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어시장 생선을 나르며 <멍게>를 쓰다

성윤석 (48)시인이 최근 마산어시장을 기록한 시집 <멍게>(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문학과지성사, 1996)와 <공중묘지>(민음사, 2007)에 이은 성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멍게>는 시인이 부둣가 선창과 수협 공판장이 있는 바다로 가서 그 생활의 체험을 시화한 것이다. 

1999년 벤처기업 운영을 위해 서울로 떠난 그가 지난해 돌연히 어시장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새벽 4시부터 오후 6시까지 생선을 실어 날랐다.

몸은 고됐지만 사업 실패에서 온 고통과 절망은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우울증도 호전됐다. 성 시인은 “마산어시장,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고 싶었다. 옛날처럼 폼이나 잡고 설렁설렁 문학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고백했다. 

성 시인을 마산어시장 근처 식당에서 만났다. 어시장 생활에 제법 익숙해진 듯 그가 자연스럽게 명함을 건넸다. “제가 여기서 일합니더.” ‘관공서, 학교, 대기업 수산물 납품전문 상기냉동(주) 총괄마케팅 팀장 성윤석.’ 자그마한 키와 작은 덩치의 시인은 소년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시집 <멍게>를 건넸다.

“여기(식당)는 생선국이 참 맛있어요. 아주머니 생선국이랑 소주 한 병 주이소.” 

매일 하루에 소주 한 병 반을 마신다. 식사 때마다 반주로 한다. 안주가 좋으니 술 한 잔, 고된 육체노동을 버티기 위해 술 한 잔, 어시장 사람들과 같이 부대끼면서 술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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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윤석 시인./김구연 기자

그는 자신의 배가 가슴보다 더 튀어나왔었는데 어시장 생활을 하면서 배가 쏙 들어갔다고 했다. 무려 14kg가 빠졌다. 그는 “일이 고되어”라기보다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건강해졌다”고 표현했다. 

-어린 나이인 만 24세 때 <한국문학>(1990)으로 등단했습니다. 

“어린 나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백번도 넘게 문예지에 투고한 끝에 나온 것입니다. 최종심에만 아홉 번 올라갔죠. 한 문장만 고치면 당선작으로 하겠다는 신춘문예 심사위원의 말도 있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대학 4학년 봄이 돼서야 됐으니 개인적으론 ‘참 재능도 없구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원래 꿈이 시인이었습니까?

“‘쓰는 자’로서 사회운동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17살 때부터 부산 보수동 헌책방을 뒤지고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시와 소설을 읽었고 시와 소설을 썼습니다. 사회운동인 독서운동회를 조직해 활동했었죠. 사실, 저는 ‘시인’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무슨 자격증이라도 쥔 것 같지 않습니까.”

-경남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습니다. 이후 지역 일간지 기자, 마산시보 편집장을 지냈습니다. 그때 생활은 어땠습니까?

“<경남매일> 5기로 1991년부터 1992년까지 문화부 기자를 했고, 이듬해 1월 3일부터 마산시보 창간 기자로 시청에서 일했습니다. 대학교 같은 과 선후배 사이였던 아내와 1997년 결혼도 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아내도 소설가로 데뷔했고 첫 아들도 태어났습니다. 경제적으로 편안했던 시절이었죠.”

-첫 시집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문학과지성사)가 1996년에 나왔습니다. 도시(마산)의 풍경과 삶을 담은 시가 많더군요. 

“신문사에 다닐 때 출판사인 문학과지성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숨어있지만 말고 작품 활동 좀 하라고.” 그때 처음 문학과지성사라는 출판사가 작은 도시의 신인 시까지 낱낱이 읽는 곳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유일하게 믿음이 가는 출판사였습니다. 그게 인연이 되어 문학과지성사에서 첫 시집을 냈고 청탁이 오면 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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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윤석 시인./김구연 기자
-영화를 좋아합니까? 시집 제목도 그렇고….

