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혈 노동운동가가 아파트 텃밭을 일구는 사연

7월 30일 오전 10시, 오전이지만 이미 도시는 불가마를 연상케 했다. 더구나 아파트 옥상은 더 말해 무엇하랴. 같은 시각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영동 동아2차 아파트 옥상에서는 한 중년의 남성이 땀을 한 바가지나 흘리면서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 더운 날 그는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옥상 텃밭, 아파트 주민공동체의 매개체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 김진필(51) 월영마을발전협의회장은 20평 남짓한 아파트 옥상 텃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물을 주고, 순을 치고, 청소를 하고 오이를 따고 있었다. 텃밭은 대충 큰 화분 몇 개를 얹어 놓은 것이 아니라, 패널을 짜서 흙을 채워 넣고 하우스 형태의 넝쿨 틀을 통해 식물을 체계적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아하, 오늘 기자는 엄청난 기술자를 만나는구나.

-아니, 이걸 선생님이 다 하신 겁니까?

“그게 아니고요. 2011년에 창원시의회에서 ‘창원시 도시생태농업 육성에 관한 조례’가 통과 됐습니다. 이 조례에 따라 이런 텃밭을 건물에 설치하고 싶은 주민들이나 단체에서 신청하면 최대 400만 원까지 지원을 해 줍니다. 지원된 보조금을 전문 설치업자에게 맡겼습니다.”

2.jpg
▲ 김진필 월영마을발전협의회장./임종금 기자

업자가 만들었다는 말에 살짝 실망을 했다.

-혼자서 지금 재배하고 계신가요?

“아뇨, 저를 포함해서 여덟 가구가 공동으로 재배하고 관리하고 있습니다.”

의아했다. 혼자라면 모르겠으나 아무리 20평 남짓한 텃밭에서 작물을 많이 수확한다고 해도 8가구가 먹기에는 턱없이 적은 양일 것이다. 도대체 이 일을 왜 하는가 싶었다. 일단 시원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솔직히 큰 소출이 나는 것도 아닌데, 억지로 더운 옥상에서 이 일을 하시는 게 선뜻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저도 이걸로 돈을 벌거나 우리 식구 먹거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요. 이게 우리 아파트 주민들의 공동체를 만드는 작은 매개체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하는 겁니다.”

아파트 주민 공동체라. 말은 많이 나왔다. 그러나 제대로 되는 곳을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하나마나한 소리’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제가 하동이 고향인데 어렸을 적 농사일이 몸에 배어서 그런지 흙냄새가 그립더라고요. 저 말고도 이런 흙냄새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5년 전에 아파트상가에 학원을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 분에게 이 얘길 했더니 현동에 남는 땅이 있으니 같이 해 보자고 하시는 겁니다. 여섯 식구가 했는데 같이 땅을 일구다 보니 정말 정 있는 공동체가 됐습니다. 이걸 아파트에도 적용시키면 좋겠다 싶어서 올해 열 식구를 모아 창원시에 옥상 텃밭 프로젝트를 신청했습니다.”

3.jpg
▲ 김진필 월영마을발전협의회장./임종금 기자

-그 열 가구는 어떻게 모으신 겁니까?

“제가 1998년 분양 받을 때부터 이 아파트에서 오래 살았고, 동 대표도 여러 번 했기 때문에 아파트 안에 친한 가정이 좀 있습니다. 그 분들에게 먼저 얘기를 하고, 그 분들이 추천해 주는 사람도 모았습니다. 그래서 딱 열 가구를 모아 창원시에 신청을 했습니다. 아파트 텃밭 공동체를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아파트에 보면 빈 공간 아무데나 자투리땅이 있습니다. 거기 혼자서라도 일구는 겁니다. 3~4평만 해도 제법 됩니다. 그러면 누군가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 사람하고 얘기하고 같이 일구다 보면 귀찮아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끝까지 같이 하면 그렇게 또 한 명의 우군이 생기는 겁니다. 이런 사람 3~4명만 모아도 뭔가 하나의 일을 할 구심축이 생기는 겁니다. 임 기자도 한번 해 보세요.”

오늘 처음 본 기자에게도 권한다. 분명 확신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열 가구가 돌아가면서 텃밭을 관리하십니까?

“화초를 하나 키우더라도 손이 많이 가는데, 이만한 텃밭을 키우려면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갑니다. 생각보다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왕 이렇게 된 거 모임을 만들자’고 하니까 부담을 느끼는 분도 계셨겠죠. 그래서 지금은 여덟 가구가 하고 있습니다.”

1.jpg
▲ 옥상 텃밭을 함께 가꾸는 주민(왼쪽)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김진필 월영마을발전협의회장./임종금 기자

그렇게 ‘동아2차 남새밭모임’이 만들어졌다. 

