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출 때 가장 행복한 춤꾼, 소외된 사람 위해 나서

창원시 정보를 모은 온라인 백과사전 '디지털창원문화대전( http://changwon.grandculture.net )'에서 그녀를 찾았다. 정옥경(50) 씨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나라의 근대 무용은 1900년대 이후 서구 문화의 유입으로 극장 무대가 생기면서부터 외국 무용의 소개와 본격적인 무대화로 이어졌다. 해방 이후 6·25 전쟁을 거쳐 1950년대 말까지 마산에서 김해랑, 박임순, 최현, 김행자 등의 선구적인 활동을 통해 무용의 터전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중략) 1990년대 말에서 2000년 초가 마산 무용계로서는 해방 이후 최고의 전환점을 맞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 길목에 정옥경, 김수미, 박은혜, 이현, 조영주 등이 있었다.'

'무용인' 정옥경 씨는 약 20년 전 '정옥경무용단(95년 창립)'을 꾸려 지역에서 창작공연을 열고 당시 마산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작가들과 함께 무대를 만들었다.

1996년 '14회 전국연극제'에서 대상을 받은 극단 마산의〈그것은 목탁 구멍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안무를 맡기도 했다.

몇 년 전부터 그녀는 무대에 서지 않는다. 문화예술교육사업 전문 기획자로 나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역 문화예술인들은 그녀를 보고 '요즘 보이지 않더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스스로 '무용가(家)'가 아니라 '무용인(人)'이라고 부르는 정 씨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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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인 정옥경 씨./김구연 기자

"언론 인터뷰 오랜만이에요"

정 씨를 처음 만난 건 지난해 8월이었다. 한여름 기세가 한창일 때 마산의 한 음식점에서 그녀와 인사를 나눴다. 문화부 기자에게서 소개를 받은 터였다. 그녀가 운영하는 정옥경무용단이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최한 문화예술교육(군, 청소년 등) 지원사업에 선정돼 창원청소년비행예방센터에서 춤을 가르친다는 내용이었다.

센스있는 옷차림에 또랑또랑한 말투를 가진 그녀. 첫인상이었다.

지난 11월 12일 경남도민일보 5층 휴게실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1년 전 인상 그대로였다. 눈에 포인트를 준 화장과 매니큐어가 정갈하게 발린 손톱, 가을에 어울리는 카디건까지. 멋쟁이였다. 밝은 표정으로 안부를 묻는 그녀는 여전히 활력이 넘쳤다.

"화장 안 한 얼굴로 점퍼 하나 걸치고 다니는데 오늘은 인터뷰 날이라 신경을 썼습니다. 카메라에 잘 나와야 할 텐데요. 오랜만에 하는 인터뷰, 그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려니 떨리네요."

2000년대 초반 그녀는 마산 문화계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무용이라는 장르를 지역에 퍼뜨린 주요 인물이기도 하다.

1997년 정옥경무용단의 제1회 창작공연을 처음 선보인 이후 지역에서 꾸준히 활동했다. 99년에는 마산의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던 '마산개항 100주년 기념 기념작'을 만들어 일본과 대만에서도 공연을 했다.

그녀는 정옥경무용단뿐만 아니라 한국무용 전공 춤꾼들과 지역 무용계를 활성화하려고 창작전문단체를 따로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정 씨는 청춘을 바칠 무대로 고향인 마산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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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인 정옥경 씨./김구연 기자

부산시립무용단 끝내고 고향인 마산으로

"마산무학국민학교(현 마산무학초등학교)를 다니던 때 마산에 있는 초등학교끼리 겨루는 학예발표회가 있었어요. 4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당시 학교에 엄갑련 무용 선생님이 계셔서 우리는 율동으로 학예발표회에 나갔지요. 학원에서 따로 배우기도 했어요. 우리 학교는 단체로 박성희 선생님 학원에서 율동을 배웠어요. 다른 학교는 다른 학원에서 배우고요. 당시 무용인들이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거든요. 학예회 발표가 끝나자 엄갑련 선생님이 무용을 해보라고 권유하셨어요. 저희 어머니께서 관심을 보이셨죠. 돌아가신 이필이 스승님과 정윤정 선생님을 모시고 한국무용을 배웠습니다."

