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의지는 하늘의 별로 향해 올라가지 않았다. 지상의 것이었고, 블리문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을 덮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잠시, 마치 내가 원래부터 리스본에 살았던 것 같던 기분이 들었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하루하루 빈둥거리던 나는 여느 때처럼 민박집 거실 소파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눈에 띈 책, <수도원의 비망록>(2008, 해냄출판사). 지나치게 두껍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할 일이 없었으므로 침대에 누워 읽기 시작했다.

작가는 주제 사라마구(José Saramago, 1922~2010). 어? 익숙한 이름. 그래, 눈먼 자들의 도시! 2008년 영화인데, 제법 인상 깊던 내용으로 기억한다. 그 영화의 원작이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인데, 지은이가 바로 주제 사라마구다.

그런데 뜬금없이 리스본에서 그를 만나게 된 거다. 그것도 알지도 못하는 책의 한국어본을 말이다. 알고보니 주제 사라마구는 포르투갈 사람이고, 이곳 리스본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는 이 <수도원의 비망록>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01 리스본 주제 사라마구 재단 건물(가운데). 건물 왼편 올리브 나무 아래 주제 사라마구가 묻혀 있다..jpg
▲ /이서후

600페이지가 넘는 역사 판타지 소설. 한국이었다면 아마도 읽다가 지쳐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꼬박 이틀을 책에 푹 빠져 살았다. 소설의 배경이 18세기 절대왕정 하의 리스본인데, 소설에 등장하는 거리며 건물들이 지금도 여전히 선명하게 살아있어서다. 책을 오래 읽어 눈이 아프면 나는 곧장 거리로 나가 소설 속 인물들이 걸었던 길들을 돌아다녔다. 역사상 가장 많은 황금이 리스본으로 들어오던 시기, 그 번영의 시대를 살던 리스본 사람들이 화려한 복장으로 테라스에 나와 국왕의 행차에 손을 흔드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꽤 재밌는 소일거리였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주제 사라마구 재단 본부 건물을 발견했다. 자주 지나치던 독특한 모양의 건물이 있었다. 카사 도스 비코스(Casa dos Bicos, 부리의 집)란 이름의 건물이다. 500년도 더 된 이 건물은 이름 그대로 부리 모양의 돌들이 외관을 장식하고 있다. 

그날도 그냥 이 건물 앞을 지나는데, 왠지 한 번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장권을 사려고 입구로 들어서니 표지판에 주제 사라마구 재단이라고 적혀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건물 전체가 주제 사라마구 박물관이었다. 그가 생전에 쓰던 노트며 필기구, 그의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수도원의 비망록>, <눈먼 자들의 도시> 같은 책들의 각국 번역본들도 전시돼 있었다. 물론 한국어로 된 것도 있다.

00 주제 사라마구 재단에 있는 주제 사라마구 사진.JPG
▲ /이서후

주제 사라마구는 말년에 꽃핀 작가다. 공산주의자인 그는 독실한 가톨릭 국가이며 우익 정권이 계속된 포르투갈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20대 중반인 1947년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이후 20여년을 공산당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다 60세를 넘긴 1982년 발표한 <수도원의 비망록>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지만, 포루투갈의 우익 인사들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훌륭한 작가지만 공산주의자다.” 하지만, 1998년 그가 이 소설로 노벨상을 수상하자(포루투갈어로 쓰인 문학 작품 중 최초였다.) 평가는 이렇게 바뀐다. “그는 공산주의자지만 훌륭한 작가다.”

주제 사라마구 재단 건물 앞 올리브 나무 아래에 그가 묻혀 있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뭐 상관없다. 리스본의 그 뜨거운 여름, 나는 자주 그 나무 아래서서 재단 건물을 지켜보곤 했으니까.

02 주제 사라마구 재단이 있는 '부리의 집' 전경. 500년 된 르네상스식 건물이다..jpg
▲ /이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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