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어머니 스승 삼아 모시고 사는

1958년생인 그이는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에서 태어났다. 낳고 기른 어머니는 김정임씨다. 어머니는 1922년생으로 14살에 시집와서 여섯 남매를 낳았다. 막내아들인 그이를 37살에 낳고 남편을 43살에 여의었다. 어머니 일생의 신산함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된다. 그이는 자기와 같은 개띠인 어머니를 올해로 8년째 모시고 있다. 태어난 고향에서 직선거리로 14km 정도, 육십령 고개만 넘으면 바로 나오는 전북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 해발 620m 산골에서. 아흔을 넘긴 어머니는 치매에 걸렸고 잘 움직이지도 못한다. 

진보운동과 함께한 전희식의 삶

그이를 처음 알게 된 때는 30년 전이다.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벌어진 중공업 남성 노동자 파업으로 80년대 노동자 투쟁의 포문을 열었다는 1985년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파업의 주역이었고 당시 이를 큼지막하게 보도한 신문과 방송 등 매체를 통해 그 이름을 처음 알았던 것이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1982년 대학 들어가 학생운동에 열중하던 4학년 당시는 졸업하면 공장으로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여서 그 이름을 듣고 보는 것만으로도 이를테면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마음이 생기곤 했던 것이다.

파업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른 그이는 그 뒤로 인천을 거점으로 삼아 줄곧 활동했다. 나중에는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 민중당 인천북갑지구당 위원장을 맡아 지내는 등 진보정당운동의 전면에 나서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일로 적지 않게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런 그이를 바라보는 어머니는 심정이 어땠을까? 그이는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한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 으뜸으로 치는 서울에 있는 국립대학교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활동에 나서면서 어머니가 바라 마지않았을 ‘출세’는 기대할 수 없게 됐다.

그러나 보통 진보운동과는 다른 삶

그이를 처음 만난 때는 2012년으로 기억된다. 2010년 그이가 펴낸 책 <엄마하고 나하고>를 읽고 경남도민일보에 서평을 쓴 일이 계기가 됐다. 제목이 ‘치매 걸린 팔순 어머니, 쉰 줄 막내아들의 시골살이’였다. 이렇게 해서 연락을 주고받게 된 뒤, 2012년 경남도민일보 자회사면서 사회적기업인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를 설립·운영하면서 도움을 받으려는 목적을 띠고 전북 장수 그이가 사는 곳으로 찾아갔던 것이다.
그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당시 진보운동과는 다른 길로 접어들어 있었다. 그이는 말했다. “그 때는 아직 ‘귀농’이라는 말조차 있지 않았지요. 1995년인데, 문득 느껴지는 바가 있어서 노동운동 진보정당운동 모두 접고 전북 완주 시골로 들어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거의 20년 가까운 옛날, ‘귀농’이라는 낱말이 그 때도 있기는 했겠지만 대부분에게 낯선 개념이었고 특히 도시에서 진보운동을 하는 이들에게는 생각조차 하기 힘든 선택이었다. 운동으로 하는 ‘귀농’, 조직으로 하는 ‘귀농’은 운동권 통념상 인정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1.jpg
김정임 어르신과 전희식 씨./김훤주 기자

2010년 그이가 펴낸 책 <엄마하고 나하고>는 내용이 매우 놀라웠다. 또 감동적이었다. <엄마하고 나하고>는 그이가 어머니 김정임씨와 함께 쓴 책이다. 어머니와 함께 쓴 책은 이밖에 또 있다. 2008년 세상에 나온 <똥꽃>이 그것이다. <똥꽃>도 <엄마하고 나하고>도 모두 어머니의 치매 덕분에 나올 수 있었다. 치매 걸린 어머니를 몸소 모시고 손수 봉양하는 일은 아무리 생각과 말과 행동이 진보적이라 해도 아무나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건강한 시절 몇 년을 바치리라 마음먹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을까? 6월 7일 그이를 만났을 때 바로 물어볼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앞서 펴낸 <똥꽃>에서 밝힌 바가 있고 이를 두고 한겨레신문 한승동 기자는 서평에서 이렇게 요약·정리했다. 