정 씨는 창원여자중학교, 마산제일여자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무용을 계속 배웠다. 당시 경남에 예술고등학교가 없던 시절이라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학업과 무용을 병행해야 했다.

목표는 부산여자대학(현 신라대학교). 그녀는 '무용학과'하면 알아주던 부산여자대학(현 신라대학교) 무용학과에 진학했다. 전공은 한국무용. 부산시립무용단 출신이기도 하다.

정 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대학 캠퍼스에서 마주쳤던 무용학과 학생들이 떠올랐다. 올백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운동복 차림으로 삼삼오오 몰려다니던 풍경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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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인 정옥경 씨./김구연 기자

"춤출 때 앞머리가 있으면 불편해요.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기고 묶어야 하죠. 대학에서 스승이었던 손세란 교수님도 단발머리였는데 수업할 때는 짧은 머리라도 언제나 단정하게 묶었죠. 시간 개념도 철저하게 강조했고요. 또 발레를 하는 친구보다 심하지 않았지만 몸매 관리도 필수였어요. 지금 제 모습을 상상하면 안 돼요. 부산시립무용단에 들어갈 때 신장 167.5㎝, 몸무게 55㎏이었어요."

그녀는 부산시립무용단에서 5년 생활하고 마산으로 돌아왔다. 마산과 진해에서 방과후 교사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배움에 대한 갈증을 풀려고 신라대학교 체육대학원에 진학했다. 마산과 부산을 오가던 시절이었다.

"초등학생 대상으로 방과후에 무용을 가르쳤어요. 극단 마산에서 안무를 맡기도 하고요. 부산과 마산을 오가는 바쁜 생활을 했죠. 그러고 보니 30대 때 숨 가쁘게 일한 것 같아요."

당시 방과후 선생님은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다.

90년대 중반 극단 마산에서 활동하던 초등학교 교사 추천으로 진해 경화초등학교에서 무용을 가르쳤다. 1년 동안 기본기에 충실해 수업했다. 어린 학생들은 창원대와 개천예술제 대회에 나갔고 수상하는 기쁨을 맛봤다. 이후 정 씨에게 무용을 가르쳐달라는 러브콜이 여기저기에서 들어왔다.

지역 극작가, 작곡가, 연극연출가와 함께한 무대

창작활동도 잊지 않았다. 95년 정옥경무용단을 꾸리고 97년 2월 마산 MBC홀에서 '고뇌속에 피어나는 아름다움이리라'를 선보였다. 처녀작이다.

정옥경무용단은 무용을 전공한 친구들이 모여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제1회 정옥경무용단 창작공연 '고뇌속에 피어나는 아름다움이리라'는 정 씨가 온전히 사비를 들여 꾸민 무대였다. 당시 850만 원 정도였단다.

"공연을 여니 지역언론사에서 취재를 했어요. 당시 경남신문 도난실(전 3·15아트센터 관장) 기자가 경상남도문예기금 지원을 받았느냐고 물어보더군요. 저는 그런 지원이 있는지도 몰랐거든요. 그래서 정옥경무용단을 제대로 꾸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단'을 만들면 지원을 더 잘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요."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온 후 어려움이 컸다.

우선 부산과 마산의 차이였다. 1990년대 후반 마산 지역민들에게 무용이란 장르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부산이라는 도시는 시립무용단 이외에도 무용전공자들이 모여 무용단을 창단하고 왕성한 활동을 해요. 반면 마산은 원로 무용가와 대부분 젊은 춤꾼들이 개인적인 무용교육활동을 하고 이외 창작공연 활동은 상대적으로 적었죠."

이는 정옥경무용단 탄생의 배경이기도 하다.

"정옥경무용단을 거창하게 말하면 지역 관객들에게 무용을 볼 수 있는 문화예술 제공차원에서 만들었고요. 소박하게 이야기하자면 그저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이 컸죠."

