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옹호하면서 돈도 잘 버는 변호사 돼야죠"

변호사인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법조계 이야기를 자주 푼다. 글 제목 몇 가지를 보면 ‘무죄’ ‘직업의 그늘’ ‘날카로운 첫 사건 수임의 기억’ ‘17만 원’ 등이다. 어렵고 무거운 법 해석 이야기가 아니다. 변호사 일을 하면서 겪었던 일, 보통 사람이 알지 못하는 법조계 이면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놓는다. 이러한 글들을 하나로 모으면 훌륭한 수필집이 되겠다 싶기도 하다. 그는 개인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는 김상군(42) 변호사다.

“법조인 꿈 간절했던 건 아니고…”

김상군 변호사는 마산 산호동에서 태어나 산호초등학교-구암중하교-창원고등학교를 나왔다. 학창 시절 노는 아이들의 필수 아이템(?)인 담배·술·당구 같은 것에는 손대지 않았다. 다른 것에 크게 한눈팔지 않고 공부에 집중했다. 다만 프로야구 광팬이기는 했다. 마산야구장 옆 목욕탕에서 OB베어스(현 두산) 레전드 박철순·윤동균을 우연히 만난 일은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런 그는 공부를 곧잘 했다. 할아버지가 공직생활을 했기에 공무원 쪽에 뜻을 두고 있었다.

“상대에 진학해 공무원이 되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죠. 하지만 그냥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는 정도였습니다. 고3 때도 특별히 선호하는 학과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런 상황에서 학력고사를 쳤는데, 성적이 괜찮게 나왔죠. 그때 할아버지가 ‘법대에 들어가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말씀을 하셨고, 저도 그렇게 하기로 했죠. 법조인에 대한 거창한 꿈이 있었던 건 아니었던 거죠.”

김상군 변호사./박일호 기자

그렇게 ‘서울대학교 법학과 92학번’ 이름을 달게 됐다. 물론 법 공부가 만만할 리 없었다. 전공 서적을 접하게 됐는데 읽어봐도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렇다고 손 놓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익숙해졌다. 남들 따라갈 정도는 됐다.

지금 대학생들은 1학년 때부터 도서관에 박혀 취업 준비를 하기도 한다. 특히나 사법시험에 뜻을 둔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김상군 변호사는 어땠을까?

20대 초반 서울 덕수궁에서./김상군 변호사 제공

“그때는 지금과 분위기가 달랐죠. 1990년대 초․중반까지는 취업 문턱이 그리 높지 않았잖아요. 3~4학년이 돼서야 공부하는 분위기였죠. 저도 그랬어요. 생업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책 많이 읽으며 인문학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대학생이었죠. 공부보다는 철학 동아리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쪽이었어요. 지역에서 온 제 눈에는 서울 친구들이 참 자유롭고 발랄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일종의 열등감 같은 게 조금 있었죠. 그래서 동기들보다는 선배들하고 좀 더 많이 어울렸던 것 같네요.”

그는 4년간의 대학 생활을 그렇게 보냈다. 하지만 그에게도 사법시험 준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벼랑 끝에서 합격한 사법시험

애초 행정고시에 뜻이 있었지만, 법대 내에서 그쪽에 관심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너도나도 사법시험이었다. 그러면서 그 역시 자연스레 사법시험 쪽에 눈 돌리게 됐다. 대학 졸업 후 1996년부터 신림동 고시촌 생활을 했다. 대학 재학 때는 틈틈이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사법시험 공부를 하는 동안 부모님에게 생활비 도움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1차 사법시험은 1996·1997년 연거푸 고배를 마신 후 1998년 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 2차 사법시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테지만, 꽤 심한 마음 앓이를 했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화를 크게 낸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몇 안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1999년 2차 사법시험 후 있었던 일이다. 길을 가다 건널목을 침범한 차를 보고서는 자신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라 발로 범퍼를 차 버렸다. 다행히 운전자와 큰 마찰은 없었다. 사실 건널목을 넘어서는 차량은 흔하디흔하다. 당시 그가 사법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를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즈음 직장생활을 하던 아버지는 IMF 여파로 퇴직하게 되었다. 더 이상 부모님께 생활비 이야기를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시식당에서 식권 없이 어물쩍 밥 먹은 일이 몇 번 있기도 했다.

“결국 서울 생활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짐을 빼기 위해 어머니가 서울에 오셨는데, 책 쌓여 있는 걸 보고서는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그래도 어머니는 ‘힘드니까 이제 공부 그만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고향 집에 돌아와서는 군대에 가기 위해 공군학사장교 시험을 봤다. 그리고 2000년 3월 입대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안에 1차 사법시험이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시험을 봤는데 합격했다. 군 문제는 후로 미루고 다시 준비한 2차 시험도 연이어 붙을 수 있었다.

사법시험 응시 때 사용한 20대 시절 사진./김상군 변호사 제공

17만 원에 대한 무거운 기억

김상군 변호사는 합격 이후 2001~2002년 연수원 생활을, 이후 2005년까지 대체복무인 공익법무관 생활을 창원에서 했다.

