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꿈키움중학교에서 희망 씨앗을 틔웁니다!

날카로운 눈빛을 쏘며 평소 연마한 복식 발성을 이따금 내질러 폼 나게 수업했던 그가 어느 날 “선생님 수업 재미없어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가 불쑥 솟는 화를 참으며 재차 묻자 아이는 “이건 어디다 써먹어요”라고 되받아쳤다. 그리고 짜증 가득한 아이의 눈망울이 보였다. 수업연구대회 1등급을 받던 날, 그는 한 시간 수업을 위해 모든 걸 쏟아 부었다. ‘매시간 수업을 이 정도로 준비하면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할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정 아이를 위한 수업이었는지, 아니면 멋지게 수업하려는 나를 위한 것인지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30년 가까이 교단에 올랐던 서용수(55) 교사가 짜증스럽게 빤히 쳐다보던 아이와 진이 빠졌던 수업을 회상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와 수업시간이다.

그는 태봉고등학교 소속이지만 현재 경남꿈키움학교·진산학생교육원 개설사무팀 파견교사다. 다음 달이 되면 진산학생교육원 파견교사로 2년간 근무하게 된다.

도내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고등학교과정 공립 대안학교(태봉고)와 중학교과정 공립대안학교(경남꿈키움학교)에서 주력을 펼치는 서 교사는 다른 동료보다 학생들을 더 사랑해서도 능력이 월등해서도 아니라고 했다. 그저 기회가 왔을 뿐이라고 했다.

/김구연 기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학교 이름이 ‘꿈키움’이다. 꿈을 키우고 키워주는 학교, 이름만으로도 다니고 싶은 곳이다. 오는 3월 개교하는 중학교과정 공립 대안학교명이다. 진주시 이반성면 가산리 옛 진산초등학교 자리에 세워졌다. 바로 옆에는 진산학생교육원이 들어섰다. 학교 부적응학생들을 위한 맞춤형 공립 교육기관 Wee 스쿨이다.

이 중심에 서용수 교사가 있다. 아니 팀장이다. 지난 11일 창원남산고등학교(학교장 양수만)에서 만난 그가 내민 명함, 경남꿈키움학교·진산학생교육원 개설사무팀 파견교사 팀장 서용수.

서 씨는 지난 10일부터 진주를 떠나 경남꿈키움학교장이자 진산학생교육원장으로 발령 받은 양수만 교장 곁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태봉고 설립 준비를 했고 4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으니 5년 넘게 태봉고에 있었네요. 날이 갈수록 안주하는 모습이 싫어지더라고요.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약간의 오만함도 생긴 거죠. 대안교육에 대한 내공도 생겼겠다 싶어 다들 힘들다고 말하는 곳에서 테스트를 해보고 싶었어요. 새로 문을 여는 공립 대안중학교에서는 내가 할 일이 있겠다 싶었죠.”

지난해 11월 1일 자로 파견교사를 시작한 서 씨는 오는 3월 새 학기에 태봉고등학교로 되돌아가지 않고 진산학생교육원에 남기로 했다. ‘문제아들만 모아봐라. 내가 한 번 맡겠다’라며 중학교 선생 시절 우스갯소리로 했던 게 현실이 됐다.

그는 무척 설렌다.

“학교가 학생보다 교사 중심이니 상처를 받는 쪽은 아이들이에요. 교사나 학부모 간섭에 순응하는 학생은 ‘좋은 학생’으로, 자신의 주장이 조금 강한 학생은 ‘문제 학생’으로 이름 붙여지지요. 교육의 본래 목적은 아이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처럼 흔들리면서 성장해 꽃을 피울 것을 믿는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설렙니다. 물론 약간의 두려움도 있지요. 제발 아이들에게 꼰대가 안돼야 할 텐데…. 해마다 나를 성장시킬 나의 스승을 만날 기대감에 약간의 흥분에 젖어 있습니다.”

장학사의 권유로 첫 발을 내디뎠던 태봉고등학교, 이를 시작으로 생겨난 대안교육에 대한 욕심은 그를 도전하게 했고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김구연 기자

대안학교를 교육 본래의 목적으로 되돌아가자는 교육본질 회복운동이라고 정의하는 서 씨는 ‘날라리’가 더 좋은 선생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범생이’가 아니었던 그의 학창시절을 얘기했다.

