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갓집 종손 며느리가 통술집을 연 까닭은?

3월 10일 안전행정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에 음식점 수는 60만 2524개, 우리나라 인구 기준으로 83명당 1개 음식점이 영업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기획재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신규창업 1년 만에 폐업하는 자영업 비율은 85%, 업종별로는 음식점 폐업비율은 95%로 1위를 차지했다. 수복통술 김봉연 사장은 이렇듯 치열한 ‘음식점 생존시대’에 21년째 6개의 탁자를 지키며 혼자서 꿋꿋하게 문을 열고 있다.

“21년째 통술 장사를 하는 사장님을 취재해보면 어때?”

어김없이 한 달마다 돌아오는 피플파워 아이템 찾기에서 해방되는 순간이다. 더군다나 취재를 위해 회사에서 제공하는 법인카드를 갖고 통술집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가볍다 못해 날아갈 듯하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낼’ 요량으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며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가야상가 건물 뒤편에 있는 수복통술로 향했다.

“낮에 취재하러 오겠다고 전화했던 분입니까? 경남도민일보.”

주인장 김봉연(58) 씨는 내가 테이블에 내려놓은 카메라 가방을 보면서 첫 인사를 건넸다.

“인터뷰 요청은 고마운데요. 저희 집이 맛 집도 아니고 제 삶도 평범합니다. 인터뷰는 제가 아시는 미장원 원장님 추천해 드릴게요. 오늘은 편안하게 잡숫고 이야기하다 가세요.”

김봉연 수복통술 사장./박민국 기자

맞대응할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그의 분위기에 압도되어버렸다. 혼자서 음식을 만들며 서빙을 하는 그에게 취중 취재는 한계가 있었다.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하는 김 씨와 단둘이 마주앉은 것은 세 번째 방문 만이었다. ‘삼고초려’가 아닌 ‘삼고수복’인 셈이었다.

종갓집 며느리, 서른여덟에 생활 전선으로

김봉연 씨는 1957년 경남 옛 마산시 월남동에서 6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 아버지 심부름으로 주전자를 들고 술도가를 넘나들던 기억은 선연하지만, 그의 나이 38살 이전에는 21년간 통술집에서 일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결혼하고 부산 광안리에 살다가 38살에 다시 마산으로 왔어요. 큰 애가 초등학교 3학년, 막내가 5살 때였죠. 그때 당장 생활을 해야 하는데 막막했죠. 때마침 친정언니가 수복통술 문을 열었어요. 음식 만드는 것 말고는 특별한 기술이 없는 제가 함께 시작한 거죠.”

수복통술과 인연을 평범하게 말하는 그의 말 속에는 깊은 사연이 들어 있었다.

김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해, 그의 나이 20살에 한 살 연상인 남편을 만났다. 진해 외가댁에 놀러 온 그의 남편을 진해 탑산에서 처음 본 후, 김 씨의 첫사랑이자 두 청춘남녀의 기나긴 연애가 시작된 것이다.

“눈에 콩깍지가 씐 거죠. 남편이 군대 다녀오고 직장 잡고 남편 나이 29살에 결혼을 했어요. 연애만 8년을 했죠.”

두 사람은 김 씨, 동성동본이라는 사실은 주변의 결혼 반대로 이어져 그들을 힘들게 했지만 첫사랑의 약속을 갈라놓지는 못했다.

수복통술 집 통술./박민국 기자

결혼 후 친정이 있는 마산을 떠나 부산 광안리 시댁에서 종갓집 종손의 며느리로 10여 년 세월을 보냈다. 영원히 함께하자던 남편의 첫사랑 약속을 깨트린 것은 병마였다. 진해 탑산에서 처음 만난 지 18년 만에 남편은 암으로 먼저 김 씨의 곁을 떠나갔다.

넉넉하지 못한 종갓집 종손의 며느리 김 씨에게는 더는 평범한 일상은 허락되지 않았다. 병든 시아버지와 두 아이를 키우려면 생활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 손을 내밀어 준 이가 오빠와 언니였다. 그는 인터뷰 내내 오빠와 언니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친정언니가 1993년에 마산 산호동에 수복통술을 개업했어요. 당시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이 언니 속을 많이 상하게 했나 봐요. 의견도 맞지 않고 그래서 그 해, 제가 주방에 음식 조리 담당으로 들어간 거죠.”