그녀는 창작공연에 애착을 두고 지역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고민했다.

2001년 그녀가 섬을 모티브로 한 창작공연 '섬, 네개의 징검다리'는 지역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1년 7월 17일 자 경남도민일보 문화면에 소개된 기사의 한 부분이다. '정옥경 씨에게 '섬'은 곧 이제껏 벌여온 춤판이자, 춤이 곧 삶인 그녀에게 있어 지나온 삶의 이력이다.'

"모순된 말이긴 하지만 섬의 상징적 의미는 단절의 표현이자 연결의 의미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바쁜 일상 뒤에 숨어 있는 본질, 예를 들어 외로움이나 단절, 고독, 소외, 절망, 전쟁, 평화를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아파트 엘리베이터나 버스터미널 속 풍경은 마치 절간같이 조용하잖아요. '낯섦' 때문이죠. 우리가 수많은 헤어짐을 겪으면서도 연결이 존재하듯 섬도 그렇게 보았죠. 무대를 옴니버스식으로 4개 부문으로 구성했는데 안무는 제가 맡았고 대본은 김봉희, 작곡 윤병철, 무대감독 문종근 선생님이 했죠. 극작가, 작곡가, 연극연출가, 선후배 동료 무용인 등 예술인 다수가 참여한 공연이었어요."

그녀는 경남무용협회처럼 틀을 갖춘 조직에서 활동하기보다 홀로 고민하는 쪽이었다. 이는 정옥경무용단에 열중하게 했다.

정옥경무용단은 지난 5월 제12회 창작공연을 경남천광학교에서 했다. 제10·11 공연이 열렸던 창원 창동예술소극장이 아니라 장애 공립특수학교에 무대를 차린 것이다.

그녀는 문화복지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경남혜림학교에서 공연을 연 이유

"춤꾼으로서 창작공연을 할 때마다 말하고 싶은 주제를 담아요. 그런데 관객들이 춤을 어렵게 생각해 고민이 컸어요. 30대 초반 때는 우리가 선보이는 춤이 난해하다고 여겼죠. 그래서 내 마음 속 일상 경험을 모티브로 삼아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했어요. 단 심도있게 표현하고요. 그런데 꾸준히 창작활동을 하지 못했어요. 30대 후반 즈음 '세월을 탔다'고 할까요. 여러 개인사정이 겹쳤고 함께 했던 선후배님들도 각자 사정이 생겼죠."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장애인을 직접 접하게 됐다.

2003년 어느 날, 그녀는 나이 40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술가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여겼는데 또 다른 벽을 만난 느낌이라고 할까요? 장애인을 만나고부터 '예술이 우리네 실생활에 무슨 역할을 하고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시작했죠.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무관심, 그리고 불평등한 사회구조 등 머리가 복잡했어요."

그런데 이러한 고민은 정 씨가 여러사정으로 주춤했던 춤을 다시 추게 했다.

2003년부터 정옥경무용단은 경남혜림학교(정신지체 학생 교육 공립특수학교)에서 무료공연을 시작했다. 2012년까지 경남혜림학교를 찾았다.

정 씨는 일반인 대상 공연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문화혜택을 받지 못하는 계층에 눈을 돌렸다. 장애인과 어르신을 만났다. 지역을 가리지 않았다. 인천과 안산, 경북 등 찾아가는 공연을 했다. 횟수가 120회를 넘었다.

나라에서 인정도 받았다. 2009년 '희망대한민국 프로젝트사업(문화나눔공연 부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받았다.

군 장병과 비행청소년을 만난 이유

정옥경무용단이 찾은 소외계층은 장애인과 노인만이 아니었다.

'날라리' 청소년과 군부대 장병. 그녀는 문화복지 공연에서 나아가 문화예술교육에 뛰어들었다.

