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사나이 뚝심으로 키운 배 '월척이네'

바다의 사나이가 산으로 갔다. 30년 이상 '배'(어선)를 타던 사람이 나무에서 달콤한 '배'를 키우게 됐다. 그런데 그 크기가 배 중에서는 거의 '고래급'이다.

사천 배누리 교육농장 박진희·한연옥 대표 부부의 과수원에서 자라는 배 중에는 무게가 2㎏ 이상 나가는 것도 있다. 그런 '고래급' 배를 바라보는 박 대표의 표정은 싱글벙글 말이 필요 없다.

태풍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부부는 부산에 살다 2002년 귀농했다. 남편 박진희(59) 대표는 30년가량 원양어선을 탔다. 그런데 마지막 항해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2002년 월드컵 당시였습니다. 귀국 중에 대만 부근에서 큰 태풍을 만났죠. 죽다 살아나고 보니 바다라면 정이 뚝 떨어졌습니다."

우연히 고향 사천에 배 과수원을 구입해 놓은 것이 있었다. 부부는 망설임 없이 부산 생활을 청산했다.

아내 한연옥(53) 대표도 귀농을 반대하지 않았다. 시골 생활은 아내의 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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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연옥·박진희 씨./이원정 기자

"시골에 가면 힘이 들 거라는 생각을 전혀 안 했습니다. 정원을 좋아해서 낭만적인 전원생활을 꿈꿨죠. 한마디로 도시인의 시골에 대한 로망을 품고 왔습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랐다지만, 일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었던 부부는 가벼운 마음으로 터전을 옮겼다. 하지만 막상 부딪힌 시골 생활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돌밭에 텐트를 치고

나무에 그냥 배가 열릴 줄 알았다. 열린 배를 그냥 따 먹으면 될 줄 알았다. 넉넉하고 여유 있고 풍요로운 전원생활을 기대했다.

그러나 형편상 도시의 집을 팔지 못해 9900㎡(3000평) 배 밭에서 텐트를 치고 몇 개월을 살아야 했다. 말이 배 밭이지, 돌투성이 야산에 배나무가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돼 있었다.

울퉁불퉁한 돌밭이라 바닥이 고르지 않아 손수레가 들어갈 수도 없었다. 부부는 밭을 기어다니며 돌을 하나하나 들어 날랐다. 나중에는 굴착기와 운반차 중고를 구입해서 돌을 나르고 평탄화 작업을 했다. 모두 3년이 걸렸다. 밭에서 실어 나른 돌로 바로 옆 골을 하나 메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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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연옥·박진희 씨./이원정 기자

이런 부부의 모습을 인근 할아버지가 보더니 한 말씀 하셨다.

"자네들은 그 땅을 평생 팔지 못할 거야. 그 고생을 하며 밭을 일궜는데…."

배누리 교육농장의 배 밭은 지금은 현대화 시설을 해서 나무 한그루 한그루 아래 운반차가 다 들어갈 수 있게 돼 있다.

빚이 없이 귀농했다는 것이 부부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하지만 기술이 없었다. 배가 열리긴 했지만 가지만 무성하고 열매는 작았다. 나무가 노령화돼 한계가 있었다. 부부는 나무에서 새 가지를 이끌어 내 좋은 과일을 키우는 방법을 몰랐다. 전정 기술이 없었던 것이다.

한해 실패하고 그것을 경험 삼아 다음해 방법을 터득하고, 또 한해 실패하고 다음해 터득하는 일을 되풀이했다.

배를 이고 시골 장으로

육체적으로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부부는 행복했다. 

그런데 막상 농산물이 나오니 시골 생활은 고통으로 변했다. 판로 걱정이 컸다. 당시 저온창고가 없었던 부부는 수확하면 바로 내다 팔아야 했다.

주위에서 하는 대로 공판장에 내갔더니 완전 헐값이었다. 못생기거나 상처가 있는 배는 이마저도 못 받았다.

고민에 빠져 있던 아내 한 대표가 나섰다.

"내가 고생하며 생산한 상품 가격을 내가 매기지 않고 중매인이 매기는 것이 억울했어요. 그래서 인터넷으로 지역 장날을 검색해서 장날마다 팔러 다녔죠. 도내 장날은 거의 다 가봤어요."

시골 장에 나 앉았는데 처음에는 부끄러워 "배 사세요" 한마디를 못했다. 얼굴도 못 들고 눈물만 났다. 다음날부터는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장에 나갔다.

"주위 사람들이 얼굴을 다쳤느냐고 묻더군요. 어느 아주머니가 얼굴 좀 보자고 하기에 마지못해 마스크를 벗었더니, 예쁜 얼굴을 왜 가리느냐며 배를 훔쳐온 것도 아닌데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장터 판매는 공판장에 내놓을 때보다 이익이 2배가량 됐다. 그렇게 아내는 한동안 시골 장터를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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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희 씨./이원정 기자

카메라가 농기계로

그러다 우연히 사천시 농업기술센터에서 하는 사이버 교육을 받게 됐다. 당시 부부는 함께 교육이 있으면 빠지지 않고 다녔다.

