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대, 486이 다 내려놔야 한다

영화 <부러진 화살>의 실제 주인공. ‘인권변호사’라는 칭호를 거부하고 스스로 ‘노동변호사’로 자처하는 사람.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현장에서 마지막까지 할매들과 움막을 지키다가 경찰에 끌려 나온 변호사. 판사를 규탄하며 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변호사. 페이스북 친구가 5000명이고, 팔로워가 3400명으로 모두 8400명이 그의 글을 읽고 반응하는 소통하는 변호사. 직업 혁명가로 살다가 소련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사회주의가 무너졌다는 절망감으로 자기를 학대하던 중 33살에 늦깎이 변호사가 된 박훈(48) 변호사는 참 독특한 캐릭터를 갖고 있다. 그를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오후 7시께 소맥으로 시작한 인터뷰는 자정을 넘겨서야 끝났다.

“홍준표요? 나하고 굉장히 닮았습니다. 싸가지 없다는 거죠.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지 나름대로 질러버리죠. 그게 완전한 장점이자 완전한 단점이고 완전한 단점이자 완전한 장점입니다. 쉽게 얘기하고 쉽게 속내를 드러내요. 그런데 그게 구설에 올라. 예를 들어 누구를 평가하라고 하면 아주 직설적으로 평가를 해버려. 그게 뭐가 문제냐. 나는 다 좋게 평가해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나 역시도 사람들에게 다 좋게 평가받을 생각도 없어요. 나는 이거라고 생각하니 나를 이렇게 평가해 달라는 거죠. 그중의 하나가 내 페이스북 글이야. 하나도 허투루 쓴 게 없어. 전체공개로 하면서 그만큼 자신 있다는 것이죠. 술 취한 상태에서 입에 튀어나오는 말 중에는 주워 담고 싶은 말 많아요. 하지만 글로 표현되는 것은 하나도 허투루 한 것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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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변호사./정성인 기자

진주의료원 폐원 문제로 첨예하게 맞섰던 홍준표 지사에 대해 의외의 평가를 했다. 상대를 통해 자신을 투시한다고나 할까.

“나는 굉장히 권력지향적인 사람이야. 권력을 쥐면 이명박 못지않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 나는 너무 잘 압니다. 91년도 사회주의가 망하는데 왜 망하게 하느냐. 다 쓸어 버려라. 다 죽여 버리라고 그랬어요. 그럴 정도로 권력지향적이야. 그렇기에 권력에 대한 욕망은 다 내려놨어요.”

거친 언사

그는 굉장히 거칠다. 페이스북에서는 물론이고 5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도 한마디 할 때마다 씨발놈, 개새끼, 좆도 같은 육두문자가 쏟아져 나왔다.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면서 용어를 순화하느라 무척 신경을 써야 했다. 천성이 그런 걸까?

“많이 좋아진 거예요. 기억이 시로 승화되지 않을 때는 남을 때려 패고 그랬어요. 와일드한 성격은 타고난 것은 아닌 듯하고, 후천적으로 그래 되지 않았나 싶어요. 아버지가 탄광 노동자다 보니 탄광촌을 돌면서 살았어요. 우리 아버지가 탄광에 막장 생활하다가 돌아가셨어요. 문경 탄광서 엄마 만나서 결혼하고 태백으로 가고 거기서 큰형 낳고 나를 충남 보령 탄광에서 낳고 내 동생을 화순 탄광에서 낳아요. 탄광촌만 돌아다녔고 거칠게 자랐죠. 하지만 똑같이 탄광촌에 살았어도 우리 형은 아주 순하거든. 얻어맞고 나는 우리 형 패는 놈을 패고. 동생은 나 때문에 아무도 안 건드리고 그랬어요.”

그렇다고 해도 왼쪽 팔뚝에 점점이 흉터로 남아있는, 이른바 ‘담배빵’ 자국을 자라온 환경만으로는 설명하지 못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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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빵' 자국을 설명하는 박훈 변호사./정성인 기자

고려대를 졸업하고 당시 학생운동 한 분파의 비합법조직 리더로 있던 그는 1991년 8월 26일 옐친이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을 보고는 절망을 느꼈다고 했다.

