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으로 빚은 상처가 아물어 용기가 되길"

지난 7월 창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경남국제아트페어'에서 만난 인물 조각상 '눈물'은 인상 깊었다.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 뒷걸음칠 정도로 아주 사실적인 흉상이었다. 얼굴에 패인 주름과 모공이 드러난 피부, 정리되어 있지 않은 눈썹, 핏줄이 선명한 눈동자까지. 마치 산 사람 같았다. 당장 눈을 깜박이고 말을 할 것 같은 중년의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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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빈 作 '눈물'.

누가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을까 궁금했다.

한 달 후 창원 그림갤러리(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열린 'YKA #1'전에서 유달리 손과 발이 큰 인물 조각상을 만났다. 세밀한 표현을 배제한 아주 단순한 모습.

보고 있자면 마음이 있다는 내면이라는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이에 대해 감성빈(31) 작가는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

"왜 사람 조형물이냐고요? 사람 관계 속에서 상처를 입히고 받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통해 다시 힘을 얻게 되잖아요. 제가 낯선 사람을 만나면서 마음의 문을 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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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빈 作 '드로잉'.

축사 옆 미술관(작업실)

감성빈 작가는 지역에서 주목받는 젊은 작가 중 한 명이다. 지난해부터 본격 활동을 시작해 올해 경남국제아트페어에 참가하고 갤러리 전시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섬뜩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인물 조각상은 그의 이름을 쉽게 기억하게 했다.

9월 10일 오후 2시. 늦여름 기세가 무서웠던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창원 북면에서 그를 만났다.

"근처에 카페가 있어요. 인터뷰는 그곳에서 진행하죠. 작업실은 냄새가 지독해요. 약품 냄새며 바로 옆 목장까지. 인터뷰하기 어려울 겁니다."

창원 북면 대산리에 그의 작업실이 있다. 창원역에서 20분쯤 차로 달리면 나오는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젖소 목장을 운영하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작업실은 축사 바로 옆이다. 오전 오후 시간 맞춰 소먹이를 주고 목장일을 해야 하는 그의 형편상 집이 곧 작업실이다. 널찍한 작업실 한 벽면엔 그가 작업한 흉상들이 가득 있다. 다른 벽면엔 한자로 빼곡하게 적힌 두꺼운 책들이 꽂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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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빈 조각가./김구연 기자

요즘 그는 허연 조형물에 색을 넣는 작업을 하고 있다. 탁자 위에는 물감과 붓뿐만 아니라 가스와 공구, 거푸집 등이 어지럽게 놓여있다.

그가 붓을 들고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선풍기가 연방 돌아가고 있지만 한낮 뜨거운 기운은 작업실을 한껏 데운 뒤였다. 그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힌다.

작업실에 걸린 아버지 초상화를 유심히 보는 기자에게 그는 그만 나가자고 재촉했다.

"카페는 차 타고 금방이에요. 가시죠."

공장 노동자, 06학번 새내기, 중국 유학

창원 의창구 북면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감성빈 작가. 그는 어렸을 적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여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고 작가의 길로 접어든 공식에서 한참 벗어난다. 창원기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해 엘리베이터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창원공단에 있던 대기업 하청업체였어요. 죽어라 일하는데 월급은 적고 대우도 제대로 못 받았죠. 노동자들이 일하다 다쳐도 산재 인정을 못 받아요. 무기력하고 비참한 현실을 보자니 곧 내 미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서워졌어요."

이 암울한 청춘은 어릴 적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그를 되살아나게 했다.

"형님과 누님이 만화 보는 걸 굉장히 좋아했어요. 당시 집에 아이큐 챔프, 소년 챔프, 단행본까지 쌓여 있었죠. 특히 형님은 직접 만화를 그렸어요. 지금 기억하기로도 만화 실력이 상당했어요. 저도 어깨너머 따라하다 보니 자연스레 취미가 됐어요. 그렇다고 미대에 꼭 가야겠다는 마음은 없었어요. 그런데 문득 타인에게 인정받았던 그때. 그림을 그렸던 어렸을 때가 생각나더군요."

그는 엘리베이터 부품 공장을 떠나지 않았다. 4년제 대학에 진학해 미술 교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이룰 때까지.