종갓집 며느리의 음식 솜씨는 빛을 발했다. 시댁 생활을 하며 익힌 음식 솜씨는 간결하고 소박한 상차림에 안성맞춤이었고 품은 많이 들었지만 MSG가 들어 있는 조미료를 쓰지 않는 그의 조리방법은 지금도 많은 단골을 확보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어제 육수 끓이는 것을 보셨지만 조미료 없이 맛을 내려면 손이 많이 가요. 재료도 신선해야 되고요. 어시장에서 직접 장을 본지도 21년이네요. 거기서 장사하는 단골 할머니들이 저를 많이 좋아해요. 자기와 비슷한 나이에 세상 혼자 산다고요.(웃음)”

김 씨의 웃는 모습에는 억척스런 워킹맘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남편 없이 종가의 며느리로, 아빠 없이 성장하는 두 아이의 엄마로서 역할을 다해왔다는 자신감도 가득하다.

김봉연 수복통술 사장./박민국 기자

한 번의 이직 갈등 그리고 도시락

지금 수복통술이 있는 곳은 두 번째 자리로 개업 당시 가게는 길 건너편에 자리했다. 수복통술 문을 연 지 8년 만에 주방 시설이 편리한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3년, 늘 활달하게 가게를 경영해주던 친정언니 건강에 불청객이 찾아 왔다. 휴식이 필요했던 친정언니는 김 씨에게 11년 수복통술의 비결을 넘기고 물러났다. 그날 이후 오늘까지 김 씨는 혼자 가게를 꾸려오고 있다. 마음 편히 TV를 시청한 적도 드물다. 기억에 남는 드라마 한 편이 없다는 것이 그의 생활상을 말해준다. 아침이면 어시장에 나가 재료를 준비하고 오전에 가게에 들러 손을 보고 집으로 향한다. 김 씨는 아이들 밥과 도시락 준비 때문에 빠듯한 시간을 보냈다. 20여 년을 반복해 온 일상이다.

21년 수복통술과 함께 그에게 한 번의 이직 갈등이 찾아 온 적이 있었다. 주방일로 힘들어하는 동생 김 씨를 위해 친정오빠가 극장 매점 운영을 권한 것이다. 극장 매점 운영은 육체적으로는 덜 고단하겠지만 온종일 얽매이는 일의 특성 때문에 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그에게는 아이들 도시락과 밥을 챙겨 줘야 하는 일도 소중했기 때문이다.

“아이들 학교 다니면서 변변한 학원 한 번 보낸 적이 없어요. 그래도 정말 잘 커 주었죠.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따뜻한 밥을 챙겨 주는 일이 전부였어요.”

김봉연 수복통술 사장./박민국 기자

김봉연 표, 엄마 도시락은 힘을 발휘했다. 모성애로 만든 따뜻한 밥이 아이들을 바른 성장으로 이끄는 밑거름이 됐다.

21년 전 엄마 따라 마산으로 온 큰아들은 대학 진학 후 ROTC를 마치고 3년 전 교사임용고시에 합격해 지금은 거제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 중이다. 또한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빵 대신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먹으며 학비를 벌었던 막내도 대학 4학년에 복학해 취업을 준비 중이다.

특히 김 씨는 큰아이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혼자서 가게를 운영하기 때문에 종종 단체 손님을 받거나 바쁜 일이 있으면 큰아들이 가게 일을 도왔다. 깔끔하고 단정한 일 처리로 그 누가 와서 도와주는 것보다도 큰 힘이 되었다. 종종 김 씨가 하는 일이 힘들다고 다른 업종을 권유해 주었던 큰아들이 교사가 된 것은 그에게는 둘도 없는 기쁨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식들이 성년이 되어도 그의 생활에는 변함이 없다.