“선생이 되면 옥수수빵 실컷 먹을 수 있겠지”

1959년 의령의 한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무척 평범한 아이였다. 잔손이 많이 가는 담배농사를 짓느라 어린 손도 놀 수 없었고 소먹이고 집안일 거드는 게 하교 후 할 일이었다. 공부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자정을 넘겨 공부해 본 기억도 1등을 해본 추억도 없다. 다만 옥수수빵이 먹고 싶어 교사를 꿈꿨다.

“국민학교 시절,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아버지께 꾸중을 들었어요. 이런 것은 이다음에 커서하고, 네 공부나 하라고요. 그냥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좋았어요. 그리고 학교에서 옥수수 식빵이 배급으로 나왔는데 선생이 되면 옥수수 식빵을 맘대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죠. 친구들은 대통령을 꿈꾸었는데 제 꿈은 교사였습니다.”

하지만 사범대에 갈 수 없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서도 4형제를 기른 아버지는 집안 형편을 얘기하며 학비가 무료인 부산한독기술고등학교 진학을 권유했고 그는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담임은 그와 아버지를 끈질기게 설득했고 결국 인문계인 진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의령 정곡중학교에서 진해고로 진학한 첫 졸업생이 됐다.

“마산 완월동에 외가가 있었어요. 하숙할 형편이 못되어 이종사촌형과 한방을 쓰며 지냈죠.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 넘게 통학을 했어요. 외가에서 잘해줬지만 왠지 모를 불편함 때문에 2학년 때부터는 자취를 했습니다. 겨우 밥만 안쳐 도시락을 싸서 다녔죠. 그리고 예비고사를 앞둔 3개월은 하숙을 하며 대학 진학을 준비했습니다.”

예비고사 당일, 그는 운명의 장난에 놓였다.

/김구연 기자

“아침 시간이 여유로웠어요. 밥을 먹고도 시간이 남아 책을 봤죠. 그리고 버스를 타러 학교에 갔어요. 마산제일여고에서 시험을 쳐야 했기 진해고에서 차를 빌렸지요. 그런데 버스가 이미 출발하고 없어요. 알고 보니 제가 한 시간 늑장을 부린 거예요. 함께 하숙했던 후배에게 손목시계를 빌렸는데, 내 시계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시간을 잘못 본 거예요.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학교에 도착하니 시험 시작종이 막 울리대요. 그런데 진정이 안 되더라고요. 좌절과 실망 탓에 오전 시험을 망쳤고 사범대에 갈 점수가 안 나왔죠.”

그는 결국 농대에 원서를 넣었지만 떨어졌고 재수 끝에 경상대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어린 시절 가난의 경험은 소중한 밑거름이 됩니다.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르거든요. 선생님 말도 거역해보고 가출도 해보고 방황도 해봐야죠. 이런 경험이 없는 상태로 교사가 된다면 아이들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요. 다양한 경험을 해본 사람이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는데….”

서 씨가 말한 다양한 경험에는 ‘연극’이 있다. 그는 연극배우가 되겠다고 선언한 18살을 잊을 수 없다.

몰래 갖고 나온 희곡본, 그리고 희열을 맛보다

“당시 쓰라렸던 농대 낙방이 훗날 행복한 낙방이 되었죠. 만약 농대에 합격했더라면 지금 나는 없어요. 사범대학 진학에 성공해 졸업도 무사히 마쳤죠. 그런데 2년 반 동안 발령이 나지 않았어요. 그때 전문 연극배우의 길을 걸을 뻔했습니다.”

서 씨는 연극동아리 지도교사로 이름나 있다. 지난해 함양에서 열렸던 ‘제17회 경상남도 청소년연극제’에서 태봉고등학교 <오! 당신이 잠든사이>가 최우수상을 받았고 2012년에는 태봉고등학교 연극반 ‘끼모아’가 ‘제16회 전국청소년연극제’에서 단체 우수상을 거머쥐는 등 최우수연기상과 우수연기상, 스태프상을 싹쓸이했다.

진주 극단 현장에서 프로로 활동했다는 서 씨는 어떻게 교사가 아니라 연극배우가 된 걸까?

진해로 유학 와 마산 외가에서 지내던 서 씨는 우연히 서가에서 희곡본을 발견했다.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던 이종사촌 형의 책이었다.

