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 인생에서 끊임없이 유영하는 단상들…

그는 인터뷰 요청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일면식도 없는 서로가 단순히 인터뷰라는 매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 듯했다. 그는 인터뷰를 떠나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원했다. 첫 만남에서 점심을 함께했다. 그는 자신이 쓴 책 세 권을 건네주었다. 일주일간 이 책을 들여다봤다. 그에 대해 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그를 만나 차 한잔 했다. 책을 읽은 후라 대화가 좀 더 자연스러웠다. 다시 조심스레 인터뷰 요청을 하자 그제야 “그럽시다”라고 했다. 인터뷰 자리는 곧 세 번째 만남이었다. 두 번의 만남에서 이미 많은 대화를 나눴기에 무척이나 편했다.

그는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는 김준형(70) 선생이다. 그의 손에서 나온 저서 및 역서는 <미소데땅트론> <1980년 미소관계> <카페소사이어티> <원시미술과 현대미술> <구강의 바다> <마술피리> <여행 그리고 깊은 노래> <창동인블루> <과거의 우물> <플라멩코 이야기> 등이다. 그는 ‘자유기고가’보다는 ‘창동인블루 저자’라 불리길 바라는 마음을 드러냈다. 마산 출신인 그에게 ‘창동’은 그의 인생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그가 하는 생각․행동의 과정은 모두 ‘글쓰기’를 위한 것이라 해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에 빠져든 것은 그리 오래는 아니다. 지금 일흔인 그는 오십에 접어들면서 ‘글에 대한 욕망’을 마음껏 분출했다. 그는 글을 통해 자신의 삶을 드문드문 드러낸다. 그리고 그 삶에는 몇 가지 흔적이 끊임없이 유영하고 있다. 바다·폐결핵·아버지·김용실·창동․플라멩코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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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형 선생./김구연 기자

바다, 그리고 20대에 앓은 폐결핵

그의 내면적인 이야기가 담긴 <과거의 우물>에는 ‘바다는 소년기 놀이터였고, 기르던 바둑이만큼 친숙했다’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바다는 그의 글쓰기 본능을 일깨운 근원이기도 하다. “지금 마산수출자유지역 있는 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집 담 너머가 바로 바다였죠. 새벽의 여명은 아주 강렬했습니다. 새벽에 늘 오리 우는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새벽 5시면 마산 앞바다에 청둥오리 수만 마리가 앉아 있어요. 그 수만 오리의 울음과 비상, 인근 교회에서 들리는 새벽 종소리, 물결소리와 안개…. 그리고 밀물의 가득함과 썰물의 텅 빔…. 이러한 바다가 지금 글 쓰는 사람이 된 잠재적 요소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는 이러한 것을 ‘감수성’ 아닌 ‘호기심’이라고 표현했다. 어릴 적부터 자신보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 물어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어른이 되어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뚜렷한 뭔가는 없었다. 그냥 아이들 몰고 다니며 기분에 따라 엿을 제 마음대로 내놓는 ‘엿장수’에 대한 동경이 있는 정도였다. 다만 그런 생각은 했다.

“동사무소나 은행창구에 있는 직원들이 참 측은하게 느껴졌어요. 저렇게 갇혀서 어떻게 지내느냐는 생각이었던 거죠. 지금도 그런 생각은 마찬가지입니다.”

공부에서 뒤처짐 없었던 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군대에 갔다가 병으로 ‘죽음’을 가까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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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형 선생./김구연 기자

“제도화된, 그리고 갇혀있는 군대에 전혀 적응 못 했죠. 외박 나가서는 시간 지나도 안 들어가고, 그렇게 복귀해서는 엄청나게 두들겨 맞고…. 그런 심리적․육체적 고통 때문이었는지 상병 정도 때 폐결핵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몸이 말이 아니었어요. 부모님이 저를 살리려 애 많이 쓰셨죠. 제가 형제 중에 유일하게 남자인데, 만약 아들 한 명 더 있었으면 아마 포기했을 겁니다. 제 본명이 김원찬이었는데, 이름을 바꾸면 나을까 싶어 김준형으로 개명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그는 4년 만에 병상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지금의 그에게 그 시간은 단순히 병마와 싸운 과정만은 아니다.

“지금 경남대학교 연못 있는 자리에 철도병원이 있었어요. 숲과 건물이 아주 잘 어울리던 곳입니다. 그때 책도 많이 읽고, 음악도 많이 듣고, 사색도 많이 했죠. 생각해 보면 그때가 문학을 위한 본격적인 수련기였지 싶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3·15 열사 김용실

그는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현재 그의 삶에서는 조금 뜬금없는 느낌이 있다. 하지만 어릴 적 그에게 ‘정치’라는 단어는 아주 친숙했다.

