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하고 록(Rock) 좋아하는 외과의사

'서른에 죽어도 아깝지 않게 하고 싶은 대로 하자'가 예전 신조였다고 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건 지금도 그 기질은 여전해 보인다는 것. 최원호(40) 씨는 SNS를 통해 사회문제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 의견을 나눈다. 지금은 아니라고 하지만 록그룹 활동을 했다. 평생 음반 하나, 소설 하나는 내놓아보자는 목표가 있기도 하다. 선입견을 보태 말하면 '의사'스럽지 않은 감성의 소유자. 하지만 의사가 되어보니 의사 일이 아주 재밌다고 말하는 천생 의사. 최원호 씨를 얼마 전 옮긴 일터인 마산의료원 외과 진료실에서 만났다.

타고난 밝음

첫인상은 '밝다.'였다.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듯했다. 스스로도 거절당하는 데 두려움이 없다고 말했다.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요. 같은 문제에 대한 다른 생각을 만나면 재밌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고요. 또 궁금한 건 꼭 확인해야 풀리는 성미예요. 예전에 연애할 때도 그랬어요. 좋아지면 꼭 얘기했어요. 받아주고 안 받아주고는 나중 문제이고. 거절당하더라도 언젠가 그 사람이 힘들 때 누군가가 자기를 좋아했다는 기억이 위로가 되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하면서요. 감정을 그냥 흘리는 것보다 훨씬 나은 태도라 생각했죠. 자존감을 높게 키워주신 부모님 덕이라 생각해요."(웃음)

특히 아들의 자유로움을 믿어 주셨던 아버지가 최 씨에게는 든든한 기둥이었다.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을 했어요. 나서서 하겠다고 하니까 교감선생님도 학생 주임 선생님도 저를 좀 꼬아서 보셨어요. 그때 1, 2학년 때 친했던 선생님들이 대거 전근을 가셔서 학생 주임부터 다 바뀐 시기여서 더 그랬었던 것 같아요. 회장 되고 처음 한 일이 성격대로 다른 학교 회장들과 모임을 만드는 거였어요. 사실 여학교 회장들이 너무 궁금했었거든요. 기존 행사들을 모아 학교 축제를 만드는 것이 제 공약이었는데 다른 학교에서 이미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보를 좀 얻으려고 했던 바람직한 의도도 약간은 있었고요. 그런데 당시에 '마창연합'이라고 고등학생들의 비밀 정치동아리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걸 색출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는데 교감과 학생 주임이 강한 심증을 가지고 제게 모임을 만들었느냐고 물었고 저는 별생각 없이 그렇다고 했죠. 학교에서는 그럴 줄 알았다며 퇴학이 거론되고 아버지가 학교에 불려 오시게 됐어요. 아버지는 절 믿으셨죠. 학생주임 등과 하신 대화를 뒤에 전해 들었는데, 애가 너무 가볍지 않으냐는 말에 아버지가 가벼운 것이 아니라 밝은 거라 하셨다더라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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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호 마산의료원 외과 과장./김구연 기자

전 과목 F, 의사 안 하려고 했다

최 씨는 자신을 의사라고 소개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직업은 정체성의 한 부분일 뿐인데 사람들은 생각보다 크게 직업에 비추어 자신을 바라본다고 했다. 하지만 록을 사랑했던 자유로운 청년이 이 직업을 택한 과정이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도 의사셨고 형도 지금 의사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의사를 하는 것에 누구의 영향도 없었다고 최 씨는 말했다. 오히려 집에서는 반대를 했다고.

"선배들이 왜 의사를 택했다고 물으면 선생 되는 데 실패해서 의사 선생이 되려고 한다고 말했어요. 삼수를 했는데 대학갈 때 점수 맞춰서 의대에 원서를 내겠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엄청 말리셨어요. 놀기 좋아하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요. 예과 2년 동안은 음악 하며 즐겁게 지냈는데 본과 올라가니까 해부학실습을 하잖아요.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요."

최 씨의 페이스북에는 동물실습을 했던 어느 날의 기억을 옮긴 글이 있다.