/김구연 기자

“그 많던 책 중에서 왜 하필 연극관련 책이 눈에 띄었는지 몰라요. 이론집과 희곡본이었는데 신세계였습니다. 연극을 글로 먼저 접한 거죠. 당시 연극을 쉽게 볼 수 없던 나는 영화를 자주 봤어요. 사복 입고 몰래 들어가 같은 영화를 세 번이나 보고 나왔죠. 그리고 비밀인데, 2학년 때 자취를 시작하면서 책을 갖고 나와 버렸어요.”

사촌형 책을 몰래 훔칠 정도로 그는 연극에 빠졌다. 그리고 중앙대 연극영화가 가겠다며 폭탄선언을 했다. 내성적이었던 그는 사춘기 때 남자다워지겠다며 일부러 나서 친구들을 웃기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재밌어하며 “용수가 코미디언 안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좋아했다. 연극을 보지도 무대에 오르지도 못했지만 대중 앞에 서고 싶었다. 1년 동안 상사병을 앓았던 연극배우라는 꿈은 장남이라는 그의 어깨에 무거운 짐이었다. 연극영화과 학비가 만만치 않게 드는 현실에서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1년 후.

“경상대 극예술연구회에 들어가 오매불망하던 연극을 봤어요. 마치 꿈속에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던 무대에도 섰습니다. 보통 2학년까지 활동하는데 4학년에도 연기를 했어요. 졸업할 때까지 9편을 했는데 많이 한 겁니다. 그리고 프로로 활동했지요. 임용 발령이 안 났어요. 2년 반씩이나요. 그때 진주 극단 현장에 들어가 연극배우를 했어요. 생활비를 벌었으니 아마추어는 아니었지요. 결혼을 한 터라 돈을 달라고 졸랐습니다.”

서 씨는 현장에서 아내 김수희 씨를 만나 결혼했다. 김 씨는 진해여성의전화 산하에 있는 여성극단 ‘물꼬’의 상임연출을 맡는 연극인이다. 서 씨와 태봉고에서 아이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마음의 문을 스스로 연 태봉고 아이들, 희망은 있다

그는 연극이 에너지의 원천이라고 단언했다.

“1979년에 연극을 시작한 이후 잠시 쉬기는 했지만 30년 넘도록 했어요. 연극배우로서의 삶도 느낍니다. 첫 발령을 받은 중학교부터 연극부를 만들었고 학교를 옮길 때마다 동아리를 결성해 학생들과 연극작업을 했지요. 태봉고에 오기 전까지 갈증도 있었습니다. 중학생들이 너무 어렸고, 대상 연극제도 없었거든요. 태봉고에서 고등학생과 연극동아리 ‘끼모아’를 창단해 2년 연속 경남대표로 전국대회에 참가했어요. 연극동아리 아이들의 성장이 태봉고 구성원 전체의 성장을 이끌어내는 동력원이 되었다면 너무나 억측일까요?”

서 씨는 마음의 문을 닫았던 아이들이 연극으로 그 문을 활짝 열었다고 믿는다.

/김구연 기자

“연극을 시작하려는 학생들을 적극적인 학생과 소극적인 학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개 회장이나 반장을 하던 아이들은 연극부에 들어오면 표현을 아주 잘해요. 그런데 끈기가 없어요. 다른 일도 할 게 많거든요. 반면 수업시간에 말 한마디도 안 하는 아이들이 연극을 하겠다며 찾아오죠. 큰소리로 대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끝까지 합니다. 태봉고 학생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조금이라도 힘들면 도망가려고 숨으려고 했던 아이들이 연극 한 편을 끝까지 책임지면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존감이 생겼어요. 한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면 세계가 변한다고 했어요. 저는 이것을 믿는 거죠.”

문화예술교육에서 경남 교육의 길을 찾다

앞으로 정년이 9년 남았다는 서 씨는 10년 후 다른 삶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학교 현장에서 대안교육을 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현장에서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극과 대안교육의 경험을 살려 문화예술교육으로 학생들의 인성과 창의력을 살리는 ‘공연예술학교’를 그리고 있다. 꿈의 동반자와 지지자만 있다면 시작하고 싶다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관계를 맺고 사람 냄새 나는 교육이 최고의 교육입니다. 그리고 문화예술의 능력을 믿어요. 아이들의 감성이 풍부해지면 인성이 좋아집니다. 어떤 일이든 전문가가 되려면 10년은 그 일에 미쳐야 한다고 하죠. 5년 후나 10년 후 대안교육 전문가로서 자리매김했으면 좋겠습니다. 태봉의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듯이 우리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경남 대안교육의 미래는 아주 밝거든요.” 

/김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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