2010년 5월부터 군 장병 대상 교육을 시작했다. 그 해 공군교육사령부와 해군작전사령부, 공군 제5전술공수비행단을 찾아갔다. 군 장병을 만나는 일은 5년째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에는 창원에서 비행청소년을 만났고 올해는 울산·진주보호관찰소에 있는 학생들과 마주했다.

"비행청소년을 교육하다 알았어요. 그들이 가해자이기도 하지만 사회구조 속에서 볼 때는 오히려 편견과 소외의 대상이 되는 피해자임을. 가끔 뉴스를 보면 어느 지역에서 보호관찰소가 들어선다고 법무부를 찾아가 항의하는 주민들이 나오잖아요. 아이들을 마치 괴물처럼 보고 꺼리죠. 저는 이 아이들이 웃음을 찾아 스스로 자존감과 자긍심, 긍정적인 마인드를 형성하도록 돕고 싶어요."

그녀는 정옥경무용단을 책임지는 대표로서 공연 연출가로서 기획자로서 지역민에게 다가갔다. 무대에는 서지 않지만 프로무용인으로서 또 다른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

정옥경무용단의 교육사업도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다. 보호관찰소에 있는 아이들에게서 웃음소리가 들린다라는 사업주체 측(법무부) 평가와 함께 2012년 '세계문화예술교육주간(문화예술교육 부문)' 한국문화예술교육원 원장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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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인 정옥경 씨./김구연 기자

"예술이라는 한정된 범주에서 벗어난 예술"

인터뷰 내내 그녀를 찾는 전화가 울렸다. 이틀 후에 있을 발표회 준비 때문이었다.

"11월, 12월은 1년 동안 해오던 예술활동을 마무리해야 할 때라 바빠요. 울산과 부산, 창원, 사천, 진주 등 5개 지역을 일주일에 한 번씩 돌며 아동, 비행청소년, 보호관찰소, 군 장병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고 발표회도 준비하죠. 또 내년 사업 공고가 뜰 시점이에요. 무용단을 운영하려면 사업을 하나라도 더 따야 해요. 놓치면 안 되니 온 신경을 쓰고 있죠."

무용단을 운영하려면 지원을 받아야 하고, 지원을 받으려면 정 씨가 기획한 사업이 채택되어야 한다.

어찌 보면 정옥경무용단은 '일을 따야' 일을 하는 프리랜서 조직이다.

이를 짊어진 그녀는 어깨가 무거울 만도 한데 교육 사업의 줄기를 하나씩 늘리고 있다.

올해는 '문화나눔터 다(多)'라는 교육팀을 새로 꾸렸다. 얼마 전 단체 등록 교부증이 나왔다고 했다. 공연팀(정옥경무용단)과 교육팀(문화나눔터 다)으로 세분화된 셈이다.

"문화나눔터 다에서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전통문화예술(아리랑) 사업을 합니다. 예산 지원을 받아 창원 진동초등학교, 마산삼진중학교 아이들과 돝섬 아리랑을 개발하고 있어요. 문화나눔터 다는 무용이란 장르에 머물지 않고 연극과 마술, 회화, 음악 등 전문예술가를 영입해 함께 펼치고 있어요. 저희는 나랏돈을 먹고 일을 하잖아요. 정말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모두에게 귀한 시간을 헛되이 쓰고 싶지 않아요. 저도 단원도 교육대상자도요."

정 씨는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한순간 방심이 단원에게 미치는 영향을 잘 알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바라보는 저에 대한 시선이 좋을 수만은 없죠. 시간이 갈수록 순수예술을 하는 선후배님들과 영역 차이가 날것이고요. 저는 정옥경무용단에 힘쓸 거에요. 주위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초심을 잃지 않는 예술인이 제가 바라는 삶이자 꿈이고 목표에요."

프로무용수에서 전문 기획자로 나선 그녀.

"여러 계층 관객과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공연프로그램 개발이 제 몫이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구나 문화 하나쯤은 직접 누리는 날이 오리라 믿어요. 조수미가 가요를 부르고 금난새가 직접 나서 곡 설명을 하는 시대잖아요. 예술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난 예술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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