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학생들 위해 130억 원 장학재단 설립하다

‘우파장학회’ 설립자이자 재일교포 사업가인 우파(愚波) 최영석(85) 회장이 장학 재단에 30억 원을 추가 출연하기 위해 지난 2월 26일 마산에 왔다. 2월 25일은 어머니 제사였다고 했다. 최 회장이 장학재단에 30억 원을 추가 출연하면서 우파 장학기금은 모두 130억 원으로 늘어났다.

최영석 회장은 마산합포구 진전면 출신이다. 최 회장은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지난 1973년 마산상고에 1억 원을 전달하면서 우파장학재단이 태동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최 회장은 1997년 5억 원으로 우파장학회를 설립한 뒤 1999년 5억 원, 2000년 10억 원, 2007년 30억 원을 추가 기탁하면서 2011년에는 100억 원의 기금을 마련했다.

그리고 우파 장학회는 2010년부터 창원지역(마산·창원·진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 40∼45명을 선발해 1인당 500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또한 최 회장의 모교 용마고등학교 재학생 및 졸업생 50명에게 매년 1억 5000만 원 이상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와 함께 모교 기숙사에 고급 침대를 사비로 기증하는가 하면 학생들의 학업에 필요한 장비 등을 꾸준하게 기탁하고 있다. 유년시절 모교인 진전초등학교에는 도서관을 신축했으며, 경상남도 장학사업(경남미래교육재단)에도 2011년 1억 원을 기탁했다.

우파장학회 설립 후 지금까지 지원된 금액은 30억 원이고, 혜택을 받은 학생은 1000여 명에 이른다.

우파 최영석 회장./박일호 기자

혈혈단신 ‘현해탄’을 건너다

“그 당시야 다 어려웠지,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한국에 온 최 회장을 어렵게 만났을 때, 최 회장은 첫 마디는 이러했다.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별로……90이 다 돼가니까, 기억력도 없고, 다 잊어버리고 모르겠습니다. 눈도 침침하고 귀도 먹먹하고…….”

그러면서도 최 회장은 어릴 적 고향 이야기와 일본에 건너갈 당시 상황을 조금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숲골’로 불리기도 하는 진전면 임곡 출신인 최 회장은 1951년 일본으로 밀항했다. 진해 속천항에서 배를 탔다. 거제도로 가는 것으로 속이고 탄 배였다. 낮 12시에 출발한 배는 밤 12시가 되어서야 대마도에 도착했다.
마산상고를 졸업한 이듬해였고,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았을 때 일이다.

가장 궁금했던 건 밀항 배경이었다. 그러나 최 회장의 설명만으로는 그 배경을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제가 장남입니다. 6남매 중에 맏이지. 배워보고 싶었는데, 집에서 농사지으라고 하니까 도망간 거지요.”

그렇게 해서, 처음에는 대마도에서 2개월을 보냈다. 제주도 출신 선장이 몰던 ‘머구리 배’를 탔다. 최 회장이 했던 일은 두 명이 한 조가 돼 펌프질을 하며 잠수부에게 공기를 주입해주는 것이었다. 힘든 노동을 해본 경험이 없었던 최 회장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야 이놈아, 그렇게 하면 잠수부가 죽는다’는 소리를 들으며 매를 맞기도 했다.

우파 최영석 회장./박일호 기자

그리고 2개월 후, 최 회장은 일본 본토로 또 한 번의 밀항을 시도하게 된다. 대마도에서 본토로 건너가던 연락선이 있긴 했으나, 한국전쟁 중이라 검문이 삼엄했다. 그래서 어선 저장고에 숨어서 본토로 들어갔다. 일본에 들어가서 무엇을 해보겠다는 뚜렷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요새 생각해봐도 왜 그랬을까 싶어요. 젊은 시절이니까. 좌우간 가자, (일본에 간) 이유를 붙이자면 여러 가지 있겠지만, 잘 모르겠어요.”

- 고생을 많이 하셨을 텐데요.

“큰 고생 안 했어요. 만나는 사람들이 다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혼자서 하면 뭐 됩니까. 주위 도움 받아서 그냥저냥 오늘날까지 오게 됐거지요.”