2년간 창원공단과 미술학원, 독서실을 오가는 강행군을 했다. 공장 일 탓에 학원 수업을 제시간 받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항상 맨 마지막으로 독서실을 나왔지만 힘들지 않았다. 일터 곳곳 붙여진 메모지에는 암기해야 할 것들이 잔뜩 있었지만 행복했다.

2006년 3월. 경남대 미술교육과 06학번 새내기가 됐다.

그리고 운명적인 만남. 소조를 가르치는 임형준 교수를 만났다.

그는 새내기였지만 임 교수의 스태프로 참가했다. 한 학기 동안 교수를 따라다니며 작업하고 다른 작가를 만났다. 다른 세상이었다.

"작업하는 교수님이 멋져 보였고 작가들과의 술자리도 왠지 딴 세상 같았어요. 손의 촉감으로 만드는 조각이 체질에 맞더라고요. 갑자기 교사가 아니라 작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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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빈 조각가./김구연 기자

문득 든 결심은 그를 유학길에 오르게 했다. 3일 만에 중국 유학을 결심하고 댓거리에 있는 유학원에 무작정 찾아가 중국 어학원부터 등록했다.

2006년 9월 중국 베이징행 비행기를 탔다.

직접 빚은 중국인만 1000명 정도

"아버지가 왜 중국이냐고 하시더군요. 기왕 갈 거 프랑스를 가지 하면서요."

지난 2005년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중국미술의 오늘'이라는 전시가 열렸다. 당시 중국에서 열린 '전국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작품 중 우수상 이상의 수상작품 141점을 엄선한 자리였다.

그는 그날을 잊을 수 없다.

"미술관 관람 자체가 쑥스러울 때였는데 굉장히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강렬한 색채와 풍부한 묘사에 매료돼 전시장에 한참 머물렀죠. 이날 강렬했던 하루가 중국 유학을 재촉한 셈이죠. 다들 왜 하필 중국이냐는 말을 하더군요. 그러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전후로 중국 작가들이 한국에 많이 소개돼 지금은 인식이 많이 변했어요. 다행이죠."

반년 만에 어학원을 졸업한 그는 중국 베이징 중앙미술학원을 목표로 다시 입시공부를 시작했다. 중앙미술학원은 미술만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아카데미로 한국예술종합학교 같은 곳이다.

실습이 문제였다. 조소과에 진학하려면 무엇이든 만들어야 했다. 그중에서도 인물이었다.

그는 모델료가 600원이었던 이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매일 인력시장에서 모델 4명을 추천받았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사람을 빚었다.

"유학 생활 오 년째 힘든 시기가 오더군요. 아무리 가까워지려 해도 이방인이라는 벽은 높았습니다. 모든 것이 버거워 사람들을 피해 다녔어요. 그렇게 반년을 사니 뭐든 해야겠다 싶었어요. 인력시장에 나가 모델을 구해 두상을 흙으로 빚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손을 움직이고 싶어 시작했던 일인데 묘한 감정이 들더군요. 일면식도 없던 그에게서 왠지 위로가 되고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가족을 떠나 도시로 온 그들의 눈에 아픔이 보였어요. 같은 아픔을 간직한 자와 대면하니 닫혀있던 마음이 열렸어요. 그때 감동으로 사람이라는 모티브에 더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펜으로 그리고 흙으로 빚은 중국인은 1000명 정도. 그들의 모습 그대로 빚어냈다.

유학 시절 임형준 교수가 보내준 편지도 지금까지 조각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그는 사람이 곧 희망이라는 믿음을 가슴에 새겼다.

이후 개인 스튜디오를 차리고 중국 전국대학생조각대회에서 입상하는 등 베이징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갤러리 곳곳에서 연락도 오고 있었다.

하지만 시련도 함께 찾아왔다.

오토바이 사고와 귀국, 그리고 가족과 

2012년 겨울 느닷없이 찾아온 오토바이 사고.

숙소와 학교 거리는 부산과 창원만큼 된다. 그는 생활비를 아끼려고 오토바이로 통학했다. 어느날 가로등이 꺼진 어두운 거리, 그는 맨홀을 피하려다 미끄러지고 말았다.

