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과 올바른 여론 형성을 위해 뜻 모아

창원시 양덕동 마산종합운동장 주경기장 2층 209호. 지난 1월 17일 현판식을 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경남 도내 최초의 사단법인 언론단체 <경남언론포럼> 사무국이다. 뉴미디어로 표방되는 다매체 시대, 급변하는 언론 환경에서 지역 원로 언론인들은 왜 뭉쳤을까? 그 이유를 들어보고자 발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지역의 원로 언론인을 만났다.

“어이, 박 기자 곤란한데…. 경남언론포럼이 간판 단지가 한 달이 안 됐는데 언론에 나서서 앞으로 뭐하겠다, 어떻게 진행할 것이다, 이렇게 표방하는 것은 좀 그렇는데요…. 밖에서 보면 언론 플레이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좀 더 시간이 지나고 회원 간에 평가도 공유되고 자리가 잡혀가면 한번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사단법인 경남언론포럼 초대회장을 맡은 박소웅 회장(72)은 경남언론포럼 취재에 손사래를 쳤다. 박 회장은 선배 언론인 위치에서 언론을 통해 언론단체를 홍보하는 것은 오히려 후배 언론인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회장님 아니 선배님, 경남언론포럼도 궁금하지만 언론인 박소웅도 많이 궁금합니다. 오늘은 선배님 이야기 먼저 듣는 것으로 하지요.”
한참을 고민하던 박 회장은 녹차 한 잔을 건네며 근무 책상에서 소파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지역 언론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를 만난다는 것은 언론계 발을 들여놓은 지 이제 3년차인 나에게는 행운 그 자체이다. 살아있는 지역방송계 전설을 만난 것이다.

/박민국 기자

문학소년, 법조인을 꿈꾸다

박 회장은 1942년 경남 하동 악양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그의 가족은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전쟁을 피해 온 부산이 그의 고향이 된 것이다. 어린 박소웅이 세상을 향해 꿈을 키운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돌이켜 보면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세상과 소통하려고 시작한 것 같아요. 그때부터 경남고 1학년 때까지 보았던 책이 실존주의 철학책이에요. 철학을 배우며 문학을 이야기했지요. 시도 짓고 소설도 쓰고 또 그 당시 그게 유행이었지요. 모임 만들어서 책 읽고 글 쓰고 당시 같이 활동했던 친구 중에 아직도 글 쓰는 친구가 있지요. 부산고 김종해, 부산사범학교 이수익 등이 그때 친구에요. 부산 보수동 뒷골목에 참 많이 들락날락했지요.”

문학을 좋아했던 소년은 가난에 찌든 집안 형편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데 우선이었다. 기울어진 집안을 일으키는 길은 법조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 또한 집안 형편에 이루지 못하고 그는 영문학도의 길을 택했다.

/박민국 기자

“그 당시 부산지역에는 법대가 없었어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은 못하고 부산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법 공부를 하려면 경북대에 가야 하는데 가정 형편이 되나요 그래서 집에서 가까운 부산대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지요. 문과에서 적성에 맞는 곳을 가려고 하니 국문학과, 사학과, 영문학과 뿐 이에요. 그중에서 영어영문학과를 택했지요. 대학 시절은 가정교사로 보낸 기억뿐이에요. 지금도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로 벌어서 공부하지만 그때는 과외 선생 자리가 괜찮았거든요 4년 동안 직접 번 돈으로 학비를 대고 공부했지요. 대학졸업을 앞두고 꿈을 하나 키웠지요. 당시 영문학 석사 과정을 마치면 미국문화원을 통해 유학을 가는 길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대학원에 먼저 합격해 휴학하고 군대에 갔지요. 군대 제대하고 복학해서 석사 취득하고 미국 갈 꿈을 꾼 거지요.”

무장 공비가 바꿔준 운명

박 회장은 학생군사교육단 4기(ROTC)로 임관하여 군 복무를 했다.

