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 있는 지역작가와 장애인을 발굴합니다”

㈜바냇들은 예비사회적기업이다. 아트 상품 개발과 판매, 지역작가와 장애인의 재능발굴을 위한 교육 등 바냇들의 공익적인 사업계획에 대해 물을 생각이었다.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계획은 틀어졌다. 바냇들을 만들기 전 열정과 고민으로 가득한 박 대표의 청춘이야기가 재밌었기 때문이다. 그 고민의 시간은 지금의 바냇들의 창립배경(?)이라 하기에 충분했으므로 일단 바냇들 대신 박 대표에 집중했다.

관심 없던 교직의 길에 들어서다.

박미영 대표(51)는 경남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한국화 전공)를 졸업했지만 선생님을 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 박 대표를 교직으로 이끈 것은 묘한 잉어꿈이었다고 한다. ‘꿈보다 해몽’이라는데 꿈을 꾸고 선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걸 보면 아예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닌 게 아닐까.

“사범대인지도 모르고 갔어요. 졸업하고 교직이수증을 갖게 되었는데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화가가 될 거라는 생각만 했지 선생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당시에 교직으로 갈 기회는 많았어요. 집안어른들, 부친께서 교직에 계셨었는데 아버지께서 늘 너는 사회를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교사를 하더라도 특수학교 교사가 되라고 했어요. 교직이 현실에서는 가까웠지만 졸업을 하고도 제 작업하고 화실에서 애들을 가르치면서 버텼어요. 선생은 나랑 관련 없는 일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근데 계속 들으니까 점점 세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다 어느 날 꿈을 꿨어요. 꿈속에서 늪? 뻘 같은 곳이 보였어요. 근데 제가 바지를 걷고 그 늪에 들어갔어요. 들어가니까 아무것도 없어 보이던 어두운 늪 안에 살아있는 잉어들이 헤엄을 치고 있는 거예요. 제가 한 마리를 잡아 올렸는데 엄청난 기세로 살아서 펄떡거리더라고요.

IMG_1717.JPG
▲ /서정인 기자
너무나 힘차게요. 깨고 나서 생각했죠. 내가 가야 할 곳이 특수학교인가. 힘차게 뛰어오르던 잉어들이 소외된 우리의 아이들이고 그들을 위해 살라는 뜻인가? 또 아버지에게 이미 많이 세뇌된 상태였고요(웃음). 그래서 울산에 있는 청각장애아동들이 다니는 메아리 학교에 지원했고 운 좋게 시험에 합격해서 거기 가게 됐어요. 선생이 되고 나서 학기 초마다 아이들이랑 학교생활 하면서 지킬 약속을 하고 또 저는 저하고의 약속을 혼자 했어요. ‘나는 마지막까지 선생이어야 한다. 선생이 아니고 월급쟁이로 전락하는 나를 발견한다면 과감하게 학교를 그만두겠다’ 생각했어요.”

버거웠던 자신의 기준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저 자신을 많이 세뇌시키고 억눌렀어요. 참고 또 참고… 그런데 열정은 많으니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나는 많이 주고 싶은데 나름대로는 애들한테 가까이 가고 싶고, 더 잘하고 싶은데 성에 안 차는 거 에요. 그래서 교장선생님한테 각서까지 쓰고 학교에서 기숙하며 생활하는 애들을 제 방에 데리고 와서 그림을 가르쳤어요. 또 메아리학교가 당시 울산 시내가 아니라 울주군에 있었어요. 그 동네 지역에 애들도 몇 명 가르치고, 자취방 주인집 딸내미 가르쳐서 대학까지 보냈어요. 한 푼도 안 받고요. 어디에 못 쏟아 부으니까… 젊었을 때는 누구나 그렇겠지만 많이 울었어요. 내가 바르게 가고 있는지 나를 의심하면서 난 멀리 뛰기 위한 연습을 하는 거다. 더 참자. 저를 억누르고, 책을 하루에 한 줄도 안 보면 가시가 돋는다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다독도 해보고… 우리 학교에서 정말 능력 있는 분들이 다른 길로 가면 전 ‘아. 내가 그만둬야 하는데…’ 생각하고 애들을 아무리 가르치고 해봐도 내 안에 뭔가가 안 채워졌어요.”

그때의 박 대표는 자신이 미술을 전공했지만 선생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미술은 취미이며, 작가와 선생은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선생은 인간이기 이전에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나 잘못을 인간이라는 이유로 합리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다. 교직생활 중 박 대표의 정신적 방황은 자신에게 너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것과 그림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생활에서 해소하지 못한 목마름 때문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을 쌓아가며 교사생활을 이어나가던 박 대표는 어느 날 자신을 편안하게 놓아주게 된 계기가 있다며 차근차근 몇 가지 일화를 말했다.