이 녀석, 유난히 사납다. 다른 조는 벌써 털을 깎고, 배를 가르고, 뼈를 부수며 바쁜데 우리 조는 아직 우리에서 꺼내지도 못했다. 어디서나 이런 놈들은 있기 마련이다. 쉽사리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꾸역꾸역 버텨내는 놈들이. 고양이에게라고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그런 의지 하나 없을 것이냐. 하지만 저 놈은 그래도 좀 심하다. …결국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발톱마저 빠져 버린다. …내 얼굴을 겨냥해 거세게 날아오른다. 나 또한 만만치 않다. 곧 목줄을 당겨 땅에 내동댕이친다. 그리곤 목을 움켜쥐어 버린다. 옆에서 대기하던 놈이 심장에 깊숙이 주사를 놓는다. 다른 고양이의 두 배 양이다. 하지만, 끝내 이놈의 저항은 만만치 않다. 같은 양으로 세 번을 더 놓고야 겨우 손아귀에서 긴장이 줄어든다. 

조금씩 숨이 잦아든다. 생명이란 이런 것일까? 이렇게 잦아들면 죽는 것일까?

내게 있어 이 실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곧 그토록 거셌던 저항의 이유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포르말린 냄새만 맡아도 견딜 수가 없었어요. 화장실에서 실습 안 하겠다고 혼자 훌쩍이다 도망간 기억도 있는데 외과 하며 생사람 배 째서 먹고살고 있으니 인생이란 참 묘하네요.(웃음) 삼수를 했기 때문에 휴학계를 내면 바로 군대에 가야 하더라고요. 그래서 휴학계도 안내고 집에도 얘기 안 하고 그냥 놀았어요. 전 과목 F에 학점이 0.0이 나왔죠. 그랬는데 전산상 오류인지 왠지 2학년 등록금 고지서가 나왔더라고요. 아버지는 학점 그런지 모르고 등록금을 내셨고 어쩔 수 없이 학교로 돌아가서 좀 다녔죠. 그러다 적응도 안 되고 해서 군대에 갔어요."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날 아버지가 물었다고 했다. '니 음악 할래. 공부할래.'

"실망 많이 하셨을 텐데 그래도 선택지를 주시더라고요. 기타 부수고 하셔야 하는데.(웃음) 학교는 다녀야겠다 싶어서 복학하겠다고 했죠. 복학해서는 공부를 진지하게 했어요."

록(Rock) 했던 의사

인턴과정 시작 후 병원 일에 재미를 느끼며 음악과 거리가 생기기는 했지만 의대 졸업 후 실용음악과 입학까지 다시 생각했을 정도로 진지하게 고민했었다고 했다.

"원래 노래를 좋아했는데 직접 부르고 싶다는 생각은 고등학교 3학년 때 'Queen'의 'Bohemian Rhapsody'를 알고 나서였어요. 야간 자습 마치고 새벽에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길 한복판에서 땡고함 지르고 그랬었어요. 친구들은 쪽팔린다고 도망 다니고요."

대학은 경북대학교에 갔다. 마침 의학과에 록그룹이 있었다. 기숙사로 짐을 옮기자마자 연습실에 놀러 갔는데 학생회관 지하로 들어가는 어두운 계단을 디뎌 내려갈 때마다 점점 더 커지던 연주 소리. 덩달아 쿵쾅거리면 심장 소리를 아직 생생히 기억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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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졸업공연./본인 제공 사진

"선배들이 노래 못한다고 안 뽑아 주려던 걸 제가 너무 열심히 하니까 성격이 좋아 뽑는다고 그랬어요. 1년 후 정식으로 무대에 섰는데 선배들이 깜짝 놀랐어요. 사실 가장 놀란 건 저였어요. 제가 그런 끼가 있는지 저도 몰랐으니까요."

그 뒤로 학교에서 제법 유명해졌다. 라디오에 소개됐고 지역 레이블에서 음반을 내보자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리 진지하지 않았었다. 유명한 곡들을 똑같이 따라하는 밴드라 음악적 소양도 없었고 당시 장거리 연애를 하느라 학교가 있는 대구와 서울을 오가기 바빴다고 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음악을 두고 공부에 파고들려니 늦은 아쉬움이 자꾸 발목을 잡았다.