“그때 당시 도시인의 유희였죠. 지금은 영화 안 본지도 꽤 됐습니다.(웃음) 그때는 극장에 혼자 가서 영화를 봤습니다, 혼자 술을 마셨고 혼자 걸었고 혼자서 글을 썼습니다. 비도 참 많이 맞고 다녔죠. 지금도 그런 편인데, 저는 사람들과 잘 섞일 수 없습니다. 가끔 문청동인(1991년 윤봉한, 성선경, 심종철, 최석균, 성윤석이 모여 지역문학에 활력을 주는 의미에서 동인집을 처음 펴냄)들과 동인지를 내곤 했습니다.” 

성 시인은 직선적이고 곧은 성격을 지녔다. 아부나 아첨을 못한다. 그는 스스로 “난 예의도 없고 편견이 심한 사람이다. 문단이든 동료 작가든 마음에 안 들면 곧바로 지적하고 공격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성 시인에 대한 평가와 호불호는 사람마다 엇갈린다. 특히 그는 글에 대한 자존심이 강하다. 글을 매우 빨리 쓰는 편이고 일단 완성된 작품에 대해서는 좀처럼 퇴고를 하지 않는다. 첫 시집을 낼 당시에도 그는 출판사 관계자에게 “읽어보고 마음에 안 들면 쓰레기통에 버려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1999년 마산을 떠나 서울로 간 이유도 직선적이고 곧은 성격 덕분(?)이었다. 한 날은 시보를 만들어 시장 결재를 받으러 갔다가 시장과 의견 충돌이 있었다. 남들 같았으면 머리를 숙이고 들어갔을 텐데, 심지어 대들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바로 사표를 던졌다. 

-서울로 떠난 이유가 그것 때문인가요?

“그런 것도 있었고, 역마살이죠. 마산이라는 도시를 좋아하지만 그때는 갑갑하게 느껴졌습니다. 자극을 주는 작가도 없었고…. 그때 당시 서울에 있는 몇몇 시인들과 엽서를 주고받았는데 가까이에서 그들을 만나고 싶었고, 좀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돈키호테처럼 떠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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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윤석 시인./김구연 기자
-서울시립묘지 관리인을 2004년부터 했고, 3년 뒤 두 번째 시집 <공중묘지>(민음사, 2007)를 펴냈습니다. <공중묘지>는 죽음으로 꽉 차 있던데, 그 무렵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남동생이 죽었고 충격 받은 어머니는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시인에게도 ‘두려운 나날’이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뚝뚝했지만 남동생은 애교도 많고 어머니한테 참 잘했습니다. 충격이었죠. 이석증과 공황장애 때문에 3년을 앉아서 잤습니다. 누우면 어지러웠습니다. 지금도 치과에 가면 고개를 뒤로 젖히지 못합니다. 최근에 스케일링을 했는데 네 번을 나눠서 했습니다.(웃음) 극복이라면 <공중묘지>를 낸 것밖에 없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버텼습니다.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의 세월이었습니다. 돈이 좀 벌리는 시절도 있었고 벌리면 바로 재투자했습니다. 그 시절엔 죽음에 천착하기도 했고 심지어 죽음, 그 너머의 세계가 궁금해 반쯤 죽어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바이오벤처기업가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화학실험을 하고 신물질을 개발하는 일을 했다니 상상이 잘 안 됩니다. 사업가의 기질이 있습니까?

“아버지가 섬유계통 사업을 했는데, 그 기질을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지구환경오염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핵심원천소재인 석유수지를 식물수지로 대체하고자 바이오벤처기업을 만들었습니다. 약 14년 정도 했고 3개 정도 벤처기업을 운영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매우 비장했습니다. 바이오 쪽 소재로 특허를 몇 건 출원하고 획득한 일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 아내도 잘 모릅니다.(웃음)”

-완전 다른 분야인데 그게 가능합니까?

“관심과 호기심이 있으면 됩니다. 저는 재미있었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화학자, 영국 듀폰(화학회사) 출신의 화학자, 심지어 러시아 핵물리학자와 교류했습니다. 우리 회사 직원을 영국과 러시아에 보내기도 했고 저는 서울에서 그들과 만나 기술적인 교류를 논의했습니다. 2011년 영국 모 회사와 공동 기술 개발 조인식도 서울에서 했고 그 뒤 우리나라 전 대기업에서 거의 1년 동안 우리 회사를 찾아와 회사 인수에 수백 억 원을 제시한 곳도 있었습니다. 자금 부족으로 엎어지고 말았지만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미완의 신기술을 완성하는데 남은 생을 쏟을지는…. 지금은 문학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마산에 왔습니다. 마산어시장에서 일하는 이유가 특별히 있습니까?