정말 그냥저냥 오늘날까지 오게 된 것일까?

1950년대 일본 경제 사정도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굶는 날이 많았다. 그 와중에서도 최 회장은 메이지대 상학부에 입학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밥도 못 먹을 때고, 일자리도 없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한다 해도 노동 일이 쉽지도 않았지요.”

- 메이지대에 들어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그 당시야 뭐, 크게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그 곳(일본)도 (사회가) 뒤죽박죽이었으니까. 그렇게 중도에 그만두고 나니, 학력이 있나, 돈이 있나, 국적이 있나, 어디서 온 사람인지도 모르고, 처음에는 애로가 있었지만, 만나는 사람들이 다 좋았습니다. 큰 고난은 없었어요.”

- 끼니를 거를 때도 잦았다면서요.

“그 시절에 다 그렇지요.”

우파 최영석 회장./박일호 기자

거친 파도에 몸을 맡기고, ‘우파(愚波)’라고 되뇌다

최 회장이 일본으로 건너갈 당시 마산상고를 졸업한 학생들은 주로 은행에 취직하든지 교육계로 진출했다. 교육계 진출은 마산상고 5∼6학년 재학 중 심리학과 교육학을 100시간 이수하면 교원 자격증이 나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최 회장은 밀항을 선택했다.

그리고 ‘현해탄을 건너던 중 최 회장의 가슴에는 한 단어가 새겨졌다. 어리석을 우(愚), 물결 파(波)’. 작은 돛단배에 몸을 실은 최 회장은 거친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고, ‘우파’라고 되뇌었던 것이다.

“큰 뜻은 없어, 배를 타고 가니까. 직감적으로…. 파도를 보면서 덧없었으니까. 바람 치는 대로….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우파 최영석 회장./박일호 기자

- 다시 한국에 오신지는 언제였습니까.

“음…. 오사카 엑스포가 1970년에 있었으니까. 1971년인가 72년인가 그랬던 것 같아요. 일본에 간지 한 20년쯤 됐을 땐가….”

아버지는 최 회장이 일본으로 건너간 후 2년 만에 운명했다. 고향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1995년까지 생존했다. 최 회장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때를 또 이렇게 기억했다.

“심장 협심증으로 돌아가셨는데, 그때 관서 지방에서 지진이 아마 났었지요.”
최 회장이 모교인 마산상고에 장학금 1억 원을 기탁한 건 1973년이었다. 밀항한 지는 20년이 지났고 일본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닦았을 때였다.

“서울에 있던 친구한테서 마산상고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정원이 미달이라더군요. 학교가 어렵다는 소식에 형편 되는 대로 조금씩 내놓았어요. 크게 부담되는 것도 아니었고….”

- 그때 당시 1억 원이면 작은 금액이 아닌데요.

“큰 부담 없이 형편 될 때 하는 거니까…. 빚이라도 내서 하면 대단한 일이겠지만, 형편 곤란한 애들 몇 명에게 나눠 주라고 형편대로 주는 거지요.”

“고향과 나라 위해 도움이 되면 그게 보람이지.”

우파장학회 관계자들에 따르면, 최 회장은 오사카 지역 교포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다. ‘민단’에서도 많은 역할을 했고, 국내 대통령 취임식 때면 꼭 초청장이 날아든다고 했다.

하지만 최 회장은 극구 “(교포사회에) 별 도움 줄 힘도 없고, 별로 하는 게 없어요. 이곳은 고향이니까, 조금이라도 빚을 갚고 싶은 거지”라고 말했다.

우파 최영석 회장./박일호 기자

“이제 나이도 많이 들었고, 갈 길이 바빠요. 너무 오래 살았다 싶어…. 허허. (우파장학회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돼서 20년이나 30년 후에 (장학금 받은) 그분들이 고향과 나라에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또 보람도 있을 거고. 두서없이 이야기해서 미안해요.”

최영석 회장은 1년에 서너 차례씩 자주 한국에 온다. 진전면에는 선산이 있다. 그리고 어머니 제사도 모시고 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임곡리. 최영석 회장은 평생 이 곳을 바라보며 살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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