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고딩이지만 대학가서 문학 공부도 하고 싶다"

'만학'에 나선 사람들을 주변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자연스레 눈길을 끈다. 거창에 있는 가조익천고등학교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68세에 입학해 1학년에 재학하고 있는 변희우 씨다. 이미 방송을 두 번이나 타서 제법 알려져 있기도 하다. SBS <세상에 이런 일이>와 KBS <강연 100℃>에 나와 자신의 삶과 학교생활을 이야기해 제법 뜨거운 반응도 얻었다. 그래서 KBS는 <강연 100℃> 연말 기획으로 변 씨 이야기를 다큐로 촬영하고 있다. "건강만 허락한다면 대학에도 가고싶다"는 변 씨를 만나보았다. 인터뷰 처음에 꺼낸 말이 "우리 학교 오케스트라 예산이 올해까지래요. 내년부터는 예산이 없다는 데 그 얘기를 꼭 써 주세요"였다. 마칠 때도 그랬고, 중간 중간 되풀이했으며 인터뷰 마치고 인근 밥집에서 삼겹살 구워가며 잡담 할 때도 그 얘기를 계속 강조했다.

지난 10월 31일 오후 학교에 찾아갔을 때 마침 특별활동 시간이었다. 그는 학교 오케스트라부에 속해서 색소폰을 배우고 있었다. 사실 색소폰은 그가 68살이라는 나이에도 고등학교 입학을 마음먹은 결정적 계기였다.

박자를 배우고 싶었다

"내가 악기를 꼭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게 박자거든요. 노래를 하나 불러도 이게 박자관념이 없어서 뒷동산 올라갔다 내려왔다 지 맘대로 하는 거야. 박자를 맞출라고 학원을 가봤거든. 학원 갔더니 박자는 틀려도 되는데 마디만 맞으면 된다더라고. 그 말 듣고 안 갔어. 박자 배울라고 갔는데 박자 틀려도 된다면 거기서 그럼 뭘 배우겠어요."

입학을 결심한 동기야 여럿 있지만 악기를 하나 다루고 싶다는 욕심도 크게 동했다. 그는 현재 바르게살기운동 가조면 협의회장이다. 그전에 적십자 봉사대장도 했고 아마추어무선 봉사회장도 맡아왔다. 가조면 최대 봉사조직인 신우회장도 몇 년씩 맡아서 지역에 봉사해왔다. 자연스레 지역의 지도자 반열에 올라섰는데, 다른 건 다 하겠는데 노래는 마음먹은 대로 잘 안됐다는 것.

지금 다니는 가조익천고등학교에도 음악선생님이 없다. 중학교 다닐 때도 음악 선생님은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오케스트라가 있어 지휘 선생님을 따로 모셔서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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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우 씨(왼쪽)./정성인 기자

"입학하고 특별활동 부서를 적어내라 해서 오케스트라를 적어냈지요. 첫 시간에 갔는데 지휘 선생님이 '혹시 악보 볼 줄 아십니까' 묻더라고. 모른다 했더니 '큰일인데, 큰일인데' 그러더라고. 국어로 말하자면 'ㄱ''ㄴ'부터 새로 배우는 거라. '반음이 뭔지 들어는 봤습니까' 하는거라. 그래 난 반음 모른다. 그럼 샵은 들어봤느냐. 샵은 어쩌면 들어본 것도 같긴 하다. 플랫은 들어봤느냐. 플랫도 들어본 적 없다. 참 난감한 거라. 서로가."

그 지휘자 선생님은 변 씨 친구 아들이다. 그 난감함이 서로 오죽했을까.

그러면서 그는 한 가지 오해를 했다. 색소폰 중에서도 처음 배우기가 더 어렵다는 테너 색소폰을 맡았다. 오케스트라 안에 테너 색소폰 하는 학생이 변 씨 말고 한 명이 더 있는데 선배들이 그 학생에게는 이것저것 가르쳐 주기도 하는데 변 씨에게는 도통 관심도 보이지 않더라는 것. 서운함을 넘어 화까지 났다고.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어. 그 친구는 음을 잡은 거고, 나는 음을 못 잡은 거라. 음을 잡고 나서는 이것저것 배울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는데, 나는 머 소리도 제대로 못 내니 옆에서 도와줄 것이 없었던 거지. 음을 잡고 나니 옆에서 많이 도와주더라고."