“3년 전(2005년) 서울 큰형 집에 사는 어머니를 찾아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단독주택 3층 두 평 남짓한 외딴방에서 기저귀를 찬 채 밥과 약을 받아먹으며 두문불출하던 어머니는 막내인 그에게 ‘오줌 누는 데가 따갑다’며 하소연했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일부러 찾아뵌 적이 없었고, 서울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하룻밤 신세를 져야 할 때나 형 집에 들른 김에 어머니께 인사드리는 정도였다. 한 번 얘기를 꺼내면 끝이 없고 냄새가 진동하는 어머니 방에 누구도 오래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10년 전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고관절이 바스러져 철심을 넣은 뒤 아랫도리를 쓰지 못했고 귀도 거의 들리지 않게 됐다. 누워 지내면서 치매가 진행됐다. 작은형이 식사 때마다 어머니 틀니를 칫솔로 닦을 때는 보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해 고개를 돌리곤 했던 그였으나 그날 벌겋게 짓무른 어머니 아랫도리와 하얗게 세어버린 체모를 보고 울었다. ‘그 많은 자식 키우면서 어머니가 똥오줌 묻은 옷이나 걸레를 빠신 햇수만큼은 다 못하더라도 두세 자식 몫은 하리라 마음먹었다. …어머니 살아 계실 때 내 건강한 시절 몇 년을 바치리라 마음먹었다.’” 

2006년 봄 식구들이 사는 전북 완주를 떠나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에서 다 쓰러진 외딴 빈집을 얻어 고친 다음 식구들한테 알리고 이해를 구했다. 같은 해 9월 먼저 혼자 옮겨 간 뒤 2007년 2월부터 거기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그이가 바뀌고 다음에 어머니가 바뀌었으나

그해 봄 어머니는 막내가 들판에 일 나간 사이 똥칠갑을 했다. “작은 똥덩어리는 딱딱하게 말라붙었고 손이나 발에도 똥칠갑이었다. 어머니는 불도 켜지 않고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내가 왔지만 돌아보지도 않은 채 돌부처처럼 가만히 있었다. … 어머니 눈은 겁을 머금고 있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겁먹은 눈초리. 그것은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였다.”

앞서 사람들은 어머니의 말과 행동을 비웃고 무시하고 또 잘못됐다며 고치려고 했다. 어머니의 공포는 뿌리가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그이는 반드시 존댓말을 썼고 드나들 때는 절을 올렸으며, 크고작은 집안일도 낱낱이 알리고 허락을 받는 등 ‘건강보다도 존엄’을 중히 여겼다. 어머니가 ‘맘에 안 들면 당당하게 큰소리치’면서 ‘떵떵거리고’ 살도록 된 배경이다. 

2.jpg
김정임 어르신과 전희식 씨./김훤주 기자

먼저 그이가 바뀌고 어머니가 바뀐 것이다.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바뀐 어머니가 다시 그이를 바꿨다. 어머니의 말과 행동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 좌충우돌이었다. 그러나 그이는 이런 어머니에게서 일관된 무엇을 찾아내어 깨달음으로 나아갔다. <엄마하고 나하고>에 나온다. 

“‘너 아니믄 내가 일찍 죽었을 끼다. 니가 날 살렸다’면서 새벽녘 내 손등을 어루만지며 애달파 하신다. 그러다 한 숨 자고 나면 표변하신다. 삶이란 그냥 한 바탕 꿈인 것을 온 몸으로 증언하신다. 어제 내가 한 선행을 잊으라는 것. 어제 내가 빠졌던 유혹을 넘어서라는 것. 어제 내가 저지른 실수에 더 이상 상심하지 말라는 것. 내일도 모레도 다 허상이요, 실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지금 여기가 온전한 삶이라는 것.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내 미래라는 것. 기억 저 밑바닥으로 침전된 경험들은 정화의 과정에 던져진 것. 잊힘을 자축하라는 것. 실체가 아닌 것들을 왜 짊어지고 끙끙대냐고 오늘도 어머니는 피를 토하듯이 내게 이르신다.”