"마저 해보고 싶었어요.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따면 한 단락은 지은 거니까 음악을 더 해보자 싶었어요. 인턴, 레지던트 안 하고 실용음악대학을 들어가려고 했죠. 그때 인턴 원서 접수 마감하는 날이 금요일이었는데 금요일 밤에 마산에 왔어요. 접수 기간이 끝났다고 다음날 여행을 앞둔 어머니께 말씀드리니까 여행가려고 싸놓은 짐을 가지고 조용히 나가시더라고요. (웃음) 마산삼성병원에 친구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저렇게까지 하시는데 원서라도 내보라고 하더라고요. 삼성병원은 다음날까지 신청을 받는다고요. 그래도 시간을 맞출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병원에 전화를 하니까 늦게라도 내라고 하시더라고요. 덜컥 합격을 해서 '오리엔테이션'에 갔는데 같은 조 사람들이 재밌었거든요. 인간관계가 생기니까 병원에 정을 붙일 수 있게 되었고 인턴을 하다 보니 예상외로 이 직업이 저한테 맞더라고요. 환자를 대하는 게 좋았고 그렇게 해부학실습 싫어했으면서 외과가 잘 맞더라고요. 저한테 맞는 일인데 그동안 거부하고 있었구나 싶었죠."

음악을 '업'으로 삼으려던 생각은 그렇게 끝났지만 여전히 최 씨에게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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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졸업공연./본인 제공 사진

"그렇게 미련이 남았기에 아직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동아리 선후배들과 가끔 연습하고 공연한지도 10년 째예요. 사실 연습하고 같이 어울려 술 먹는 재미가 크기는 하지만요.(웃음) 취미 이상은 아니에요. 그 이상 재능도 없고요. 음악을 통해 가장 크게 얻은 것은 록이 제 삶의 태도가 되었다는 것. 저항은 좀 거창하고, 반항이죠. 기존의 식대로 꼭 그렇게 해야 하냐는 물음을 간직하고 살아요. 요즈음 본 '서칭 포 슈가맨'이란 영화에서 가장 감동 받은 부분도 그 맥락이에요. 남아프리카의 사회 변화에 음악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슈가맨이 정작 자기 나라인 미국에서 무명가수로 살고 있다는 줄거리예요. 나중에 밝혀진 그의 삶이 그의 노래와 하나 다르지 않다는 것, 음악이 곧 그의 삶이었던 모습에 무척 감명받았어요."

SNS 하는 것은 반항의 일종?

최 씨는 페이스북을 열심히 하는 편이다. 자신에게는 세상을 보는 창구이자 생각을 내뱉는 '쓰레기통'이라고 말했다. 의사로서는 과학 저널에 소개된 내용을 실시간으로 받아 보고 새로운 발견과 이론을 소개하고 설명해 주는 사람들을 통해 갖가지 지식을 주고받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하지만 최 씨 자신의 페이지에 올라오는 글은 주로 사회문제에 대해 생각을 표현하는 글이다. '페친'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상반된 입장을 서로 펼칠 때에는 가감 없이 댓글로 의견을 나누기도 한다. 타임라인 중 갑자기 몰린 친구 신청이 부담스럽다는 문장이 눈에 띄었다.

"국회의원 안홍준 씨가 세월호 유가족 단식을 두고 한 말 때문에 쓴 글 때문이에요. 의사가 의사 출신한테 부끄럽다고 하는 말이 사람들 코드에 맞았나 봐요. 조금 화제가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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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호 마산의료원 외과 과장./김구연 기자

외과의사로서 겪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경고한다는 건 위험을 미리 알려 드린다는 의미이고, 그건 제가 환자에게 일어날 위험을 이미 예측하고 있다는 것도 됩니다. 이 경고가, 예측된 문제들에 대해 설령 생기더라도 최선을 다해 다음 단계로 가겠다는 약속이라 설명을 드렸을 때 그걸 방어적이라 폄훼하는 환자나 보호자는 여지껏 단 한 명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 이해가 안됩니다. 아니, 더 나아가 고향인 마산이, 천직이라 생각했던 의사라는 직업이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안홍준 의원님, 당신의 그 사적인 한마디 때문입니다. 진정 폄훼할 의도가 없었다면 유가족들이 원하는 세월호 특별법으로 그 진정을 보여주십시오!