“옐친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탱크에 올라가 러시아기 흔들 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거의 전향하죠. 다 끝났다고 하고. 그때 29살이었는데, 옐친을 보고 사회주의 꿈은 무너졌다고 느꼈어요. 다른 길을 갔어요. 동양매직 영업사원으로 일했는데 그때는 정말 사람이 개차반이었어요. 술만 먹으면 사람 팼고 경찰서도 걸핏하면 끌려 다녔어요. 데모 때문이 아니고 사람 패 가지고 그랬으니 사람들이 나를 건드리지를 못했어요. 괴로워서 항상 술에 취해 있었고 죽고 싶었죠. 그렇게 남아있는 게 ‘담배빵’ 자국입니다.”

그런 생활을 2년 만에 청산하고 고시공부를 해서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변호사 생활을 해온 지 15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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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변호사./정성인 기자
 

시를 쓰는 이유

지난 봄부터 그는 페이스북에 시사 논평 같은 것은 확 줄이고 하루에 최소한 3편, 많을 때는 10편 이상 시를 쓰고 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던 페친(페이스북 친구) 반응도 점차 그의 시를 읽고 감상평을 달거나 비평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다. 왜 갑자기 시였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어릴 적 문학 소년의 꿈을 이루고 싶다는 것이고, 하나는 세월호 참사였다. 또 노화에 따른 기억력 감퇴를 극복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문학 소년이었다고 한다. 백일장 나가면 곧잘 뽑혔고 신문에도 실리기도 하고 교지에도 실렸고. 그런 것을 재미있어했다고. 하지만 중2 때 화순에서 겪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억이 그를 평범한 대학생으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광주민주화운동은 ‘간첩이 선동한 것이고 북한 특수부대가 와서 벌이는 전쟁’이라는 신군부의 선전을 철석같이 믿었고, 시민 저항이 진압되고 나서는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산야를 누비며 시신과 총기 찾기에 나선 그에게 대학 가서 알게 된 진실은 가만히 있을 수 없게 했다. 뒤에 알고 보니 발파 전문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화순탄광에서 직장예비군 무기고 관리도 맡고 있었다. 당시 무기고에는 카빈총은 물론 다이너마이트까지 보관돼 있었다. 시민군이 사용한 총기의 80% 이상이 화순탄광 무기고에서 나온 카빈총이었다. 총기를 내어주고 터벅터벅 걸어 퇴근했던 것.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게 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이런 문제들 하다 보니까 시적 감수성이 없어지기 시작하는 거죠. 그때는 선동문을 주로 쓰는 사람으로 지냈던 시간이었죠. 그러다 보니까 자기의 마음을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잃어버렸고 변호사가 돼서 글을 완전히 잃어버렸어요. 만연체가 됩니다. 내 문장을 찾아야겠다고 하는 열망이 있었어요. 만연체를 줄여볼까 해서 <경남도민일보>하고 <작은책>에 칼럼 연재를 하면서 문장을 찾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산문 말고 시의 형식으로 써봐야겠다고 하는 커다란 욕망이 분출되기 시작했는데, 마침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어떻게 말로 형언할 수가 없는, 글로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 어떤 울분 분노 슬픔이 시 형식을 자연스레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은 표현 자체를 산문으로 쓸 수 없는 사건이었거든요. 세월호 사건이 저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 원천이 된 거죠.”

세월호에 대해서도 차마 말하지 못하는, 그러나 누구나 생각은 하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만약에, 세월호 참사가 박근혜 정권만의 책임이라면 이렇게 우울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도대체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어떻게 운용돼왔기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터졌나. 사고가 났을 때 박근혜 정권이 보여준 대처 능력은 분명히 따져야 하지만 우리 사회에 내재 된 고질병 같은 것은 이참에 걷어내야 하는 거죠.”

이런 그의 생각은 지난 6·4 지방선거 당시 여영국 도의원 선거대책본부장을 하면서 그대로 투사된다.

“세월호 건들지 말라고 했어요. 세월호 심판하려 들면 니가 심판 받는다고 했어요.”

시를 쓰면서도 고민은 많다. 초등학교 다니는 딸이 “아빠 어제는 왜 그렇게 울었어?”라고 묻거나 시를 낭송해주면 “낭송하는 목소리에는 감성이 잔뜩 묻었는데 시 자체에는 감성이 없어”라는 식으로 반응한다는 것.