그렇게 되기까지 변 씨도 참 마음 고생 몸 고생 많이 했다. 입학하고 얼마 안돼서부터 각종 경연대회나 공연 같은 게 이어졌는데 변 씨는 손자뻘인 테너 색소폰 하는 학생 악기까지 챙겨서 들고 다녔다. 테너 색소폰은, 요즘 정년퇴직한 이들이 흔히 배우는 알토 색소폰에 비해 크기가 훨씬 크다. 하나 들고 움직이기도 쉽지 않을 텐데 두 개를 들고, 그것도 손자뻘 학생 것까지 챙겨서 쫓아다녔다고. 그게 덕이 된 건지 이후 그 친구가 기능 측면에서 많이 도와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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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소폰을 불고 있는 변희우 씨./정성인 기자

"지 연습 한참 하다가도 언제 봤는지 옆에 와서는 손가락 위치가 잘못됐다며 잡아주기도 하고…. 지 연습하면서도 다 보고 듣고 있었던 거라."

그렇게 오케스트라는 그가 입학한 동기가 됐고, 힘들고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이제는 '반드시 졸업하겠다'는 의지를 세우는 데도 도움이 됐다.

"형님 그것밖에 안됐어요?"

"입학식 날이었어. 학생들 사이에 줄을 서 있는데 앞쪽 단상에는 엊그제까지만 해도 나랑 같이 면내 기관단체장 회의 때 같이 회의하고 회식 때 술 마시고 하던 사람들이 주욱 앉아 있는 거라. 작년에는 나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지. 진짜 도망가고 싶더라고. 하지만 '여기서 도망가면 내 인생도 여기서 끝난다' 생각하고 버텼어."

출발부터가 쉽지 않았다. 아니 출발을 결심하고 결행하기까지도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2년 쯤 전이었어. 오케스트라를 보고는 배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지. 그렇지만 그 때는 우리 딸이 그 학교 국어선생님으로 있었기에 어쩌지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었는데, 딸이 다른 학교로 갔어. 그래서 기관단체장 회의 때 일부러 눈치껏 교장선생님 앞자리에 가서 앉아서 물어 본 거라. '교장선생님, 나 오케스트라 배우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느냐'고. 흔쾌히 그러라더라고. 그 말 듣고 곧 학교로 가서 오케스트라실로 갔지."

처음에는 한동안 구경만 했다. 그러면서 악기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지휘자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얘기했지만 반응은 '뜨아!'였다고. "구경하시는 건 얼마든지 좋은데 악기를 드릴 수 없습니다"였다는 것. 그래서 그는 확 내질러 버렸다. "그래? 그럼 나 내년에 이 학교 입학한다"고 했더니 학생들은 "그러세요"라고 화답 아닌 '염장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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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우 씨./정성인 기자

그래서 그는 입학을 결심했고 지난해 말 모교인 가조중학교에서 원서를 쓰고 익천고에 입학하게 됐다. 

"입학식 마치고 교실에 가서 앉아 있는데 복도가 새까만 거라. 1학년은 물론이고 3학년까지 전교생이 복도에 와서 구경하고 수군거리는 거라. 머 창경원 원숭이 구경하듯 그랬지. 그래도 내가 봉사단체장 오래 하면서 대중 앞에서는 제법 낯이 두껍거든. '너그 구경할라면 해라. 난 관심 없다' 그리 생각하고 버텼어."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 학교 전통이 외부 방문객에게 인사는 정말 잘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그를 '외부 방문객'으로 보고 그에 걸맞을 만큼 인사를 잘했다고.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동식 수업이 많아요. 컴퓨터실은 4개나 있는데 어딘지 찾아갈 수 없어요. 지들끼리는 다 아는데 내게는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체육시간이면 테니스장으로 가얄지 운동장으로 가얄지 다목적실로 가얄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요.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면 아이들이 아무도 없는데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가 없어 학교를 헤매고 다녔어요."