최 씨가 30여 년을 산 경상도와 학교를 다녔던 대구는 보수적인 성향이 짙은 지역이다. 또 얼마 전 터를 잡은 의료원의 특성상 온라인에서 정치 성향을 표출하는 것이 망설여지지는 않을까 궁금했다. 혹시 다른 의사들과 부대끼는 일이 있지는 않을까?

"병원에서는 아직 그런 일이 없었는데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죠. 페이스북을 사회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배설구로 삼다 보니 친한 친구에게 차단당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이라 대신 성향이 맞는 다른 인연들을 알게 되었어요. 친구들과도 이런 사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적당한지 감이 생겼고. 글을 올리면서 더 치열하게 고민하기 때문에 내 생각과 가치에 대한 확신이 생긴 것이 오히려 가장 큰 수확이에요."

4대강 사업과 용산 참사

원래는 정치도 잘 모르고 관심도 없었다는 최 씨. 사회 문제를 자기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건 이명박 대통령 때문이라고 얘기했다.

"사실 그전까지는 투표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어요. 대학 때 풍물패나 봉사동아리 선배들과 친해서 사회문제에 관해서 얘기 나눌 기회는 많았지만 꼭 그렇게만 봐야 하냐며 따지는 까다로운 후배일 뿐이었죠."

<태백산맥>이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을 읽어 소위 '빨갱이'나 데모를 하는 사람들도 다 저마다 간절한 사정이 있다고 어렴풋이 인식하는 정도였고 정치나 사회 문제가 한 번도 진지하게 자신의 문제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낀 것은 4대강 사업, 용산 참사, 진주의료원 폐업, 밀양 송전탑 사건, 의료민영화 문제 등을 지켜보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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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호 마산의료원 외과 과장./김구연 기자

"아버지 친구분이 운영하시던 병원을 잠깐 맡았던 적이 있어요. '정진택 의원'이라고 좀 잘되던 병원이었는데 원장님이 돌아가셨어요. 그때 1년 반 정도 제가 진료를 하면서 시간 여유가 좀 있었어요. 그 시기에 이것저것 이슈에 관심도 두고 적극적으로 정보도 찾아보고 하다 보니까 계속 더 알아보게 되더라고요."

갑갑한 마음에 같은 목소리를 내는 의사들을 찾다 '인의협'(인도주의실천 의사협의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4대강 사업과 용사참사가 계기였어요. '꼭 저런 식으로 해야 하나?' 이런 의문이 생겼죠. 그래서 이명박 각하께는 큰 고마움을 가지고 있어요. 나를 이 길에 들여 놓으셨으니.(웃음) 같은 생각을 하는 의사들을 만나고 싶어서 인의협에 가입했는데 음악 하는 선배들에게 얘기하고 많이 혼났어요. 가입 사실이 밝혀지면 주변의 의사 친구들 중 70%는 등을 돌릴 거라면서요."

굳은 권위는 썩는다

최 씨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회문제들이 굳어있는 권위가 부패하여 생기는 것이라 여긴다고 했다.

"멈추는 순간 굳고 굳은 건 썩는다고 생각해요. 세월호 사건만 봐도 그렇잖아요. 안타까운 목숨이 사그라지는 장면을 전 국민이 실시간으로 지켜봤어요. 함께 마음 아파하며 끓어올랐던 마음들이 어느새 이런저런 이유로 벌써 다 굳어버렸어요. 조사해서 처벌도 하기 전에요. 끓어올랐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섞이지도 못하는 우리 모습. 바뀌어야죠. 제가 SNS에서 하는 반항도 그런 거예요."

같은 맥락으로 의사에게 부여되는 권위도 스스로 낮출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진료실에서 의사에게 생기는 권위도 의사니까 자동으로 주는 게 아니잖아요. 환자가 저를 선택해 줘서 생기는 거죠. 의사로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픈 사람이 내 손을 잡아 줄 때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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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호 마산의료원 외과 과장./김구연 기자

결혼생각이 없었다던 최 씨는 평균적인 결혼 나이보다는 조금 늦게 결혼을 했고 지금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술과 사람을 좋아하지만 아이가 생기고 나서 술자리를 많이 줄였다고 웃으며 말하는 최 씨.

"마흔이니 이제는 철들어야 하지 않나 싶을 때가 한 번씩 있기는 해요. 하지만 아직은 '록'스럽게 살고 있고, 그게 더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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