그이는 이렇게도 적었다. “내가 어머니랑 살면서 생기는 수도 없이 많은 심적 충돌들은 어머니의 말과 행동들이 내 예측과 판단에서 벗어났다고 여기는 데 있다.” 어머니의 말과 행동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못하고) 나름 자기 생각에 따라 기대와 예상과 판단을 하기 십상이고, 그것들이 맞지 않을 때 마음에 괴로움과 좌절과 미움이 솟아난다는 얘기다. ‘생각이나 판단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것은 바로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하되,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데에 있다는 깨달음이다.

3.jpg
전희식 씨와 김정임 어르신./김훤주 기자

전북에 살면서 경남도민일보 구독하더니

그이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물론 어머니를 모시면서도 열심히 활동하는 줄은 알고 있었다. 또 전국귀농운동본부 공동대표를 맡아 경향 각지를 오가면서 주어진 직분을 다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궁금하지 않았다. 경남도민일보에 대해 묻다가 지역신문 하나 없는 장수군 형편을 개탄하더니, 경남이 아닌 전북에 살면서도 어느 날 경남도민일보 구독을 불쑥 신청한 그이였다. 인문학을 주제로 삼아 이런저런 얘기를 오랫동안 하기도 했었는데 그런 그이가 <장수신문> 창간에 나서고 지역 인문학 모임을 꾸리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지난 8년 일관되게 세 가지를 해 왔어요. 어머니랑 같이 사는 일상과 농사, 그리고 사회적 관계입니다. 농사는 규모를 줄였습니다. 2500평에서 400평으로요. 어머니 덕분에 생각도 못했던 강의도 다니고 글쓰기도 하니까 시간이 모자라요. 집 뒤 400평만 무경운, 토종 씨앗을 구해, 혼작을 합니다. 고추와 깨를 같은 땅에 심는 등 섞어 기르면 상보관계가 있어서 좋습니다. 똥오줌 말고는 밭에서 나오는 잡초 따위만 거름을 씁니다. 

5.jpg
▲ 농부 전희식 씨./김훤주 기자

어머니 모시고 글 쓰고 강의하고 시민단체 일하고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느냐고 묻는 분들도 계시는데요, 하하. 특별히 서로 다른 일이 아니라서요. 농사, 어머니, 사회적 관계 자체가 다 글쓰고 강의하는 주제·소재니까요. 그리고 총체로 하나로 연결돼 있기도 하고….”

어머니 ‘덕분’이라 했다. 괜한 겸손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치매 걸리고 거동까지 불편한 어머니를 모시지 않았다면 <똥꽃>이나 <엄마하고 나하고>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테고 그로 말미암은 세상의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텔레비전 출연도 없었을 것이고 강의 요청이나 원고 청탁도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머니와 더불어 살면서 얻게 된 깨달음이 적어도 지금만큼은 클 수도 전면적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장수신문>과 ‘농민생활인문학’도 주도

그이는 이날 경남도민일보가 아주 재미있고 잘 만든다고, 서울에서 발행되는 어느 신문보다 낫다고 칭찬을 했다. 지난 시절에는 경남도민일보 창간사와 ‘21가지 약속’, 규약·규정 따위를 달라고도 했었다. 분명 창간준비 2호까지 나온 <장수신문>과 관련돼 있을 것이다.

“장수신문 발행 주체인 장수언론협동조합 발기인일 뿐 별다른 역할은 없습니다. 운영위원회나 총회를 할 때 원칙이나 이런 데 대한 논의 말고 구체적으로 독자 확보 사례 발표라든지 부문별 정보·자료 수집해 집중하는 일 이런 것을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요. 실제 필요한 것들이거든요. 광고 단가도 정교하게 다듬어 장기 계약 단가는 따로 책정하고 이미지 광고도 달리 마련할 필요가 있어요. 