다목적실에서 하는 체육 시간이었다. 그는 젊어 탁구는 '좀' 쳐봤지만 당구는 구경도 못했다. 그런데 아무도 그와 탁구를 쳐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당구 큐를 잡았지만 처음 해보는 거니 뭐 그리 재미를 느낄 수 있었을까 싶다.

입학하고 몇 달이 지났는데도 그냥 '방문자'에게 하듯이 인사는 꼬박꼬박 하는 아이들과 도저히 친해질 수가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이를테면 잘못한 아이들을 벌세우는 영역에 가서 엎드려뻗쳐 벌도 세웠다. 다른 학생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는 배려였지만 통하지 않았다. 정말 견디기 어려웠고 고민이 많은 시기였다고 했다. 심지어 몇 년 전 심근경색으로 치료 받고 혈관 속에 넣어둔 스텐실이 문제라도 일으켜 병원에 입원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 핑계로 학교 안 가도 된다는 생각 때문에. 정말 중도 작파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결석도 하고 그랬다. 

어느 날 중학교 후배인 교감선생님이 일과 마치고 소주 한잔 하자고 했다. 소주잔을 기울이던 교감선생님이 "형님 내가 할 말이 있소"라고 운을 떼자 변 씨는 깜짝 놀랐다고. 입학하고부터 학교에서는 절대 '형님'이라고 안하는데 그날따라 '형님'이라고 불렀기 때문.

"형님이 그것밖에 안됐소? 그라모 나 형님하고 인자 안 볼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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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소폰을 불고 있는 변희우 씨./정성인 기자

선도도 말고 선동도 말라

그는 입학하기로 하고 나름대로 기준을 세운 게 있었다. '선도도 말고 선동도 말라'는 것이었다. 선도하기 시작하면 이미 '동료'가 아니라 위아래가 생기게 된다는 생각이었고, 나름대로 다혈질이어서 지역에서 선동을 제법 잘해왔는데 학생들을 선동하면 자신의 입학을 받아준 선생님들을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걱정이었다.

"입학하기 전에 교장선생님과 약속한 것이 선도 안하고 선동 안하고였어요. 아내하고도 약속했거든요. '당신이 애들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면 거 못 붙어 있는다'는 거야. 그래 난 애들이 떠들든 싸우건 절대 말 안합니다. 암말 안하고 이리 앉아서 공부나 하는 거죠."

말이 공부지, 그것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절감했다. 같은 반 아이들이 떠들어도 딱 신경 끄고 책만 읽었다. 그러면서 보여준 게 이어폰. 하지만 플러그가 없는 이어폰이다. 소음 차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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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우 씨./정성인 기자

"처음 입학하니 담임선생님이 반장하려느냐고 해. 그래 '난 반장 안한다. 따라가게만 해주십시오' 했어."

하지만 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수필가로, 소설가로 이미 등단했으니 국어 과목은 잘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고, 요즘 아이들보다 책도 많이 읽었고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으므로 역사과목도 잘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중학교 졸업하고 딱 51년 만에 학교라는 델 갔는데 내가 중학교 다닐 때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른 거라. 우리 담임선생님이 역사 과목인데, 뭐라고 주욱 설명하고는 '알겠죠?' 하면 아이들이 '예' 하는 거야. 알기는 쥐뿔. 도대체 알아들은 게 없는 데 뭘 안다는 거야 싶었어."

호기롭게 입학했지만 점점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만 쌓여 가던 시기에 교감선생님이 오기를 불러일으키는 말 한마디를 해줌으로써 새로운 동력을 찾았다.