“검사에 대한 생각도 있었지만, 사람 추궁하는 것 보다는 도와주는 역할이 나에게 더 익숙하겠다 싶었죠. 마침 창원에 있는 법무법인에서 함께하자는 제의도 있었고요.”

그는 서울에서 법조인 생활을 하는 것에 별 미련이 없었다. 외동아들인 그에게 부모님 있는 고향 땅이 마음 편했다. 그렇게 창원에 있는 법무법인 ‘미래로’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첫 사건 수임은 ‘변호사 김상군’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어느 업체 사장님 건이었습니다. 공무원에게 뇌물을 준 혐의였습니다. 처음이니 모든 게 서툴렀죠. 내용 파악에서부터 의뢰자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 지, 심지어 수임료는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도 몰랐죠.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해가며 결국 집행유예 판결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변호사는 불행에 처해있는 절박한 사람들을 이용해 돈을 버는 직업’이라는 생각 말이죠. 그런 고민은 계속 이어졌는데, 이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비록 돈이 매개가 되지만 잘 듣고, 공감하고, 같은 편이 되는, 그래서 꼬인 실타래를 풀어주는 게 변호사라고 말입니다.”

그는 ‘17만 원’에 대한 기억을 안고 있다. 무거운 기억이다. 다른 직업군도 아닌 ‘법’을 이야기하는 변호사이기에 그럴 만도 하다.

“사법시험 낙방 후 방황할 때였습니다. 술집에서 화장실을 가다 봉투 하나를 주웠어요. 만 원짜리 지폐 17장이 들어있었습니다. 잠깐 갈등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재수다’ 싶었죠. 그 돈으로 책 사고, 식권도 끊고, 그렇게 사용했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눈앞에 다가온 이 17만 원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됐음이 분명하다. 스스로는 “이 일이 나의 법조인 운명에 다리를 놓아 주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이러한 내용을 올해 초 대한변협신문에 칼럼으로 담았다. 내용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점유이탈물횡령죄의 공소시효는 지나기도 했고, 어느 정도 세월도 흘렀기에, 어렵고 부끄럽지만 이 이야기를 한다… 앞으로 바르고 정의롭게 살면서 세상에 그 덕을 갚겠다고 약속한다.’

2001년 봄 서울 관악산 등반을 위해 모인 연수원 동기들./김상군 변호사 제공

유능한 변호사가 되고 싶다

그는 글쓰기를 어릴 때부터 좋아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농담처럼 “나중에 책을 내서 그 인세로 생활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말한다.

현재 글쓰기 욕구를 어느 정도 채워주는 도구가 페이스북이다. 그는 법조계 이야기뿐만 아니라 일상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도 자주 올린다. 2002년 자신의 결혼식 분위기를 전한 내용도 있다. 결혼식 사회를 종종 봤던 친구가 훗날 ‘상군이 너 결혼식 때는 하객 집중도가 아주 높더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상군 변호사는 ‘연수원 동기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모범생들이라 사회자 통제에 잘 따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는 아내를 1997년 11월에 만났다. 소개팅에서 만나 바로 교제를 시작했다. 그는 고시생이었고, 약대를 나온 아내는 제약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가끔은 학원비를 아내 카드로 긁기도 했다. 2차 시험 낙방 후에는 아내 집안에서, 합격 후에는 그의 집안에서 둘 관계를 반대하기도 했다. 2002년 결혼 이후 곧바로 군 법무관 생활을 해야 했기에, 아내가 약국을 하면서 한동안 집안 살림을 책임졌다. 지금 그는 그런 고마운 아내, 그리고 초등학생 딸·아들과 함께하고 있다. 주말에는 여행 등 가족과 함께하려 애쓴다.

지난 2월 아들 유치원 졸업식 때 함께한 가족./김상군 변호사 제공

“아이들이 초등학교 4학년, 1학년인데 변호사라는 직업이 어떤 건지 아직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제가 하는 일을 나중에 아이들에게도 자신 있게 권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이쪽 세계가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나중에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으니….”

그는 2011년 12월 개인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언젠가는 개인 이름을 걸고 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뒀는데, 더 늦기 전 마음먹었을 때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쪽 세계 역시 영업이 빠질 수 없다. 자신의 사무실이 아닌 의뢰인 원하는 곳으로 찾아가는 경우도 많다. 변호사 일이란 게 무엇보다 입소문이 중요하다. 그는 ‘영업의 첫걸음은 곧 의뢰인 마음을 잘 보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상군 변호사./박일호 기자

그는 최근까지 화제가 된 영화 ‘변호인’을 보고 나서 자신이 갈 길을 이렇게 정리했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돈을 잘 벌거나, 인권을 제대로 옹호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비쳐 좀 불편했습니다. 저는 둘 다 잘하고 싶습니다. 법적 절차에서 억울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서 수익도 잘 올리는 변호사 말이죠.”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