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맑고 향긋한 술이 그리운 시간

파출소 앞 낡은 벽돌 건물이다. 얼핏 보기에도 일본식 근대 가옥 형태를 띠고 있다. 붉은 벽돌 굴뚝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남원시 인월면 인월양조장. '막걸리의 명인 송준수'라고 노란 간판이 대문 위에 달려 있다. 작은 동네에서 제법 번듯한 규모를 갖추고 술을 빚던 양조장이다. 마당을 슬쩍 들여다보니 더욱 놀랍기만 하다. 미닫이 유리문이 달린 마루며 마루 한 칸은 쪽문이 달린 계산대를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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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란 기자

인기척을 넣어도 주인은 나타나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는데 한 말들이 술통을 든 노인이 대문을 들어선다. 그리고는 주인장을 소리 높여 찾는다. 한참을 기다려도 주인은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제일 오래된 단골일 거요. 일주일에 한 번씩 한 말씩 사러 오니 요새 말로 우량고객인 셈이라요."

"한 말은 얼마라예?"

"한 말이 스무 병 정도 나오는데 만 팔천 원이라요. 한 병에 천 원이라는데, 말로 사니까 아무래도 좀 더 싸고 양도 주인 인심대로 꽉 채워준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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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란 기자

인월면 취암리에서 왔다는 김삼현(78) 노인과 두서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제야 양조장 주인이 들어선다.

"빈 막걸리통을 수거하고 오는 길이라요." 

인월양조장 송준수(65) 아재는 큰 자전거 뒤에 빈 막걸리통을 잔뜩 싣고 들어왔다. 

"못돼도 70~80년은 됐을 겁니다. 내가 여기서 한 지는 40년이 넘었지요. 14살 때 아영면에서 양조장 일을 시작했으니 50년이 훨씬 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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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란 기자

인월양조장은 여느 시골 양조장과는 달랐다. 규모나 시설을 둘러보면 번성했던 옛 시절이 한눈에 짐작된다. 제성실을 통해 들어가면 '뽁뽁' 소리를 내며 보글거리는 커다란 술항아리가 여러 동이다. 지금은 온기 없이 묵어있는 대문간 숙직실과 창고, 뒤란으로 이어진 일꾼들의 숙소…. 한때는 수십 명의 장정들이 들락거렸을 술도가였을 것이다. 

"인월은 물이 워낙 좋아서 옛날부터 술을 빚어도 향이 다르고 맛이 다르다 했어요. 예전에는 도가집도 있지만 새벽에 첫 물을 길어와 제사 때나 명절이면 집집이 술을 빚었습니다."

집집마다 장맛, 된장맛이 다르듯 술맛도 달랐다. 술을 빚는 방식이 달랐고 술 인심도 달랐다. 유신정권이 들어서면서 술을 빚던 풍속은 금지됐고, 마을마다 군데군데 있던 도가들도 사라졌다. 대신에 면 단위로 양조 허가를 받은 양조장이 성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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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란 기자

"더러 밀주를 담아 보관을 하다가 된통 당하기도 했지요. 순경이 술 치러 온다는 소리가 오면 술항아리를 들고 숨어다니느라고 뱅뱅이를 돌았으니까요. 술 치는 날이 제일 무서운 날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제사나 명절을 앞두고 새벽녘 가장 맑은 물을 길어 술을 빚는 아낙들도 없고, 인월양조장 문턱을 밟으며 술주전자를 들고 심부름 오는 아이들도 없다. 한여름이면 람천 물가에서 추렴 막걸리판을 질펀하게 벌이던 사내들도 찾아볼 수가 없다.

옛 주인도 손을 놓은 양조장을 송준수 아재는 지금도 혼자서 술을 빚고, 자전거로 배달한다. 배고프던 시절, 집안에 밥그릇 하나 덜려고 시작한 일이 평생 업이 됐다. 

지나는 길에 혹여 막걸리 한 통 사러 들어가면 아재는 맑은 술이 찰랑대는 바가지를 들이밀며 일단 술맛을 보라고 권할 것이다. 한 모금이 아니라 바가지째 쭈욱 들이켜야 한다고, 그래야 맛이 난다고. 제대로 된 술맛이 사람 사는 맛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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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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