경상대 최고경영자 과정에도 다니면서 인터넷 판매에 눈을 떴다. 새로운 세계였다. 부부는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농야학을 했다.

"농업기술센터에는 교육이 늘 있습니다. 농업기술원에도 필요한 교육이 있고, 농촌진흥청에도 분기별로 교육이 있죠. 처음에는 같이 다니다가 이후에는 IT 쪽은 아내가 전담하고 있습니다."

2009년 농업기술센터의 도움으로 홈페이지 구축사업에 참여,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그러는 한편 다른 사람들의 인터넷 카페에서 수확량의 거의 70%가량을 판매하기도 했다. 흠집과일까지 모두 팔아버린 것이다.

상처 난 배를 사진으로 찍어 이런 이유로 반값 판매한다고 글을 올리니 가정용으로 저렴한 가격의 배를 원하는 사람들이 주문했다. 농장 모습 등도 사진으로 올렸다. 소비자들의 신뢰를 위해서는 사진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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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연옥 씨./이원정 기자

카메라가 새로운 농기계가 된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내가 농사지은 것을 내가 가격을 정하고 판매한다는 꿈같은 일이 현실로 다가왔죠. 공판장 시세보다 좋은 가격으로 판매하니 농사짓는 보람도 느꼈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이 모든 것이 농업기술센터의 교육이 아니었으면 꿈도 못 꾸는 일이었습니다. 맞춤식 교육은 농민들에게 가뭄에 단비와 같습니다."

명품화 퇴비로 고품질 배 키우기

아내가 온라인에 집중하는 사이 남편은 수형 가꾸기 등 재배 기술을 높이는 데 매달렸다. 2009년쯤 저농약 인증을 받았다. 배는 다른 작물보다 친환경 재배가 까다로운 작목 중 하나다. 이웃 농가들은 꺼렸지만, 안전하고 차별화된 1등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저농약 재배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러 교육에 박 대표의 꼼꼼한 성격이 더해지니 수형을 가꾸고 병충해를 잡으며 배나무를 키우는 데 점점 노하우가 쌓였다. 

배누리 농장의 배는 성장촉진제를 쓰지 않았는데도 아주 크다.

"사천은 바닷가라 불가시리가 많습니다. 사천시 해양수산과에서 불가사리 청소를 해서 무상으로 줍니다. 이것을 우분과 함께 숙성해 다음해 쓸 명품화 퇴비로 만들어 고품질 배를 생산합니다. 이걸 쓰면 당도와 크기가 다 좋습니다."

고품질 배의 또 다른 비결로 박 대표는 겨울 가지치기부터 꽃 솎기, 열매 솎기 등 모든 과정에 충실한 점을 꼽았다.

좋은 열매를 두고 나쁜 열매를 없애는 열매 솎기(적과) 과정이 결정적이라 할 수 있다. 꽃눈 하나에 7~8개 열매가 열리는데, 위치나 모양 등을 보고 키울 열매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없애야 한다. 20개 눈 중에서 열매 1개 정도 남긴다.

땅도 중요하다. 제초제를 쓰지 않고 품이 많이 들어도 직접 예취기로 풀을 베어 낸다.

배누리 농장의 배는 나무에서 충분히 맛을 들인다. 조기 수확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다.

"올해 경우 조생종인 원황은 9월 초에 수확했습니다. 8월에 조기수확 한 사람은 상자당 10만 원 이상도 받았다는데, 그러면 맛이 없어요. 제맛 들여 맛있게 해서 고객에게 보내야 신뢰가 쌓이고 재구매가 일어납니다."

만생종인 신고는 10월 중순 수확했다.

일생의 '적', 태풍

귀농 12년. 힘든 고비는 많았지만 현재까지 빚이 없는 것을 부부는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인부를 쓰지 않고 부부가 같이 일을 하고, 밭 한쪽에 심은 매실나무에서 봄에 수확한 매실을 팔아 배 봉지 구입비로 쓴다. 제초제 대신 1년에 5차례가량 예취기로 직접 풀을 벤다.

그런데 자연재해 앞에서는 이들의 노력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박 대표를 바다에서 내쫓은 태풍은 산까지 쫓아왔다. 배 농사의 제일 큰 문제는 바로 태풍이다.

"배는 무거워서 8~9월 태풍이 오면 피해가 큽니다. 2년 전에도 태풍 때문에 배가 90%가량 떨어지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태풍은 비록 소멸해도 자기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 등으로 농가에 피해가 발생합니다. 판매는 자신 있으니까 기상재해가 제일 큰 애로입니다. 농사를 실컷 지어놓고 태풍으로 다 떨어져 버리면 진짜 허탈합니다."