IMG_1742.JPG
▲ /서정인 기자

“그렇게 정신적인 방황을 계속 하다가 우연히 여기가 아니라도 할 일이 있다는 걸 깨우쳤어요. 교직생활을 하기 전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 작업실을 인수받아서 제 작업도 하고 아이들을 가르쳤었어요. 그중에도 지금까지도 저랑 인연을 맺는 제자들이 있는데 제가 선생을 시작하고 얘들도 충무(지금의 통영)로 이사를 갔어요. 자주 저희 집에 와서 자고 가기도 하고… 서윤이 서진이라고 형제인데, 여름 방학 때 얘들 부모님이 ‘애들이 맨날 가서 신세 지는데 선생님이 한번 여기로 놀러 오세요.’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충무로 갔죠. 공원에 놀러 갔는데 서윤이라는 첫째 애가 의협심이 강해요(웃음). 잔디밭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벤치에 앉아있는데 키가 180cm는 되는, 우락부락 덩치 큰 청소년 7~8명이 거기서 막 공을 차고 놀더라고요. 할머니, 할아버지도 눈살만 찌푸리는 거예요. 불량해 보이니까 말은 못하고… 근데 서윤이가 작은 목소리로 ‘잔디보호’ 딱 이러는 거야. 찔리데요. 나도 말을 못하는데. 또 얘가 참다 참다 ‘잔디보호’ 이러는 거야. 그때도 내가 과연 선생이 맞는가. 회의가 오고(웃음)… 근데 운 좋게 공이 저한테 딱 날아왔어요. 그걸 줍는데 예전에 아버지가 하셨던 말이 생각났어요. 한순간 실수로 학교에서 멀어진 애들은 은연중에 학생과 학교에 대한 동경이 있다고, 그래서 항상 쉽게 말하면 불량(?)청소년을 부를 때 ‘어이 너 왜 그래’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이봐 학생’ 이렇게 부드럽게 부르라고 그럼 모든 게 해결된다고요. 공 주우러 온 아이한테 ‘학생~ 공놀이하니까 재밌지?’ 하니까 ‘네’라고 해요. ‘그래. 그게 살아있다는 증거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노. 너희가 살아있으니까 이렇게 뛰어놀고 있는 거잖아. 그런데 너희만 살아있는 게 아니거든? 저 꽃들도 봐라. 살아있제. 쟤들도 아픔을 느낀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하니까 ‘네’ 하더라고 ‘행동하는 방법도 알겠네?’하니까 ‘네. 어이 내려가자’하면서 우르르 가는 거예요. 아… 저렇게 아름다운 애들을, 덩치 크고 우락부락하다고 겁먹고 손 한번 안 내미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구나. 그때 느꼈어요. 학생은 학교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이때까지 잘못된 선생이었다는 걸 느꼈어요.”

지리산에서 얻은 용기

통영에서의 그 일은 박 대표 스스로 만든 엄격한 판에서 다른 수를 생각할 수 있는 물꼬를 텄다. 그리고 며칠 뒤, 박 대표는 우연히 친구를 따라 간 지리산에서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게 한 고민이 아주 작은 먼지 같은 일이라고 느끼게 하는 광대한 자연의 기운. 그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끼고 그 길로 바로 교직생활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것이다.

“경치 구경하고 얘기 나누면서 지리산 자락에 들어서는데 산을 너무 무분별하게 개발해놓은 거예요. 나무를 베고, 돌을 깎아놓고… 조경사업이라 그러면서 막 그렇게 해놨는데…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래. 이건 우리 아름다운 자연에 생긴 조그마한 부스럼일 뿐이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쇠말뚝을 박아도 우리나라를 흐트러뜨리지 못한 것처럼 저것도 곧 괜찮아질 아주 작은 부스럼 같은 것일 뿐이야’ 이렇게 혼자 막 속으로 위로해가면서 산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깨우침이 왔어요. 마치 지리산에 내 마음이 닿은 것처럼… 모든 게 괜찮다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어요. 제가 고통스러워한 것들이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어요.”

박 대표는 자신의 마음이 지리산에 닿았다고 믿었다. 노고단에서 아름답게 펼쳐진 산자락을 바라보며 ‘내 마음이 이 산에 닿았는데 내가 뭘 못하겠나.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라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더 이상 자신이 선택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세뇌할 필요가 없다는 걸 느끼고 다음 출근을 하자마자 교장실로 찾아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한다. 그 때가 서른 살. 박 대표는 스물일곱 살부터 서른 살까지의 고민들을 그렇게 마무리하고 학교 동기들과 ‘묵의흐름전’이라는 그룹전을 준비하면서 온전히 그림에 묻혔다. 

“이때까지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에 내 발이 닿은 적이 없었는데 그때 그림을 그리면서 발이 그림 한쪽에 담겨서 빠져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어요.”

