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전쟁터에서 사망한 선배 군인 영령들 집안에서는 국가가 주는 연금을 탔다. 또한 상이용사라는 이름으로 보훈병원에서 치료 나와서 손발이 없어서 고생하시는 분들에게는 충분하진 않아도 수당을 드렸다.

그런데 전쟁 속에서 무사히 살아 나오신 사람들의 대우가 김대중 정부 들어서 시작되었다. 18만여 명의 6·25 참전 생존자가 있는가 하면 35만여 명의 월남참전 생존자가 있다. 이들은 지금 허울 좋은 국가유공자이지 정식으로 대우받는 것이 무엇인지 따지고 싶다. 6·25전쟁 참전용사는 대개가 80세 이상이다. 그리고 월남전 참전용사들은 64세 이상에서 시작된다. 이런 국가 유공자들이 국가의 부흥을 위하여 살아온 삶이 자녀를 기르고 가족부양 의무 때문이었다. 6·25 참전용사는 남북의 전쟁 속에서 국가와 민족을 지키려고 수십만 명이 전사하고 수백만 명이 참여하여 살아남은 어르신들이 이제 다수가 80이 넘어서 귀도 어둡고 눈도 어둡고 거동마저 불편하다.

그래도 이분들이 귀가 어둡고 눈이 멀어서 신체가 말을 듣지 않아서 고생하지만, 손짓 발짓으로 6·25 당시를 회상해 보려고 하지만 잘 기억하지 못한다. 창녕군에 집결하여 부산으로 가서 배를 타고 제주도 훈련소에 들어가서 훈련 몇 주 받은 것은 잘 아는데 어느 전투 어느 곳에서 참여하였는지를 기억해 내지 못했다. 우리 면내에는 6·25 참전 국가유공자가 28명, 월남참전용사 국가유공자가 4명이 있다.

이들을 앞앞이 만나보지 못했지만, 필자가 월남전에 참여했기에 그 실상을 대략 안다. 1964년 이후 월남을 갈 때는 그 누구라도 배편으로 갔다. 그리고 독일 광부 이민, 간호사 이민과 함께 시작되었다.

각종 병과에 따라서 근무지가 정해지고 전쟁의 현장에서 총부리를 겨누면서 먼저 죽이지 않으면 먼저 죽는다는 일념으로 베트콩과 마주했다. 이런 실상에서 가끔 안전을 볼모로 이기고 보자는 그런 용기를 가지지 않으면 전쟁터에서 싸우는 이들은 가끔 희생자들이 나왔다. 잠시 잠깐이라도 월맹군은 게릴라전을 펴기에 언제나 아군이 먼저 당한다. 앞에서 선발대로 나아가는 병사들이 먼저 그놈들의 눈에 띄어서 목숨을 잃을 때가 많았다.

대략 여기까지 말을 정리해보면 억울하게 죽은 자가 많고 6·25 전쟁에 참전하여 내 나라 내국민을 위하여 싸워서 평화를 얻었다. 아직도 남북의 이산가족이 64년이 지나가는데도 국가유공자 예우는 많이 부족하다.

월남참전 5000명의 희생자는 미국을 대신하여 총알받이가 되었다. 이들 가족은 무슨 영문도 모르고 전쟁터에 자식과 형제를 보내 먼저 보낸 자식과 남편의 아픔을 안고 산다. 이런 6·25 월남참전 국가유공자들의 고생과 희생으로 바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됐다.

위정자들은 말로만 국가유공자 처우개선을 크게 해야 한다고 한다. 나라와 국가를 위하여 일한 젊은 청춘들이 6·25와 월남 전쟁에 참여하여 나라발전과 국민의 안위와 가족들의 행복과 화합을 지켜주어야 할 의무가 국가에 있다.

가까운 예로 월남참전용사가 호주로 가족 이민을 갔는데 15일에 한 번씩 우리 돈으로 150만 원을 연금으로 지급한다고 한다. 호주는 외국인 참여자에게도 유공자 예우를 해 주는데 우리는 이게 뭔가? 참전 수당 7만 원, 65세 이상 보훈연금 17만 원 등이 전부이라고 한다.

   

과연 그 가난한 유공자가 24만 원으로 생계를 꾸려갈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65세 이상 100세까지의 국가 유공자들의 안위와 생활여건을 두루 살펴서 국가유공자 예우법을 고쳐서 그들이 나라 위해 바친 공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삶이지만 국가가 갚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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