“취미 생활요? 집 근처 약수터 갔다 오는 것과 아이들과 마트 가는 거예요. 일요일에 큰아들이 오면 음식 해 주는 게 낙이에요. 반찬도 만들어서 보내주고 요즘은 막내가 자격증 취득 준비를 한다고 해서 도시락을 챙겨주죠. 그러고 보니 또 도시락 이야기네요. 아무튼, 아이들에게 음식 해 줄 때가 제일 기쁘고 행복해요.”

김봉연 수복통술 사장./박민국 기자

제철음식으로 손님 부인을 대접하라

김 씨의 수복통술에는 여러 종류의 술이 있다. 그러나 그 술들은 김 씨에게 장신구에 불과하다. 때론 그의 ‘청하 두 잔’의 주량이 입방아에 오른 적도 많다. 술장사를 하면서 술도 못 마시고 분위기도 못 맞추어준다는 뜨내기손님의 투정이 그를 곤란하게 한다.

“술장사가 아니고 음식 장사라 여기고 지금까지 왔어요. 손님들이 적당하게 술을 드시고 가는 것을 더 바라죠. 제철에 나는 음식을 자연 그대로의 맛으로 대접한다고 생각하고 장사해요. 술 많이 팔아서 돈 버는 것보다 음식 맛있어서 또 왔다는 손님이 훨씬 반갑죠.”

수복통술은 40대에서 60대 단골손님이 많다. 김 씨 혼자 일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미리 전화를 하고 오는 손님이 대부분이다. 또한 남편과 아내가 함께 오는 부부고객도 많다. 같이 앉아 술 동무는 못하지만 마음으로 통한 단골들이다.

“손님들이 어렸을 적 먹었던 간식도 메뉴에 있어요. 하루에 보통 20여 가지 음식을 준비해요. 부부가 함께 오셨던 손님은 기억했다가 음식을 싸서 댁에 보내기도 하죠. 좋아하는 음식을 보내 드리면 믿음으로 돌아오더군요. 수복에서 술을 마신다고 하면 아내가 잔소리를 안 한다고 좋아하시는 남성 손님들도 많아요.”

김봉연 수복통술 사장./박민국 기자

또 그는 믿음을 바탕으로 가게 열쇠를 보관하는 장소를 손님에게 알려 주곤 한다. 영업을 하지 않는 일요일에도 가끔 단골손님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 김 씨를 기다린다. 수복통술 단골손님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혜택이다.

물론 수복통술을 운영하면서 겪은 어려움도 있었다. 100만 원이 훌쩍 넘는 외상값을 갚지 않고 발길을 멈춘 손님,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는 손님, 믿었던 단골의 험담 등등.

가장 큰 어려움은 정작 가게를 시작한지 21년 만에 시작됐다. 최근 교편을 잡은 큰아들의 혼사 이야기가 오가며 사돈집에 혹여라도 술장사하는 엄마로 비칠까 하는 걱정이 크다.

“올해 큰아들이 서른한 살이라 어떻게든 결혼을 시키려고 하는데 걱정입니다. 지금까지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지만 그래도 음식점이 아닌 통술집 한다면 조금 다르게 볼까 봐 고민이에요. 가게 문을 닫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어요. 단골손님들에게 의논해 보면 그래도 힘을 주시더라고요. 자신들도 맛난 음식만 먹으러 왔지 술집에 온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요.”

김봉연 수복통술 사장./박민국 기자

인터뷰 중간 중간 길을 지나가던 단골손님들이 주인장 김 씨의 안부를 물으며 불쑥불쑥 끼어들기도 했다. 인터뷰가 시작된 지 2시간 만에 김봉연 사장은 자리를 일어나며 주방으로 향했다.

“기자님, 인터뷰는 여기까지하죠. 벌써 4시네요. 저녁 6시 단체손님 준비하려면 늦었어요. 음식을 급하게 준비하면 맛이 없거든요. 모든 음식에 정성이 안 들어가면 손님은 금방 알아요. 그래서 음식 장사가 쉬운 게 아닌 것 같아요.”

김봉연 수복통술 사장./박민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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