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여정, 지리산 물에서 비롯됐다

지난해 8월 함양에서 흑돼지를 취재할 때였다. 흑돼지 사골로 국물을 냈다는 국밥집에서 식사와 취재를 마치고 나오며 그곳 주인에게 간단하게 몇 가지를 물었다. 양념은 무엇이며 사골 육수는 어떻게 내는지 등이었다. 평범한 대화가 이어지다 뜻밖의 말을 들었다.

"물이 제일 중요하죠."

주인은 사골 육수를 내는 데 물이 가장 중요하다고 몇 번을 강조하면서 여기선 반드시 함양물만 쓴다고 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그 말이 자꾸 생각났다. 그리고 막연하게나마 어쩌면 좋은 물이 가장 훌륭한 식재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하동 재첩을 취재하기 위해 섬진강에 발을 담갔을 때 다시 그 생각이 났다. 섬진강 맑은 물에서 보석처럼 올라오는 재첩을 보니 이 물이 진짜 보배구나, 이 물이 있어 다 가능한 일이었다 하는 확신이 들었다. 이 연재의 반환점을 도는 시기였다. 그래서 취재팀은 이 연재의 마지막 소재로 '물'을 해보자는 결의를 다졌었다.

1바위틈에서 흘러나온 물이 고여있는 천왕샘. 

해발 1915m, 면적 483.022㎢, 우리나라 최고의 국립공원이며 국립공원 중 가장 넓은 면적인 지리산.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영험한 기운이 높아 많은 은자들이 거쳐 가는 영호남의 지붕. 해발 1500m가 넘는 20여 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지며 깊은 원시림과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룬 곳. 천왕샘에서 비롯한 맑고 찬 물이 사시사철 계곡을 타고 내리는 곳. 이곳이 지리산이다.

남강의 발원지라 알려진 천왕봉 바로 아래 천왕샘은 함양·산청을 거쳐 진주·의령으로 흘러 남강이 되고 진양호 아래로 내려 사천만에 이른다. 또한 이 물은 덕유산에서 내린 섬진강과 만나 하동을 거쳐 남해 앞바다로 흐른다.

지리산 물은 산에서부터 약이 된다. 지리산 물을 머금은 고로쇠 수액은 미네랄이 풍부해 신경통과 위장병 성인병 등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여기 자작나무 줄기에서 나오는 수액도 곡우(穀雨)를 전후해 마시면 속병에 좋다.

또한 이 물을 먹고 자란 어린 찻잎을 곡우 전에 따 덖어 차를 내 마시면 몸에도 좋거니와 마음 공부에도 도움이 된다. 이뿐이랴, 취나물, 고사리, 밤 등은 지리산과 지리산 물이 주는 선물이다.

2이 물은 산 중턱에서 이미 위엄있는 모습으로 바뀌어 있다.

뿐만 아니다. 섬진강으로 내려온 물에서 은어, 참게, 재첩이 산다.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이것들은 대대로 여기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하동군 용강리 쌍계계곡에서 나물을 말려 파는 황말례(67) 씨는 말 그대로 지리산에 업혀 산다. 지난봄 늦게 딴 찻잎을 비비고 덖은 중작과 대나무순, 토란 줄기 등을 소쿠리째 팔고 있다. 그는 무엇보다 여기 밤이 최고라고 한다.

경호강을 거쳐 남강으로 내린 물은 진양호에서 모였다 다시 내려가며 수박과 딸기 등 각종 채소와 과일을 키운다. 이 물이 없었다면 함안과 의령 등지의 길게 줄지어 선 비닐하우스단지들은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은 농산물의 양분이 되기도 하며 비닐하우스 내 온도조절까지 담당한다. 진주의 딸기농가에서 만났던 한 농민은 물이 없었다면 하우스 딸기는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비닐 지붕으로 지하수를 내리면 저절로 난방이 된다. 보일러가 필요 없다.

남강 주변의 법수, 용덕, 지정, 대산 등지는 모두 이 덕을 보고 있다. 이 물은 다시 낙동강과 합쳐져 흐르며 단감과 각종 채소를 키운다. 지리산에서 내린 물이 해수와 섞여 양분이 많은 조건을 만들고 그 물을 타고 내려온 모래와 펄이 개펄을 만든다. 전어, 털게 등이 그 속에 산다. 날이 가물면 섬진강에서 내린 물이 하동읍까지 후퇴한다. 그래서 하동읍에 인접한 섬진강에서 전어가 잡히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바다에서 증발한 물이 구름이 되어 북상하다 지리산을 만나 대지에 내리고 그 물이 다시 남해로 내려왔으니 발원지가 어딘지 따져 묻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다.

지리산은 남동쪽의 저기압 통과가 잦아 남해로부터 오는 고온다습한 바람이 남동사면에 부딪힐 때 비가 많이 내린다. 또한 강설량도 많아 연평균 강수량이 1200~1600mm나 된다. 남부지방 평균 강수량보다 200mm 정도 더 많은 편이다.

또한 비나 눈이 오지 않아도 연중 대부분 짙게 깔리는 구름은 상시적으로 지리산에 물을 내린다. 기온 차에서 생기는 이슬 또한 오롯이 이 산으로 스민다. 그래서 언제 찾아도 맑은 계곡물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지리산이다.

풍부한 산소와 낮은 온도, 암반을 타고 내리는 미네랄 성분이 풍부한 지리산 물은 좋은 물의 조건을 두루 가졌다. 때문에 이 물 자체로 훌륭한 식재료가 된다. 남원에서 만난 묵 만드는 소영진 씨는 "묵은 물이 90%"라고 했다. 지리산이 잡힐 듯 보이는 곳에서 직접 판 지하수로 쓴다. 그 양도 풍부해 그의 작업장 앞뜰엔 아무나 먹을 수 있게 우물을 개방해 놓았다. 물이 풍부하니 인심도 풍부해졌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에서도 전통가양주로 유명한 '솔송주'에서 판 우물을 마을 사람들이 함께 쓴다.

함양양조장 하기식 대표도 물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다고 했다. 함양읍 중심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그의 양조장이 있다. 물 또한 그 자리에서 뽑아 올린다.

산은 사람을 가르고, 강은 사람을 모은다고 했다. 하지만 산에서 내린 물이 이처럼 사람들을 모이게 했으니 산이 사람을 가른 이유도 알 것 같다.

이 좋은 물을 '흔쾌히' '함께' 나눠 쓸 만큼 적당히 사람을 갈라놓은 것. 그게 지리산이다.

3사천만에 다다른 물은 또 정처 없이 그 어딘가로 흘러간다.

물이나 미네랄은 칼로리가 전혀 없다. 무기질 영양소인 미네랄은 물의 인체 흡수를 도우면서 인체의 자기치유능력을 높인다. 실제 그리스 철학자 핀다로스(Pindaros)는 "물은 최고의 의사"라고 했다는 말도 전해온다. 동의보감에서도 좋은 물은 안색을 곱게 해주고 살결이 고와지며 눈을 밝게 해준다고 나와 있다.

지리산 물은 각종 미네랄과 게르마늄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특히 혈관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용존산소량이 많아 체질개선과 질병치료에도 좋다고 한다.

그렇다면 좋은 물의 조건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들을 뽑아 봤다.

1. 유해한 세균이 없을 것.

2. 미네랄 성분이 고루 들어 있을 것.

3. 차고 투명하고 가벼우며 냄새가 없을 것.

4. pH가 8.5 이하인 약 알칼리성의 물일 것.

5. 산소가 풍부할 것.

4또 다른 줄기를 타고 섬진강에 다다른 지리산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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