“나도 내 인생을 기억 못 하는 것이 많아서 시를 쓰는 겁니다. 옛날의 기억 짜 올려서. 지금 우리 나이 되면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감정만 남더라고요. 물론 뭐 내가 보기에 이건 잘 썼다 하는 것도 있고 아니다는 것도 있지만, 그 당시 마음은 어쨌든 표현하고 있거든요. 시를 써놓고서 그때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굉장히 많이 울기도 했어요. 내가 뭐랄까 마음을 위로받는 느낌도 받고, 어떤 때는 전혀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비밀 코드를 심어놓고 나 혼자 키득키득 웃고 그래요.”

실제로 그전에는 몰라봤는데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시를 읽고 있자니 대학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 가게 만든 모종의 사건, 첫 번째 부인에게 버림받은 사연 같은 개인사가 섬뜩하게 녹아있었다.

변호사

그는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던 해에 변호사가 됐다. 변호사 생활 시작부터 10년간, 노무현 정권 끝날 때까지 굉장히 저돌적인 변호사였다. 금속노조 노무실장이었던 그는 특히 노무현 정부의 노동운동 순화 로드맵에 거칠게 저항했으며 교수노조 창립 멤버로 참가해 재임용 탈락 교수 구제법안을 마련하는데도 깊숙이 관여했다.

“노무현 정부의 노동운동 순화 로드맵은 삼성에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죠. 재임용 탈락 교수 구제법안을 두고는 강경파가 있었어요. 그때 내가 글을 한 편 썼는데 ‘우리나라가 민주화됐다고 착각하지 마라. 그런 법안은 우리나라에서 절대 만들어질 수 없다. 국회 논의 과정에서 누더기가 되고 말거다’라고요. 이 글이 인연이 돼 ‘판사 석궁 테러’ 사건으로 알려진 김명호 교수 변론을 맡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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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궁 교수' 김명호 교수(오른쪽)와 박훈 변호사.

그는 사건을 맡으면 법률 자문하고 소송 대리만 하는 게 아니라 현장 속으로 동화해 들어간다. 밀양 할매들의 송전탑 반대투쟁이 그랬고 진주의료원 폐업 반대 투쟁도 그랬다. 심지어 판사와 직접 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사양하지 않는다. 김해시장실 점거 사건을 다루는 판결에서는 1인시위까지 해가며 판사를 대놓고 비판하기도 했다. 변호사가 판사와 직접 대립각을 세운다? 판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까 걱정되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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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러진 화살> 정지영 감독(왼쪽)과 박훈 변호사.

“옛날에는 판사들이 확신범에 대해서는 쫄았어요. 그리고 굉장히 많은 고민을 하죠. 자기가 살아온 인생하고 다르니까. 전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에 충격 받아서 좌파로 전향한 판사도 있어요. 특히 예전에는 창원법원의 노동사건에 대한 형량이 다른 지역에 비해 현저히 낮았어요. 판사도 지역사회 분위기를 반영하거든. 노동운동으로 기소된 피고인들이 굉장히 당당한 거야. ‘나는 이러이러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실정법에 위배된다면 법을 바꿔야지 나를 처벌할 것이 아니다’ 이렇게 강한 확신을 갖고 나오니 판사들도 고민할 수밖에 없는 거지. 잡범들은 법에 승복하지만, 확신범은 법에 승복하지 않아. 그래서 판사를 설득하고 판사를 고민하게 만들어. 하지만 이제는 그런 확신범들이 다 없어져 버렸어요. 잡범들이 하는 것처럼 ‘잘못했습니다. 뉘우치고 있으니 선처해 주세요’하는 식이야. 이제 판사는 고민하지 않아도 돼.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는 양아치에 대한 판결과 다를 게 없으니까. ‘처벌은 받겠다. 하지만 나를 교화시키려고는 하지 마라’는 당당한 확신범은 법원도 대우를 해주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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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징계를 하며 1인 시위 하는 박훈 변호사.

정치

그는 2012년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하고자 2011년 12월 무소속 예비후보로 선관위에 등록했다. 진보신당 김창근 예비후보와 단일화하면서 사퇴했지만, 앞으로 정치 재개에 대해서는 긍정도 부인도 안 했다. 그에게 정치란, 특히 진보정치란 무엇일까? 그를 현실정치에 직접 개입하게 하는 원천은 무엇일까?