운동권 사람끼리만 어울려서야 되겠나

인터넷에서 ‘김진필’이라고 검색하면 그는 이미 유명인사다. 경남대학교 82학번(무역학과)인 그는 1990년에 대우자동차판매(이하 대우자판)에 입사한 뒤 1999년에는 대우자판노조 경남지부장, 2004년부터 2011년까지 대우자판 노조위원장을 하면서 사측의 구조조정에 끈질기게 싸워온 이른바 ‘노동운동 투사’다. 2008년과 2011년에는 구속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아파트 주민공동체 얘기를 하면서 텃밭을 일구는 모습은 조금 낯선 장면이다. 그간 어떻게 됐는지 물어봤다.

-무역학과를 나오셨는데, 대우자동차 판매는 솔직히 좀 어울리지는 않습니다.

“저는 양복입고 딱 얽매인 것이 영 불편했습니다.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사람들 만나는 이런 일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쪽으로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아파트 동 대표도 하셨고 노조위원장도 하셨는데, 원래 남 앞에 서시는게 체질이신가요?“

그 점에 있어선 정말 억울합니다. 1998년에 아파트 동 대표를 할 때도 처음 동 대표를 뽑기 위해 주민들이 모임을 하지 않습니까? 하필 그때 노조 로고가 새겨진 옷을 입고 갔습니다. 그러니 주민들이 보기에 뭔가 있어 보였나 봅니다. 정말 그 옷 때문에 떠밀리다시피 동 대표를 하게 된 겁니다. 대우자판 노조위원장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조의 힘이 약해져서 딱히 할 사람이 저 밖에 남지 않아서 위원장이 된 겁니다. 이상하게 사람들이 급할 때만 되면 저를 찾더라구요.”

4.jpg
▲ 김진필 월영마을발전협의회장./임종금 기자

사실이었다. 인터뷰 중에도 마산합포구 월영동송전탑협의회에서 역할을 맡아 달라는 요청 전화가 왔었고, 그는 완곡하게 거절하느라 진땀을 뺐다.

-사람들이 왜 ‘급할 때’가 되면 선생님을 자주 찾을까요?

“글쎄요. 제가 일을 맡았으면 어찌됐던 꼼꼼하게 하려고 하고, 원리 원칙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우자판이 어디로 매각됐습니까? 구조조정 문제는 끝이 난 건가요?

“한때 전 세계 모자 시장의 70%를 차지했다는 영안모자그룹에 매각이 됐습니다. 노조는 고용승계를 보장하라고 소송 중이고, 영안모자에서는 자신들이 책임질 부분은 아니라고 합니다. 법적으로는 이기지 못했죠. 대신 영안모자에서 대우버스 공장 생산라인에 최대 2년까지 계약직으로 보장한다고 합니다. 합의할 때는 제가 집행부로 있지는 않았고. 그런데 아시겠지만 2년 후에는 보장이 없어요. 매듭을 짓는 완전한 합의가 아니죠. 나중에 2년 후에 또…(투쟁을 해야 하는 상황).”

-선생님은 지금 생산라인에 안 계시는데, 그럼 새로운 일을 찾으시는 건가요?

“여러 곳에서 제안은 많이 들어옵니다. 좀 쉬면서 일은 찾아보려 합니다. 지금 월영마을 발전협의회장이니까 그게 당면한 일입니다. 부영건설이 한철 터 정화사업을 하면서 분진과 소음이 많이 일어납니다. 게다가 월영동을 지나는 송전탑 문제도 매듭지어야 하고, 또 메타세콰이아 가로수가 너무 웃자라서 인도나 하수관을 막는 일이 생깁니다. 이 문제도 해결해야 합니다. 또 마을 안에 도시개발공사 땅이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도 고민해야 합니다. 할 일이 많죠.”

-제가 보기엔 선생님의 행보가 여타 노동운동가와는 많이 달라 보입니다.

“저는 솔직히 성향 따지지 않고 동창회나 동호회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입니다. 제가 노동운동을 할 때는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모아서 해야 하지만, 아파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 그게 오히려 더 편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텃밭 같은 것을 생각한 겁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자유롭게 사람들과 어울릴 매개가 필요한 겁니다.”

5.jpg
▲ 김진필 월영마을발전협의회장./임종금 기자

-선생님께서는 10년 넘게 노동운동을 해 오셨는데요. 노동운동도 그렇고 진보진영 사람들끼리 왜 그렇게 자주 갈등하고 분열하는 지 궁금합니다.

“제 생각에는 늘 같이 자주 눈에 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맨날 보는 사람이니 쉽게 싸우는 겁니다. 새누리당과는 안 싸우죠. 자주 못 보니까요. 우리끼리는 다르다고 싸우지만 대중들이 보기에는 다 똑같은 한 통 속으로 봅니다. 어느 세력이건 간에 대중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세력은 실패합니다. 이제 좀 성향이 다르고, 코드가 안 맞더라도 대중 속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이 많이 필요합니다.”

아파트 주민공동체. 말은 참 쉽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다. 까짓거 아파트 주민 중에 코드 맞는 사람,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만들면 모임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쉬운 길을 포기하고 백지상태에서 하나하나 길을 찾고 있었다. 그의 도전이 성공할 경우,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또 다른 돌파구를 찾아낸 것이다. 꾸준히 그의 행보를 지켜보기로 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