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이라 더 많이 배우고 공부해야 했다"

34년 만에 경남지역에서 사립 특수학교가 문을 열었다. 해강복지재단(이사장 조학환)이 설립한 창원동백학교다. 지난 80년 개교한 거제애광학교에 이은 두 번째 사립 특수학교로 도내 9번째 특수학교다. 지난 3월 28일 전교생 30명과 개교식을 한 창원동백학교, 이 자리에서 조학환 이사장(72)은 꿈이 이뤄진 날이라고 말했다. 눈이 아니라 가슴으로 세상을 보는 조학환 이사장을 4월 완연한 봄날 만났다.

4살 때 앓은 열병 그리고 시각장애

1942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난 그는 힘들고 그늘진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4살 때 앓은 열병으로 시력을 잃고 집을 나와 무작정 서울로 갔다는 조학환 이사장.

“4살 때 열병을 얻었어요. 살던 곳이 시골이라 변변한 의료시설도 없었죠. 해열제가 없어 민간요법으로 치료만 했는데 석 달 만에 앞이 잘 안 보이더라고요. 그제야 병원에 갔지만 이미 늦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4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장애인이 되는 순간부터 외톨이였다.

조학환 해강복지재단 이사장./박일호 기자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과 형제들이 한집에 살긴 했지만 늘 혼자였어요. 밥상 한번 가족들과 마주하지 못했고 옷가지 하나 양말 하나도 제대로 입지 못했죠.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가족들마저 천대하고 멸시했습니다. 친구라고는 뒷동산에 있는 나무와 새들뿐이었습니다. 외롭고 힘들고 배고플 때마다 구박받기 싫어 뒷동산에 올라가 나무와 얘기하고 새소리 따라 노래를 불렀죠.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그런 그에게 죽음의 문턱도 몇 번이나 찾아왔다. 장티푸스에 걸렸지만 방에 갇혀 있다 죽을 고비를 넘겼고 ‘병신자식’으로 사느니 차라리 농약을 먹고 죽으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극약을 먹었던 날까지.

조학환 이사장에게 어린 시절은 고난과 학대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그는 15살 때 가출을 감행했다. ‘집보다 낫겠지’라는 생각에 지팡이 하나 들고 세상으로 들어갔다. 그의 목적지는 서울 ‘삼육고아원’이었다. 장애인을 받아 준다는 말만 듣고 찾아갔다.

“저에게 인권은 없었어요. ‘어디 한 군데는 나를 받아주는 곳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무작정 집을 나와 열차를 탔습니다. 집을 나온 첫날밤, 잘 곳이 없어 역 처마 밑에 서 있는데 종업원이 가라며 밀쳐 내더라고요. 그래도 다행히 많은 사람이 불쌍히 여겨 도와줬어요. 앞을 못 보는 나를 위해 어느 한 분은 제 사정을 쪽지에 적어 제 손에 쥐어줬고, 무일푼인 나를 위해 해군 아저씨가 돈을 주더라고요. 비 오듯 눈물이 쏟아졌어요. 아마도 해군이 아니었다면 저는 어떻게 됐을지 모르죠. 여인숙에서 한밤을 보내고 불구자도 받아 준다는 서울 삼육고아원을 찾아갔습니다.”

여기서부터 조 이사장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배워야 한다는 집념이 생겼다.

조학환 해강복지재단 이사장./박일호 기자

배워야 살 수 있다

삼육고아원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그때 그는 큰 결심을 했다. 배워야 살 수 있다고.

“맹학교가 미국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원장 선생님을 졸랐습니다. 대구에 있는 광명학교에 보내달라고요. 당시 서울에 있는 맹학교에 자리가 없어 갈 수 없었거든요. 6개월 동안 빌고 졸라 대구로 갔습니다.”

하지만 학창시절도 추위와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하루에 한 끼만 먹는 날이 많았고 잘 먹으면 두 끼였다. 당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주위 아이들은 무턱대고 독성이 있는 풀을 뜯어 먹고 죽기까지 했단다. 그야말로 복지는 찾아볼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는 어려움 속에서 배움만 생각했다. 그리고 꿈이 생겼다.