교육농장으로 6차 산업화

아내는 귀농 전 일본어를 배웠었다.

"부산에서 살 때 NHK방송을 보니 학교에서 나락을 심어 키우고, 수확하면 아이들과 밥을 해먹더군요. 나도 촌에 가면 저런 걸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바로 교육농장이더군요."

귀농과 동시에 차근차근 준비했다. 제일 처음 준비한 것은 '유산양'이었다. 젖을 짜는 산양. 배누리교육농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방문객을 제일 먼저 맞는 것은 길 한쪽에 메어 있는 유산양이다.

또 몇 년 전 한 농민 모임에 갔다가 '백봉 오골계' 8마리를 얻었다. 그것을 직접 번식시켜 현재 250마리에 이르렀다. 

백봉 오골계는 배 과수원 울타리 안에서 배와 함께 산다. 거위 2마리와 오리 1마리도 오골계와 함께 방사했다.

이 모든 것이 교육 프로그램 재료가 된다.

농장에서는 배뿐 아니라 키위와 블루베리도 키운다. 체험객들에게 농작물 재배·수확 체험과 함께 백봉 오골계와 유산양 먹이주기도 하게 한다. 또 파워포인트 자료 등으로 유정란이 어떻게 생기는지, 백봉 오골계 부화는 어떻게 하는지, 병아리는 며칠 만에 알에서 깨어나는지 등을 보여준다.

교육농장에는 어린이집이나 학교, 기업체, 교사 등이 단체로 체험하러 오기도 하지만 소규모 가족 단위 체험객들도 온다.

인터넷에서 검색하거나 체험 만족도가 높다는 입소문을 타고 방문하는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한두 가족이 오면 솔직히 귀찮기도 했습니다. 농장일이 많은 데 한 가족에게만 매달리기 힘들기도 하고요. 그런데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귀찮거나 싫은 일이 아니라 내 농장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릴 수 있는 홍보라고 생각하고 한 가족이 와도 농장 모습을 성심껏 보여주려고 했더니 그게 모두 소득으로 연결됐습니다."

제2의 상품으로 명품 유정란 계획

부부는 농장 규모를 더 늘릴 생각은 없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부부 두 사람의 손길이 정성껏 미치기에 이 규모는 적절하다고 본다.

"고객 감동을 시키는 방법은 결국 좋은 상품을 보내주는 겁니다. 부부 노동력으로 정성껏 키우면 확실히 다릅니다. 농사 규모도 판매 규모도 이 정도가 딱 적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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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희 씨./이원정 기자

현재 배누리 농장의 수확물은 추석과 설날에 각각 30% 정도 판매되고, 학교 급식으로 30%, 그리고 10% 정도는 간혹 공판장에 나가기도 한다. 즉 90% 이상을 직거래로 하고 있다.

학교 급식 납품을 한 지는 3년가량 됐다. 친환경과 저장창고 등 여러 요건을 갖추고 있기에 가능했다.

열심히 저농약으로 친환경 재배를 하지만 고객들이 잘 알아주고 가격을 훨씬 높게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저농약 재배는 직거래 고객들의 신뢰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인데다, 박 대표 부부의 고집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년 말 저농약 인증 제도가 종료되는 것이 박 대표의 걱정이다. 

"정책적으로 저농약 인증을 없애고 유기농과 무농약, 그리고 GAP 인증만 한다는데, 배는 무농약 재배하면 좋은 상품이 안 나와 경제성이 떨어집니다. GAP(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의 우수농산물 인증제도) 인증이 있지만, 이는 선별장이나 현대화된 작업장 등 요건이 까다롭죠. 사람도 감기에 걸리면 약을 먹어야 하듯, 적시에 적절하게 허가받은 약(작물보호제)만 사용해서 정상적인 상품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유통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농장 규모는 유지하면서 제2의 상품을 만드는 것이 부부의 계획이다.

당장 생각하고 있는 것이 명품 유정란이다. 배 밭에 방사해 놓은 오골계 개체수를 늘려 유정란을 만들 계획을 하고 있다.

제품 문의 010-8517-4007.

<추천이유>

◇서기태 사천시농업기술센터 농촌관광담당 = 배누리농원 박진희·한연옥 농장주는 전자상거래와 교육농장을 운영하는 강소농입니다. 박진희 농장주는 친환경 고품질 생산에 주력하고, 부인 한연옥 씨는 농장에서 생산된 모든 농산물을 홈페이지 및 블로그 등의 SNS를 통해 소비자 직거래로 높은 가격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 2012년에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주관하는 제3회 친환경 인증 농식품 명품대회에서 배부문 최우수를 수상하기도 한 선도적인 농업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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