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철학자 강신주가 <경향신문>(7월 22일 자)에 쓴 용감무쌍한 칼럼이 화제가 됐다.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를 비판하며 냉장고를 없애거나 최소한 용량을 줄이자는 내용이었다.


얼핏 황당무계한 소리처럼 들리는 칼럼의 핵심 요지는 간단하다. 일반 가정에서 쓰는 냉장고 속에 온갖 ‘자본주의적 삶의 폐단’이 응축돼 있다는 것. 냉장고를 사용하게 되면서 우리는 식재료를 오래오래 저장해 먹게 되었고 한꺼번에 많이 구매하는 소비 습관에 익숙해졌고 장기 보관이 가능한 인스턴트·가공식품에 길들여졌다. 약간의 삶의 편리를 위해 음식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냉장고에 내맡기면서 우리는 식품기업과 대형마트 등 거대 자본의 지배력에 더더욱 종속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냉장고가 없어졌을 때, 몹시 불편할 것이다. 어떤 습관이라도 고치기는 무척 힘든 법이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 재래시장에 들러 싱싱한 식품을 적당량 사서 바로 요리해서 먹는 생활이 반복되다보면, 우리는 곧 냉장고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다. 냉장고는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 냉장고와 대형마트는 공생 관계에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냉장고를 대량생산하는 거대한 산업자본, 대형마트를 운영하는 거대 자본, 그리고 그곳에 진열된 식품들을 대량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산업자본이 도사리고 있다. 묘한 공생 관계 아닌가. 냉장고는 대량생산된 식품들을 전제하고 있고, 대량생산된 식품들은 냉장고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강신주)

[경향신문]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_오피니언 25~.jpg

기자는 강신주의 문제의식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만일 냉장고에 의존하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때그때 필요한 식재료만 소량씩 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자연히 보다 신선하고 보다 건강하고 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높아진’ 입맛은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도 될 것이다. 신선한 재료를 파는 전통시장과 소규모 소매점, 그것으로 정직한 음식을 만드는 식당들의 활성화를 기대할 수 있으며 ‘신선한’ 냉동식품이니 ‘웰빙’ 인스턴트식품이니 사기 치는 거대 자본의 상술도 막을 수 있다.

자본주의적 삶의 폐단 응축

물론 현실적인 문제가 없지 않다. 김치·장아찌 등 저장식품이나 저온숙성이 필요한 식품, ‘시원함’이 절실한 맥주 같은 음료와 멀어지는 건 아무래도 아쉽다. 그렇다면 최소한 냉동실만이라도 없애거나 아니면 냉장고 용량을 대폭 줄이는 것은 어떨까. 일부 저장식품이나 맥주 몇 병 때문에 사람 키를 훌쩍 뛰어넘는 냉장고를 집안에 전시해둘 이유는 없을 것이다.

상상해보자. 대형마트들은 틈만 나면 ‘할인 행사’를 펼치며 대량 구매를 유혹하지만 보통 이렇게 산 재료는 한 번에 못 먹고 냉장고에 하염없이 처박아 두는 경우가 많다. 하루 이틀 사흘, 아니 어떨 때는 한 달 두 달씩 그 재료는 냉장고 속에서 ‘썩어’ 문드러지기 마련이다. 냉동실에 넣어두면 변질되지 않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신선한 돼지고기를 바로 구워 먹었을 때와 한두 달 냉동 보관한 돼지고기를 구워 먹을 때 맛이 같은가? 냉동된 조개에서 싱싱한 조개에서 맛볼 수 있는 고소함과 촉촉함, 부드러움이 느껴지는가? 오래된 생선으로 끓인 탕이나 찌개 역시 이미 산패된 재료 때문에 지독한 냄새와 뻑뻑한 질감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냉장고와 결별은 갈수록 심화되는 에너지 문제 해결에도 기여할 수 있다. 냉장고는 가전제품 중 에너지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것에 속한다. 에너지관리공단에 따르면 냉장고는 일반 가정 ‘연간 평균 전기요금’ 순위에서 에어컨에 이어 2위다. 연간 요금으로 치면 7만 6000원 꼴이다. 

만일 냉장고를 안 쓰거나 줄이기 시작한다면 냉장고를 생산·판매하는 대기업과 대형마트들도 뭔가 대안을 내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에너지 절약형 소형 제품의 생산·판매를 강제할 수 있고, 기업들 자신도 에너지 절약에 솔선수범하지 않을 수 없다. 한걸음 더 나아가면 정부에도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 공포를 극복할 원전 폐쇄 로드맵과 안전한 친환경 에너지 보급의 대책을 압박할 수 있다.

전기 먹는 하마, 전기밥솥

에너지 문제와 관련해, 또한 ‘먹거리’ 문제와 관련해 한 가지 더 주시해야 하는 가전제품은 바로 전기밥솥이다. 전기밥솥은 연간 평균 전기요금 순위가 4위(3만 원)에 불과하지만 이건 취사 순간만 계산한 것이다. 보온 기능까지 합하면 일반 가정에서 최강의 ‘에너지 과소모품’이다. 하루 12시간 보온만으로 한 달 기준 냉장고의 두 배(60㎾h)에 달하는 전기를 잡아먹는다.

생각해보면 전기밥솥만큼 쓸모없는 것도 없다. 냉장고는 일정 부분 타협이 불가피하지만 전기밥솥은 지금 당장이라도 내다버릴 수 있다. 쌀과 곡물 역시 다른 음식재료와 같아서 신선한 것, 갓 요리한 것이 가장 맛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저 약간의 편리함을 위해 하루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밥통에 밥을 처박아 놓고 눅눅하고 냄새 나는 밥을 먹는다.

고슬고슬 촉촉하고 맛있는 냄비 밥을 짓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쌀을 깨끗이 씻어 뚜껑을 덮은 뒤 센불에 끓이기 시작해, 김이 오르면 약불로 줄이고 약 15분간 끓여주면 끝이다. 약간의 뜸들임도 필요하다. 찰기를 더 느끼고 싶다면 쌀을 물에 오래 불리거나 뜸을 좀 더 들이면 된다. 총 20~30분이면 충분한 이런 밥짓기를, 그것도 묵은 밥보다 훨씬 맛있을 수밖에 없는 밥짓기를 포기하고 과연 전기밥솥에 의존한 삶을 살아야 할까?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 그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절망한다. 자본주의는 너무나 거대한 체제이기에, 우리가 길들이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서두에 언급한 강신주의 칼럼 일부다. 과연 그럴까. 자본주의는 어떻게 발버둥쳐도 벗어나기 어려운 괴물 같은 존재일까. 결국 문제는 ‘무엇이 인간다운 삶인가’ 우리의 기준으로 귀결된다. 인스턴트 음식이든 무엇이든 최대한 간편하고 빠르면 그만일까, 아니면 좀 불편하고 번거롭더라도 최대한 신선한 음식을 찾아 먹는 게 좋을까?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무엇을 택하느냐에 따라 세상은 더 좋아질 수도 더 나빠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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