야기했지만, 지배를 받는 노동자들은 악순환 구조에 억압된 노동자의 해방을 이야기했다. 조합이 결성되고 시위가 일어나고, 또 상당수의 나라에선 혁명이 일어났다. 비슷한 시기에 인종과 성별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 대해서도 기존의 이야기(백인우월론, 남성우월론)를 뒤엎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이야기들이 확산되고 힘을 얻으면서 세상도 바뀌기 시작했다. 노예제도가 철폐됐고,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됐다. 

세대간에도 균열이 생겼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초유의 베이비붐 세대가 성장하면서 성인들과 같아지기를 거부하는 청년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특히 베트남 전쟁이 불거지면서 청년들은 새로운 세상을 이끌어갈 새로운 서사를 격렬하게 갈망했다. 유럽에서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68혁명이 일어났고, 미국에서는 히피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전쟁이 아닌 평화, 갈등이 아닌 사랑이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보편적으로 각인되었다. 

민주공화정이 세계적인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중앙집권에 대한 지방자치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특히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독재와 지방자치는 양립할 수 없는 가치로 엎치락뒤치락했다.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는 정부수립 직후인 1949년에 지방자치법을 제정하면서 시작됐다. 전쟁통에 1955년에야 처음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서울시내 동장선거 경쟁률이 3.3대 1로, 온 시민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1958년에 지방자치법 4차 개정을 통해 선출직이던 자치단체장을 임명직으로 바꿨고, 야당성향의 자치단체장은 일제히 해임됐다. 

누더기가 된 지방자치제는 1960년 4월 19일 혁명으로 다시 회복되는 듯했지만 이듬해 5월 16일 박정희가 이끄는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다음 달인 6월 20일에는 전국의 자치단체장들을 일제히 해임했다. 특히 박정희는 집권하자마자 일제 때부터 내려오던 자치조직인 동회를 해산하는 한편, 정변에 참가한 군인들을 '유신사무관'이란 이름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내려보냈다. 지역에서, 도시에서 독자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 자체를 원천봉쇄한 것이다.

그로부터 지방자치제가 부분적으로나마 부활되기까지는 무려 30년이 걸렸다. 1988년 4월 총선에서 여소야대를 만드는 데 성공한 야권은 지방자치제도를 부활시키기로 합의했다가 1990년 1월에 이뤄진 3당 야합으로 다시 좌초될 위기에 처한다. 이때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가 지방자치제 시행을 내걸고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가 1991년에 기초 및 광역 의회 선거가 1995년에 단체장 선거가 이뤄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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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nkly_statue_out_front./김태훈 지역스토리텔링 연구소장

주권자가 스토리텔러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는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지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서도 밝혔듯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지배 계층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도시의 자치권도 단체장이 아닌 시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렇다면 도시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시장이나 고위관료 혹은 특정 분야 전문가가 아니라 시민이 도시 이야기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시민이 도시의 주권자라면 시민이 스토리리스너가 아닌 스토리텔러가 되어야 한다. 주권을 가진 자가 주권의 정당성을 밝히는 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그 이야기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광범위하게 수용될 때 비로소 그 도시는 건강한 정체성을 갖게 된다.

최윤덕 이야기가 창원시민에게 외면 받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자신들의 이야기라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시민이 생각하는 창원시의 정체성과 최윤덕으로 표상되는 창원시의 정체성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14년 현재를 살아가는 창원시민은 이미 도시의 주권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이상적이라고 반론할 수도 있겠다. 전문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수십만에서 백만을 넘나드는 시민이 특정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가능할까? 다양한 배경과 이해관계를 가진 시민들이 과연 자발적인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그러나 현실 속에는 그와 같은 이야기들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건강한 연대가 전문가들의 지혜를 뛰어넘는다는 집단지성 개념은 이미 우리 가운데 실현되고 있다.

시민이 만드는 이야기들

두 가지 예만 들겠다. 아일랜드 코브항에 가면 어린 남동생 두명을 이끌고 배를 기다리고 있는 애니무어(Annie Moore) 동상이 있다. 같은 사람의 동상이 미국 뉴욕의 엘리스섬에도 있다. 애니무어는 1892년 1월 1일 미국 뉴욕 엘리스섬에 세워진 이민자 관리소를 처음 통과한 열 다섯 살짜리 소녀였다. 당시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이 백만 명 가까이 굶어죽은 대기근을 피해 미국이라는 신대륙으로 목숨 건 이민을 떠나고 있었다. 무어도 먼저 미국으로 떠나 자리를 잡은 부모님을 따라 길을 나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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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ie_Moore ./김태훈 지역스토리텔링 연구소장

아일랜드인들은 엘리스섬을 처음으로 통과한 애니무어를 기리며 '희망의 섬, 눈물의 섬(Isle of Hope Isle of Tears)'이라는 노래를 지어 오늘날에도 중요한 행사에서 함께 부르고 있다. 여기서 희망의 섬은 물론 뉴욕의 엘리스섬이고, 눈물의 섬은 떠날 수밖에 없었던 고국 아일랜드를 가리킨다. 노래 후렴구는 이렇다.

"희망의 섬, 눈물의 섬, 자유의 섬, 두려움의 섬.
그러나 거긴 당신이 떠나온 곳과 다릅니다.
그 굶주림의 섬, 고통의 섬, 다시는 당신이 보지 않을 섬.
하지만 고향의 섬은 항상 당신 마음 속에 있습니다."

애니무어는 대단한 업적을 쌓은 위인은 아니다. 이민 이후의 삶도 지극히 평범하다. 그러나 어린 남동생들 손을 붙잡고 사선을 넘던 열 다섯 살 소녀는 당시 아일랜드인의 절박한 처지를 상징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들은 무어를 노래하며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았을까? 

시민들이 직접 만든 영웅들도 있다. 축구의 나라 잉글랜드에서도 팬 충성도가 높기로 유명한 리버풀FC의 박물관 입구에 실물 크기의 동상 하나가 세워져 있다. 1959년부터 74년까지 리버풀팀을 맡아 지금의 명문팀으로 성장시킨 빌 샹클리 감독이다. 

그가 팀을 맡았을 때 리버풀팀은 2부리그를 전전하던 그저 그런 팀이었다. 지휘봉을 잡은지 2년만에 2부리그에서 우승해 1부리그에 올랐고, 그 여세를 몰아 재임기간 중 세 번의 리그 우승과 두 번의 컵 우승을 팀에 안겼다. 그로 인해 리버풀FC는 리그를 대표하는 명문팀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그의 동상 아래에는 "그는 리버풀 시민들을 행복하게 했다(He made the people happy)"는 문구가 씌어 있다. 구장 정문인 샹클리 게이트도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산업혁명 때 주목 받았다가 핵심 연료가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면서 몰락하던 공업도시 리버풀에 자긍심을 심어준 장본인이 바로 샹클리였던 것이다. 

시민은 공권력의 통제와 지휘가 없으면 지리멸렬하는 어리석은 군중이 아니다. 민주공화정과 지방자치제를 바탕으로 하는 도시의 엄연한 주권자다. 도시의 정체성을 만들어야 할 책임은 도시의 주권자에게 있다. 도시 이야기의 주인이 시민이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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