“새정치민주연합을 민주개혁정당으로 안 봐요. 뭐랄까 대안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민중들이 들러붙는 정당. 그렇다면 진보정당은 대안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없어요. 작은 세력이지만 나 혼자만이라도 지켜내야 하는 게 있어요.”

지금까지 진보정당 국회의원들이 보여준 모습에 대한 실망도 있다.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이 무슨 짓거리를 해왔는지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에 더는 그런 국회의원이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 진보정당 출신 국회의원들도 전부 자기영달로 가요. 그러면서 무슨 존재감 있는 일은 하는 게 없습니다. 그러려면 뭘 하러 정당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옛날처럼 투쟁이나 하면서 있었으면 훨씬 나았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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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송전탑 반대 127번 천막농성장에서 끌려나오는 박훈 변호사.

하지만 정당이라면 정권을 잡기 위해 애써야 하는 집단 아니었나?

“정당을 해체하든지. 정권 잡을 능력이나 있느냐 말이야. 헛짓거리 하다가 정권 잡겠다는 노력이 완전히 끝났다는 거야. 2004년 10석을 정점으로 찍고 완전히 바닥을 쳐버린 거지. 더는 할 게 없다니까.”

그가 생각하는 진보정당 국회의원 상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진보정당 국회의원 상은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정책이 최소한 있어야 해. 부르주아지 정책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대체할 수 있는 정책요. 나는 최소한 한 가지는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은행을 국유화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거 하나도 못 거는 사람이 어찌 진보정당 후보로 나서는 거야. 은행 국유화를 관치금융이라 부르면 관치금융이라고 하지 뭐. 은행의 수탈을 막아야죠. 민중들 다 도탄에 빠져있는데 은행 국유화해서 도덕적 해이니 뭐니 필요 없고 이미 수탈당한 채무에 대해서는 탕감해 줘야 해. 이자율 엄청나게 낮춰야 하고 맨날 대기업으로 들어가는 돈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최소한 이것만이라도 해줘야 해. 현대자동차 국유화 삼성전자 국유화 이런 것은 놔두더라도 최소한 이것만은 해줘야 해. 그것조차도 못하겠다면 진보정치 때려치우라는 게 내 주장이야.”

그런 진보정당이 이뤄야 할 세상은 ‘유토피아’라고 잘라 말했다.

“나는 사람이 태어나면 무조건 잘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교육받을 대로 받아야 하고, 하고 싶은 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 때문에 죽고 돈 때문에 교육 못 받고 돈 때문에 공부 못하는 건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경쟁의식을 워낙에 많이 가지고 있고 경쟁 때문에 탈락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요즘 젊은 애들하고 얘기하고 있으면 스무 살 때부터 칼을 품고 살아. 그것도 사회에 대한 칼이 아니고 자기 옆에 있는 애들한테 칼을 품고 살아.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만들어버렸다’고 하는 확신범. 그 확신범이 너무 많아. 그 확신범을 정신병자라 부르고 사이코패스라고 부르는데 나는 정확히 말하는데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확신범이야. 우리 486세대가 만들었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

“손을 댈 수가 없어. 우리가 손을 놔야 해. 우리 세대. 486 세대는 손 놔야 해. 완벽하게 우리가 손을 놓고 잡초가 자라게 해야 해. 내가 생각하는 대안은 울고 나서 보자. 내가 시를 쓰는 게 울고 싶어서다. 한참 울고 나서 보자. 너무 경직된 세상에 필요한 것은 보들보들한 어머니 품속 젖가슴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내려놓는 건데 한참 울고 나면 다 내려놨기 때문에 뭔가 있겠지. 그런 생각이 있어.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은 울고 싶은 것뿐이야. 그동안 꾹꾹 참아왔던 것을 시 속에서 울고 싶어.”

인터뷰 도중 갑자기 느끼는 시가 있다며 한 편을 써서 보여줬다.

‘엄마의 포근한 젖가슴’

언제 한 번 엄마 젖가슴에 묻혀
실컷 울어 본 적이 있었던가.
네가 어찌 세상을 살았는지
엄마는 알고 싶지만 알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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