IMG_1748.JPG
▲ /서정인 기자

아이들과 함께할 운명

이야기를 나눌 때 박 대표의 표정이 가장 밝아지던 때는 선생님이 되었을 때도 지리산에서 감격을 느꼈을 때도 아니었다. 바로 아이들 얘기를 할 때였다. 박 대표는 선생님을 그만 뒀지만 자신은 ‘평생 아이들과 함께 하는 길을 걷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선생이라는 직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아이들을 항상 위한다면 그게 바로 선생이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마산에 내려와 새 생활을 하면서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기까지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석호’라는 호를 쓰기 시작한다. 호를 책임질 만큼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마산에 내려올 때 그래도 학생들은 꾸준히 가르치겠다고 생각했어요. 억지로 선택하지 않은 일이었어요. 내려와서 화실을 열고 아버지께 받은 석호라는 호를 쓰기 시작했어요. 화실이름을 그래서 ‘석호화실’이라고 지었죠. 그러다 혜림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오는 건 어떻겠냐고 연락이 왔어요. 아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 운명인지(웃음). 그래서 바냇들 하기 전까지 특수학교인 혜림학교, 은광학교에서 교사로 있었어요. 작품 활동도 하면서요. 그렇게 학교에서 장애아동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교두보 역할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어요. 아이들이 한 작업을 보면 정말 순수해요. 구성이나 비례는 안 맞을지 몰라도 그림이 너무 맑고 깨끗해요. 그 재능을 이제 지역사회에 펼칠 수 있게 이끌어 나가는 일을 언젠가는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작품 활동하다 만난 작가들 중 정말 작품은 좋은데 너무 어렵게 생활하는 작가들이 많았어요. 점점 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고, 재작년에 더 늦으면 아무것도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에너지가 고갈되거나 열정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잖아요.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생각으로만 남기 전에 실행에 옮겨야겠다 싶어서 학교 활동을 접고 아트센터나 교육원에서 하던 수업도 지금은 바냇들 시작하면서 그만두고… 지금은 경남대 평생교육원 수업만 하고 있어요.”

IMG_1754.JPG
▲ /서정인 기자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바냇들

지역사회에 꼭 필요한 공익적인 사업목적과 가능성을 인정받아 예비사회적기업에 선정된 바냇들은 좋은 역량을 가지고 있음에도 펼칠 기회가 적었던 지역작가들과 소외계층의 든든한 터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홈페이지를 시에서 지원받아 제작하고 있고, 창동예술촌의 ‘바냇들 갤러리샵’은 반가운 오픈을 준비 중이다.

“지금 우리 회사 직원이 사무차장님 빼고는 전부 전공한 작가들이에요. 도예, 서양화, 조각 등 각각 분야를 맡아서 해요. 친환경 소재로 디자인하고 그림도 그리고 주문받아서 판매해요. 컵이나 다포, 옷, 가방 같은 것도 작품을 디자인으로 결합해서 상품화하고 섬유물감으로 그림도 그리고요. 의류는 이제 지금까지는 패브릭물감으로 바지 위에 그림을 그려서 주문 판매했는데 이게 반응이 괜찮았어요. 저랑 서양화 전공한 분이 그림이 그렸는데 직접 디자인 스케치해서 작업하고… 앞으로 더 다양하게 할 거예요. 조금 이제 친환경에 대한 인식도 있고 해서 동대문시장 섬유 제작하는 데 더 질 좋은 소재로 의뢰를 했어요. 그림은 그대로인데 제품이 빨리 낡고 해버리면 같이 수명이 짧아져 버리니까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고급상품으로 제작하려고 하고 있어요. 후원은 지금은 지역아동센터에 매주 수요일에 재능기부로 수업을 하고 있어요. 요청이 있으면 벽화 그리는 봉사도 하고 추석 지나면 좀 다양한 축제에 참가해서 우리 상품을 알리고 체험수업도 하고 봉사활동 재능기부도 하고… 아직 금액적인 기부는 많이 하지 못하지만 더 길게 생각하고 이 사업이 잘 키워서… 어디에 내놔도 작품이 모자람 없는 지역작가들 발굴해서 어렵게 생활하시는 작가 분들 서포트 해드리고 싶어요. 또 늪에 가려져서 있는 줄도 몰랐던 잉어들의 생명력을 꿈에서 본 것처럼, 장애아동들의 재능을 발굴하고 꾸준히 가르쳐서 아이들의 작품도 상품화하고 활동할 수 있는 단단한 땅을 만들어 주는 게 저의 꿈이에요.”

IMG_1761.JPG
▲ /서정인 기자

박 대표는 인터뷰 내내 유쾌한 사람이었지만 이제 시작하는 일에 대한 기대와 열정과 함께 시름도 엿보였다. 하지만 이런 걱정과 고민은 박 대표를 갉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게 하는 듯했다. 진심으로 하는 노력이 가진 에너지는 더욱 힘차다. 이제 시작한 바냇들의 행보에 더 기대하는 이유이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