“배워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12년 교육을 마치고 졸업을 했습니다. 혼자 대구에서 지내다 보니 가족 생각이 나잖아요. 그리운 마음에 방학 때 평택을 찾아갔어요. 교육을 받고 공부를 한 덕에 가족들에게 내 주장과 의견을 말하게 됐고 그제야 가족도 저를 사람다운 대접을 해주었습니다. 그때 확실히 깨달았죠.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배워야 한다는 것을요.”

중간에 낙오하는 친구들, 전학 가는 아이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학교를 나가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그는 참고 인내했다. 점자공부는 물론 정규대학까지 무사히 마쳤다. 리더십을 발휘해 학생 간부도 맡고 각종 학교 행사 때 사회자를 보면서 학생들을 이끌었다. 지도 교사로부터 통솔력이 뛰어나다는 칭찬과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격려는 그에게 큰 힘이 됐다.

그때 그는 꿈을 꿨다. 학교를 세우자고. 자신과 같은 처지인 많은 사람을 위해 교육기관을 만들어야겠다고.

1968년 졸업을 한 조학환 이사장은 무작정 마산으로 향했다. 가진 거라곤 ‘용기’뿐이었던 27살 청년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마산에 학교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산은 당시 7대 도시에 속했지만 시각장애인을 위한 맹학교가 없었다. 이것이 그가 이제껏 마산에 사는 이유가 됐다.

조학환 해강복지재단 이사장./박일호 기자

마산에 맹학교를 세운 이유

“마산에 막상 내려와 보니 막막하더라고요. 하지만 꿈이 있어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안마와 침술로 생계를 꾸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마다 피리를 불며 골목길을 누볐다.

“여관 주변으로 피리를 불고 다녔어요. 그러면 안마사를 부르죠.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몇 시간씩 걸어 다니다 하수구에도 여러 번 빠졌지요. 그러다 너무 힘들어서 가족과 동반자살까지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래도 일어섰습니다. 버텨야 했었죠.”

가족은 조학환 이사장에게 큰 버팀목이었다. 대구 맹학교 시절 만난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한 그는 일요일이면 아내와 딸과 교회에 다녔다. 신앙의 힘도 얻었다.

침과 안마로 한 푼 두 푼 돈이 모이자 그는 장애인을 위한 보금자리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마산에 온 지 30여 년이 지난 참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조학환 해강복지재단 이사장./박일호 기자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해야 했는데 시각장애인이 법인을 설립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몇 년이 걸려 설립허가증을 받던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직접 액자를 사서 설립허가증을 끼워 품에 안고 감격에 겨운 기도를 한 날이요.”

조학환 이사장은 2001년 6월 2일 해강복지재단 법인설립인가를 받았다. ‘해강’은 그의 호(號)다. 바다 해(海)에 언덕 강(崗), 바다가 보이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바로 장애인을 위한 보금자리를 만들자는 뜻이다.

그는 가장 먼저 중증장애인거주시설 ‘해강마을’을 세웠다. 2003년 개원해 연령에 상관없이 중증장애 1·2급을 가진 장애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가정과 같은 생활환경 속에서 일상생활 서비스는 물론 다양한 프로그램 활동과 재활, 치료, 상담 등을 통해 행복한 삶을 돕는 거주시설이다.

그리고 2009년 지적장애인거주시설 ‘꿈의 동산’을 개원했다. 지적장애인에게 각종 재활서비스를 제공하고 사후지도를 통해 사회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다.

또 장애 영·유아거주시설 ‘초록나무’는 장애로 가정에서 돌보기 어려운 6세 미만의 영·유아들이 살고 있다. 초록나무는 아이들에게 개인별 발달 수준에 맞는 보육을 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이 세상은 행복하고 꿈과 사랑이 있는 곳임을 알려줘야 합니다. 날마다 좋은 꿈만 꾸며 살아갈 수 있도록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는 곳이지요.”

조학환 이사장은 아이들이 세상에 한발 한발 나아갈 때 맞닥뜨리는 두려움을 걷어주고 싶다고 했다.

해강복지재단은 장애인 보호작업장 ‘참 좋은 F(Food)&D(Distribution)’도 세웠다. 시설장애인과 재가 장애인이 함께 일하는 곳으로 친환경 생산, 식자재 도소매, 임가공사업, 기타 생필품 도소매사업도 하고 있다.