부상은 심각했다. 구급차 3대를 옮겨다니며 병원에 실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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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빈 조각가./김구연 기자

그는 한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출국 심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왼쪽 눈이 함몰되고 퉁퉁 부은 그의 얼굴은 여권 사진과 너무나 달랐다.

"고향집에서 요양하고 다시 중국으로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부모님과 같이 목장을 운영하던 형님이 지난해 천국에 갔습니다. 지금은 제가 부모님 일을 도우며 작품 활동도 같이 하고 있지요."

그가 그림갤러리 'YKA #1'전에 내놓은 작품 4점은 그의 가족이다.

"제 가족들을 그려낸 것들이에요. 최근 형님을 천국으로 보내고 상실감에 젖은 우리 모습입니다. 그 상처가 주는 좌절감이 무거운 짐이 되어 하루하루가 고독하고 슬프지만 이기려고 애쓰시는 부모님을 보며 만든 작품입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표현되는 무기력하고 슬퍼 보이는 인간상은 인류 보편적인 감정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불가항력적인 상처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모습 말이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상처를 빚는다

지난 9월 14일까지 그림갤러리 전시를 끝으로 올해 일정은 없다. 하지만 작업은 매일 이뤄진다. 

그의 작업은 공정이 많은 편이다. 흙으로 인물을 빚은 다음 거푸집을 만들고 그 안에 레진(플라스틱)을 부어 굳힌다. 굳어진 조형물을 떼어 내 색채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모델의 감동을 극대화하려고 눈에 신경을 쓴다. 실제 눈에 가깝게 제작한다.

레진을 자주 쓰는 탓에 그의 손바닥은 하얀 껍질로 덮여 있다. 그 손으로 오전 6시 전에 일어나 목장에 나갔다 아침 식사 후 오후 4시까지 작품을 만든다. 다시 목장 일 끝내고 오후 8시까지 매진한다.

작가란 외로운 직업이라고 말하는 그는 최근 젊은 작가와 자주 뭉치고 있다.

창원대에서 우연히 노순천 화가를 만난 후 지역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과 알게 됐다. 함께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고 창동예술촌 내 갤러리 '스페이스 1326' 강대중 주인장을 만나 최근 그림갤러리에서 공동 전시도 열었다.

"순천이 형 작업을 좋아해요. 드로잉과 조각이 똑같은 혼연일체거든요. 삶 자체가 예술인 거죠. 부러운 부분이에요. 시골에서 혼자 작업하다 보니 스스로 이 길에 대한 의구심을 가질 때가 있어요.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할 때도 있고요. 그래서 또래 동료 작가들의 존재가 큰 힘이 됩니다. 서로 응원하고 힘이 떨어져 있을 땐 싫은 소리도 해주는 동지 같은 느낌이에요. 갑자기 귀국해 막막했는데 주위에 좋은 작가들 덕분에 힘을 많이 얻었어요."

감성빈 작가는 내년에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아직 구체적인 일정은 나오지 않았지만 작품 활동을 게을리할 수 없다.

그리고 중국에서 이루지 못했던 대학원 꿈을 한국에서 다시 도전한다. 창원과 부산 중 고민하고 있다.

그가 이제껏 우리에게 보여준 작품은 사람. 인터뷰 내내 놓지 않고 말하는 주제도 사람이었다.

"작가란 직업이 세상을 관찰하고 자기가 느낀 세상을 표현해야 하는데 지금은 상처와 슬픔을 그려냅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염세적으로만 바라보지 않아요. 어른의 욕심에 희생된 아이들을 보며 누구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듯 아직 사람이 사람일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표현하고 싶어요. 같이 아파하고 슬퍼하며 눈물 흘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정직한 조각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감성빈 작가.

오후 3시 뜨거운 햇살 아래, 유난 떨지 않고 과장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그를 보며 머지않은 미래에 꽤 괜찮은 작가가 되어 있을 그가 그려졌다.

"예전엔 먼 곳에 목표를 가졌는데 지금은 차근차근 밟아 가려고요. 하고 싶은 작업을 꾸준히 구상하면 미래엔 꽤 괜찮은 작가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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