"아 이기 아니다. 내가 뭣 때문에 적응을 못 하겠나. 내 인제라도 3년 동안 징역을 살겠다. 징역산다 생각하고 살자. 우리 집사람도 자꾸 달래는 게 '당신 징역산다 생각하고 3년 있으면 졸업장 받고 당신 그 좋아하는 악기 노래 몇 곡이라도 불 수 있으면 좋지 않나' 하는 거라. 내가 만약에 자퇴하면 '너는 역시 그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다. 우리 생각과 조금도 다른 놈 아니다 너는'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자각도 오더라고. 그래 든 생각이 이걸 극복한다는 것은 내가 버티는 것밖에 없는 거라. 무조건 버티자."

"머슴살이를 하더라도 반은 뺏어 올끼다"

그는 '문재(文才)'는 타고났나 보다. 처음 진학을 고민했던 것도 글쓰기 때문이었다. 제법 글로 이름을 날려보기도 했지만, 꿈이었던 소설가가 되려면 대학 공부를 해야 한다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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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우 씨./정성인 기자

군대 갔을 때 얘기다. '송충이' 하나 달고 자대 배치됐는데 워낙 편지 쓰기를 좋아해서 치약 뚜껑으로 만든 등잔불 켜놓고 모포 뒤집어 쓴 채 편지를 쓰다가 소대장에게 들켰다. 소대장은 쓰던 편지를 읽어 보더니 공간을 마련해주면서 일과 이후에는 마음껏 편지를 쓰라고 배려해줬다. 단, 조건이 소대원들 '연애편지'는 전부 대필해줘야 한다는 것. 그 연애편지 대필로 선임하사가 진중 결혼식을 하는 성과도 올렸다. 그 당시로는 드물게 사단장이 주례를 섰다니 대단하다 싶다.

"글 쓰는 끼는 있었나봐. 72년 1월 21일에 내가 한국일보에 확 터졌어. 후방에 계신 국민 여러분 우리는 참 삭막한데 있다. 병영 분위기 밝게 하려고 하니 여러분이 꽃씨를 좀 보내주라.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화려하게 피는 병영을 만들겠다고 투고했는데 그게 그냥 팍 터져가지고 엄청나게 온 거라. 그라고 나니 전우신문에서 취재하러 오고 원고 달래서 주기도 하고 조금 군대 안에서 유명해졌죠."

45세에 다니던 회사를 정리하고 보니 '문재'를 썩히고 싶지 않아 수소문했다. 마침 거창에 표성흠 선생이 있었다. 불문곡직 찾아가 인사하고 문하생으로 받아달라고 했지만 일언지하 거절당했다.

"물어서 찾아갔는데 내 인상이 차근차근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머리도 허옇재 나이도 든 데다가 또 인상 더럽재 이러니 첫마디에 딱 박대를 하더라고. 나 여기서 좀 배울라고 왔다 했더니 당신 안 된다 하는 거라. 그래 내가 좀 배워보겠습니다 해도 여기 오지 말고 딴 데 가라는 거라. 그래 다음 주에 찾아갔죠. 그랬더니 '내가 안 된다 그랬는데 왜 또 오십니까. 오지 마세요'라고 해. 그래 나는 꼭 배워야겠다고 말했어."

그 다음 주에도 가고 또 왜왔느냐 소리 듣고. 또 가고. 

"그때 오기가 딱 하나 서는 게 '내가 니 집에 머슴살이를 해도 내 니 속에 있는 거 반은 뺏어 올란다' 이런 오기가 딱 생기더라고. 그때부터 그 집 머슴살이 비슷하게 했어요. 공부하는 날 가서 그 집에 땅벌집이 두 군데나 있었는데 내가 다 처리해줬어요. 또 피부진드기도 전부 처리해줬어. 그렇게 머슴살이를 했어요. 그러니까 서서히 눈에 들었어. 선생님보다 사모님 눈에 먼저 띈 거라. '저 사람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거기서 딱 7년 공부한 결과가 수필집 <촌놈 꼴망태와 모피코트>이고 장편소설 <높새바람 이는 개여울>이다. 

"건강만 허락한다면 대학 가서 문학을 더 공부하고 싶다"는 그의 꿈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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