“마산에 와서도 매일 술만 마셨습니다. 아내는 무던한 성격이어서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별다른 간섭이나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날은 아내가 막 우는 것입니다. 힘들었겠죠. 아내가 ‘(처남이 일하는)어시장에 한 번 가봐라’고 권했고, 곧장 그곳에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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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윤석 시인./김구연 기자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팔과 다리의 근력을 안 쓰다가 쓰고, 수면 부족과 알코올로 인해 고통스러워 한 적도 있습니다. 하나, 나 스스로 나를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고 싶었습니다. 스스로 지은 감옥에 들어가서 ‘잘 한번 견뎌보자’라는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육체를 혹사하는 대신 정신은 맑은 폐허들이 하루하루 들어섰습니다. 그게 나에게는 진정한 노동의 의미였습니다.”

-서울에서 마산으로 오면서 1.5t 트럭을 불러 가진 책을 모두 고물상에 넘겼다고 들었습니다. 

“그 당시엔 문학을 그만 접으려고 했습니다. 책마저도 위선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그 당시 완벽하게 실패했고 완벽하게 사라지겠다는 생각에서 책을 버렸습니다. 내가 잘한 일들 중 몇 안 되는 일입니다.”

-최근 세 번째 시집 <멍게>(문학과지성사)를 펴냈습니다. 어시장에서 생활하면서 다시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은 언제, 어떻게 들었습니까? 

“어시장에 있으면서 거의 매일 일꾼들과 술을 마셨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서기’라고 부르는데, 서기들의 이야기와 삶이 그대로 문학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작은 해안도시의 어시장 일꾼들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로 보였죠. 저는 문학을 한답시고 대학교수든 누구든 가짜들을 경멸하지만 이 서기들은 경외의 눈으로 올려다보았습니다. 이 거대한 세계를 그대로 둘 수 없었습니다. ‘월명기(月明期‧)’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처음 시를 써봤습니다.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옮기면 곧 시가 됐습니다.”

-월명기를 듣고 쓴 첫 시가 뭡니까?

“‘고등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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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윤석 시인./김구연 기자
-시장에서 유명인사가 됐겠네요. 시집도 나오고 이곳저곳에서 인터뷰도 하고. 

“그저 몇몇 사람들이 아는 체를 해주는 정도입니다. 이런 사람도 있었습니다. 발주사항을 적어놓은 칠판에 저 보라고 자작시를 써놓고 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삼행시를 저에게 발표를 하기도 했습니다. ‘노가다’인데, 들어보십시오. ‘노’ 놀고 싶을 때 놀고, ‘가’ 가고 싶을 때 가고 ‘다’ 다시 오고 싶을 때 온다. 얼마나 좋습니까?(웃음)”

성 시인은 펴낸 세 권의 시집은 모두 시인이 직접 겪은 경험을 통해 빚어낸 것이다. 그는 시를 자화상이라고 했다. “거미는 자신의 피로 단백질을 만들고 그 단백질로 거미줄을 짠 뒤 자신의 집을 짓는다. 나에게 시란 이와 같은 것이다. 나의 피로 그려나가는 자화상.”

성 시인은 인터뷰 도중 “가짜가 되지 말자”는 말을 자주 했다. 어시장에서 직접 생활하면서 노동의 의미를 깨달았고 ‘진짜로 쓰고 진짜로 살자’라는 말을 가슴 속에 심었다. 지금도 일을 마치고 짬을 내어 시를 쓰고 있다. ‘화학자’, ‘사랑’에 관한 두 권의 시집을 낼 계획이다. 

대단하다고 하자 성 시인은 기자에게 물었다. “이 세계의 비의와 비의의 내면을 낱낱이 훑어보는 것 그게 나의 계획이다. 너무 비장한가? 아니면 우스꽝스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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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하는 성윤석 시인(오른쪽)./김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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