“아버지가 민주당에 몸담으면서 정당 활동을 오래 하셨어요. 허윤수 씨가 국회의원(4대 의원) 출마할 때 대책위 본부장도 하셨죠. 허윤수 의원이 나중에 자유당에 들어가면서 아버지도 함께하셨습니다. 제가 마산고 2학년 올라갈 무렵 3․15의거가 일어났는데요, 그때 아버지가 집에 급히 오셔서 가족들을 인근 할아버지 댁으로 피신시켰어요. 그런 와중에 저도 학교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부정선거’에 대한 울분을 드러냈죠. 다음날 집에 와 보니 기둥뿌리만 남아있고 박살이 나 있더군요. 나중에 안 일인데, 우리 집을 부순 아이 중에는 같은 반 친구도 있더군요. 아이들은 제가 그 집 아들이라는 것은 몰랐지만, 저 스스로 상처를 많이 받았죠. 그 당시 자유당의 회유나 말 못할 무엇이 있었다 할지라도, 소위 권력을 선택한 아버지라는 점이 제 머릿속에 크게 자리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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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형 선생./김구연 기자

그는 3․15의거 당시 같은 반 친구였던 김용실을 잃었다. 시위에 참여했다가 당시 북마산파출소 앞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졌다. 그를 떠난 보낸 친구들은 말할 수 없는 마음의 빚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그나마 세속적인데 덜 젖어 있을 수 있는 건 아버지에 대한 부끄러움이 하나이고요, 또 다른 것은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고 1학년 때 반장이었던 김용실이라는 친구의 아름다운 영혼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여러 선택과 고뇌의 시간 속에서 ‘만약 그 친구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늘 떠올렸습니다. 용실이와 당시 희생된 모든 용사에게 저와 친구들은 무엇으로도 다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진 채 살아갔지요. 그러다 50여 년이 흐른 어느 날, 저와 친구 둘이 술자리에서 ‘김용실 추모공연’ 이야기를 하게 됐지요. 술자리에서 ‘공연비는 얼마나 드는데’ ‘까짓거 마련해 보자’ ‘내일부터 작업 개시다’로 연결됐지요. 그렇게 마산고 21회 동기들이 힘을 모으고 제가 연출을 맡아 2011년 ‘김용실 열사 추모공연’을 열었지요. 제 인생에서 정말 열정적으로 일했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창동, 그리고 플라멩코

그는 20대 시절 폐결핵을 이겨냈지만, 온전한 모습은 아니었다. 스스로 다리를 쳐다보니 뼈만 앙상해 나무 작대기 두 개를 땅에 꽂아 놓은 듯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서울에 있는 무역회사에서 일하고, 결혼도 했다. 그러다 마흔 무렵에 마산에 돌아와서는 직장생활, 과외, 대학원 생활을 했다. 꿈틀거리는 ‘글쓰기’에 욕망은 그냥 가슴에만 남겨둔 30․40대 시절이었다. 50대에 접어들면서 마침내 그 마음을 쏟아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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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형 선생./김구연 기자

“결국 의지였습니다. 대학원에서 정치학 공부를 8년 정도 했습니다. 끝내고 나니 그것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 있었어요. 그때부터 다시 책을 폭발적으로 읽게 되었죠. ‘카페 소사이어티’라는 서적을 본격적으로 번역했고, 신문 논설도 한동안 쓰게 됐죠. 그러다 <MBC저널>에 내 삶의 자전적 기록을 담았습니다. 1년 정도 하니 책으로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구강의 바다>라는 책으로 엮었죠. 저는 시적 운율을 가진 자유로운 글을 추구한다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비교적 잘 나타난 것이 <창동인블루>가 아닌가 합니다.”

<창동인블루>는 지나온 삶의 흔적들 가운데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유영하는 단상들을 담은 책이다. 

“창동은 저에게 몇 가지 함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세속적인 부분에서는 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곳입니다. 40살 가까이 돼 마산에 와서 수출자유지역에 들어갔는데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나왔죠. 제가 영어를 좀 해서 생계유지를 위해 과외를 할 수 있었습니다. 창동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유명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학생들을 많이 소개해 주며 제가 그 일을 이어나갈 수 있게 도움 주셨죠. 그다음으로 창동은 마산을 상징하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 속에는 아버지․김용실에 대한 부분이 녹아있지요. 제 아버지에 대한 과거에 대해 내가 보상할 수 있는 무엇을 한다면, 제 자식․손자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김용실이라는 친구에 대한 마음의 빚…. 그런 것들이 합쳐지면서 추모공연 등 3․15 관련 일을 하고, 책에도 담게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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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형 선생./김구연 기자

그는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한 이후 여행을 끊임없이 다녀다. 그 과정에서 스페인 남부지방의 전통 민요․춤인 플라멩코를 접했다.

“바다가 도망치는 것을 찾아 나섰다가 만난 것이 플라멩코입니다. 마산 앞바다에 가득 찬 바닷물이 어디론가 흘러갑니다. 따라가려 하면 점점 도망갑니다. 흘러가는 그 바다를 만나고 싶은 욕구가 동해, 서해, 그리고 해외로 떠나게 했습니다. 그렇게 외국 곳곳을 나섰다가 만난 것이 플라멩코입니다. 우연히 들은 소리의 울림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집시들의 한 없이 매혹적인 음색이 나를 흩트려 놓았습니다. 아버지, 김용실에 대한 갚음의 글쓰기가 이제는 플라멩코와 연관되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김용실 추모공연에서도 플라멩코가 중심이었습니다. 앞으로 플라멩코와 판소리가 어우러진 공연을 기획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 삶이 얼마나 역동적일까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는 5월에 ‘김준형의 그림 읽기’ 강연이 예정돼 있고, 지역 화가에 대한 글 작업을 이어갈 예정이다. 그는 특별히 글 쓰는 공간이 있지는 않다. 스스로 ‘대학 도서관이 근무처’라고 말한다.

“늘 마음을 다 털어서 글을 씁니다. 이제 마지막 책이겠거니 하다가, 또 지나면 빈 마음은 쓸 거리로 채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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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형 선생./김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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