조학환 이사장은 이들 시설 모두 마산 구산면에 세웠다. 마산 시내에서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시골이다.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장소죠. 공기도 좋고 경치도 좋지요. 저는 볼 수 없지만 바다 냄새와 산 냄새로 압니다. 구산면을 택한 이유는 지금도 그렇지만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 때문이었죠. 장애인시설을 시가지에 조성하면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죠. 그래서 구산면을 찾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곳입니다. 지금은 로봇랜드 조성 공사가 한창이라 발전 가치도 높은 곳이기도 하지요. 제가 앞은 못 보지만 미래를 예측하는 선견지명은 있습니다.”

그의 열정으로 반동초등학교 입구에 이정표가 세워지고,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던 길은 아스팔트로 포장이 됐다.

그리고 지난 3월 이곳에 창원동백학교가 세워졌다. 그의 평생 꿈이 이뤄진 것이다.

‘도가니 사건’후 위축된 법인들, 대책 나와야

“학교설립 인가서를 받던 날도, 개교식 때도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죠. 장애인에게 오로지 교육만이 살길이라는 지표를 가지고 평생을 살아왔고 제 염원이었던 특수학교설립이라는 꿈이 실현되던 날. ‘마침내 해냈구나’라는 생각에 기뻤지만 그동안의 힘겨웠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환경 속에서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저 감사합니다.”

조학환 이사장은 장애인 복지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립’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이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아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직업을 가져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

이로써 해강복지재단은 재단 설립 13년 만에 생활과 교육, 직업까지 생애주기에 맞춘 복지 시설을 갖추게 됐다.

“좀 더 일찍 재단이 설립되고 학교가 개교했더라면 장애인들에게 더 많은 혜택과 기회를 줄 수 있었을 텐데…. 우리나라 복지 정책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장애인 복지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같은 생활조건과 안정을 도모하는 것인데 우리나라 복지는 여러모로 부족하지요. 그리고 한탄한 일은 사회여론이 당장 앞에 놓인 일만 크게 부각시킨다는 것이죠. 오래전 국가가 할 수 없었던 복지사업을 위해 재산을 투자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투명하게 운영하는 법인이 많은데 ‘도가니 사건’ 이후 법인들이 많이 위축돼 있습니다. 순수한 법인과 시설에 대한 모욕을 삼가야 합니다.”

조학환 해강복지재단 이사장./박일호 기자

그는 일부 잘못한 법인이나 시설 때문에 다른 복지재단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정부가 객관성과 중립성을 가지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이를 제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경남지부장과 경남사회복지법인 대표자협회 회장 등 활발하게 외부활동을 하는 조학환 이사장은 이번 6·4 지방선거 때 장애인 관련 정책을 적극적으로 알릴 계획이다. 행정기관과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장애 관련 선교 사업 하고 싶어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비장애인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점이 많다는 조학환 이사장. 그는 장애인들이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배움의 기회를 주려고 했고 그래서 학교가 필요했다고 수없이 강조한다. 쓰레기통에서도 장미꽃은 필 수 있듯이 장애인이라 할지라도 천부로부터 받은 저마다 타고난 잠재력이 있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교육의 힘’이라고 했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온 날이 너무도 오래되어 다른 생활은 비장애인과 거의 비슷합니다. 지팡이 하나면 어디든 갈 수도 있고 요즘은 도우미서비스가 잘되어 있기 때문에 다니는 데는 별 지장은 없습니다. 단지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못 본다는 것과 쉽게 영화를 볼 수 없어 아쉽죠. 점자 도서관을 통해 필요한 책을 듣기는 하지만 한계가 있고, 영화도 장면은 볼 수 없으니 줄거리 파악에 다소 어려움이 있거든요. 그래도 행복합니다.”

창원동백학교에 이어 전문 유치원과 전공과(전문대학)를 개설하고 싶다는 그는 이제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바로 가정이다.

“비장애인의 삶처럼 학업을 끝내고 직업을 갖게 되면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장애인 가족을 위한 행복한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한평생 시설에서 혼자만의 외로운 삶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더불어 사는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제게 더 많은 시간과 건강이 허락한다면 후진국으로 가서 장애인 복지 선교 사업을 비롯한 교육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장애인을 위해 살아왔듯 앞으로도 제 남은 인생은 저와 같은 장애인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조학환 이사장은 평생을 신뢰와 정의, 사랑을 가슴을 새기고 실천에 옮기고 있다. 그는 ‘안 돼’라며 쉽게 포기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큰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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