6.jpg
▲ 농부 전희식 씨./김훤주 기자

지역 신문에서는, 먼저 지역 판세나 주민 생활 정서 요구 판독이 전제돼야 합니다만, 비판과 견제는 10%로 중심이 돼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지역에 활력을 넣어주고 관심사를 포착하고 확산하는 신문이 돼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생활 속 지면 사랑방으로 나가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정치도 삶 속에서 삶과 연결되는 이슈가 나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기 고향에 대한 막연한 애정·애향이 아니라 구체적인 참여가 될 수 있는 구체적인 공간으로 <장수신문>을 생각합니다. 장수에 사는 사람, 장수 출신 사람, 장수를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신문이 돼 가겠다고 생각합니다.” (함께한 <장수신문> 최덕현 편집장이 ‘독자 확보를 무지막지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신문 만들 때 뒤에서 백그라운드를 했다. (장수시민연대 공동 대표를 맡고 있는데) 시민연대에서 힘을 실어줬으며 신문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공감을 끌어내는 데 역할을 많이 했다’고 거들었다.)

그이는 지역 인문학 공부 모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었다. 지난해는 어떻게 사람을 모으고 어떻게 꾸려갈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인터넷에서 봤더니 이미 ‘농민생활인문학-닦음과 행함’이라는 모임이 만들어져 운영되고 있었다.

“전국귀농운동본부 공동 대표 3월에 그만뒀어요. 대신 녹색당 ‘농업먹거리특별위원장’을 맡았어요. 2020년대에도 지금 농법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자해농업입니다. 자해문명이고요.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같은 요인을 더 가속화하는 농법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형 마트에 가면 친환경농산물이나 유기농산물 코너가 따로 있잖아요? 그렇지만 선진 외국에는 유기농·친환경을 넘어서 ‘소농’ 코너가 생기고 있습니다. 석유의존도를 획기적으로 줄인 농사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제가 대표를 맡고 협동조합 형식인데 아무나 가입비와 월회비 1만원씩만 내면 조합원이 될 수 있습니다. 강좌는 무료로 비회원도 누구에게나 개방되지만 회원은 월회비를 내야 합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돈 내는 자체를 긍지로 삼을 수 있도록 하자는 얘기지요. ‘농민’과 ‘생활’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삶의 근본을 들여다보고 만물 존재의 근원이 한 뿌리임을 보자는 얘기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모두 농민입니다. 전문가가 따로 있어서 ‘너희들도 인문적 소양을 좀 높여라’ 이런 인문학이 아닙니다. 실제 삶이 바뀌는 인문학 모임, 닦음과 행함이 뜻하는 바가 바로 자기 성찰과 자기 성숙입니다. 모든 지식과 강의는 나를 더욱 고양시키고 온유하게 만들고 베풀게 만들고, 생활과 결합되도록 하고 그런 것이 또 당연히 사회적 맥락에 놓이게 합니다. 

8.jpg
농부 전희식 씨가 거처하는 시골 농가./김훤주 기자

120년 전 선조들은 동학농민전쟁에 나섰습니다. ‘척양척왜’ ‘파사현정’을 내걸고 말입니다. 요즘처럼 쌀값 양파값 마늘값 떨어졌다고 걱정하지 않았거든요. 동학혁명 생각하면 ‘쪽팔립니다’. 여태껏 농민들이 농민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이슈를 제기해 본 적이 없어요. 동학농민전쟁 120주년인데도 농민조직에서 성명서 하나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얼핏, 그이가 고향 함양이나 아니면 경남 어디로 옮겨올 수는 없을까 싶었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지역 사회를 위해 애쓰는 모습이 남달라보였기 때문이다. 또 어머니를 모시면서 더욱 그렇게 바뀌었지 싶은데, 그 욕심 없는 모습 또한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우리 경남과 창원에 그이와 같은 사람이 무척 드물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면서 동시에 장수군민이지 않습니까?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일이 주어진다면 말씀이지요. 지금은 집중해서 장수에서 살고 있을 뿐입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