군대 제대가 가까워 오자 그는 사회로 복귀할 꿈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68년 2월 제대를 하면 바로 3월에 대학원에 복학할 날만을 기다리던 그에게 뜻하지 않은 복병이 나타났다.

“68년 1월 김신조 무장공비가 내려온 거 에요. 제대하고 바로 대학원에 복학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요. 제대가 6개월 연장이 된 거에요. 돌이켜 보면 그래서 운명이 바뀐 지도 모르지요.”

영문학 석사를 마치고 미국 유학길에만 오르기를 목표로 삼았던 그는 뜻하지 않은 군 복무 연장으로 8월 제대 후 그해 여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법조인의 꿈도, 미국 유학의 길도 그 자신이 원하던 모든 것을 바꿀 운명은 우연히 다가왔다.

“제대 후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대학교 은사인 박두석(작고) 선생을 만나 거 에요. 대학원도 좋지만 사회에 빨리 진출하라면서 알려주신 게 마산에서 방송국을 개국한다면서 거기에 도전해 보라고 하시더군요. 이왕 다음 학기까지 복학하려면 시간도 남고해서 친구 4명이 함께 마산에 시험 치러 갔지요. 방송국 분야에 뭐 아는 것이 있나요 내가 목소리가 좋아서 아나운서를 하나요, 기술이 있어서 엔지니어를 하나요, 아무것도 모르고 PD를 지망했지요.”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그는 놓치지 않았다. 제대 후 대학원 복학까지 지루하던 시간을 보내려고 친구 따라 시험 치러 갔던 그는 1968년 10월 1일 KBC 경남방송 공채 1기로 합격한 것이다.

/박민국 기자

“동아방송에서 위탁 교육받으면서 PD란 무슨 업무를 하는지를 알게 됐지요. 아직도 그 당시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당시 논술시험문제 제출 답안 제목이 ‘의거의 거리에 비는 내리고’에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차용해서 3.15의거에 대해 기술한 것이 주효했지요. 합격 후에 당시 김영효 편성국장이 알려줬어요. 어찌 됐던 우연히 알게 돼 치른 시험이지만 공채 1기 인기가 대단했어요. 아나운서 3명, 엔지니어 3명, PD 2명 등 총 8명이 경남방송 공채 1기에요. 그 당시 경쟁률이 68대 1이었습니다.”

음악담당 PD 보도국 기자가 되다

본격적인 방송계 입문 이야기를 꺼내 놓는 원로 방송인의 목소리는 톤을 높여 가고 있었다. 라디오 방송 연출을 시작으로 방송계에 입문한 박 회장의 기억력은 더욱 또렷해졌다. 방송계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 그는 많은 노력을 했다. 섭외, 대본, 연출까지 그 당시 PD의 역할은 멀티플레이어였다고 그는 회고한다.

“처음 연출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도민의 소리’라는 5분짜리 가십(gossip) 프로그램이에요. 5분짜리 프로그램 하나 제작하는데 종일 근무를 했지요. 현장에서 녹음하고 원고 쓰고 그 당시에는 PD 중심의 방송문화였지요. 한번은 라디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오프닝 시그널을 베토벤에 '운명'을 쓴 적이 있었지요. 당시 데스크가 쓰지 말라는 것을 밀어붙였어요. 얼마나 까셨던지(하하하).
지금 스크립터라는 방송작가는 1980년대에 도입 했지요 그전에는 연출이 다 맡아 했어요. 아침 오프닝부터 밤 12까지 프로그램 6개까지 했어요. 법조인, 미국유학은 잊었지요. 방송 일에 푹 빠져보니까. 아, 이게 내 일이구나 하는 생각에 참 부러울 게 없었지요.”

/박민국 기자

그에게 방송은 운명이었다. 1984년 미국으로 언론 연수를 떠났던 그가 선진 방송 기술을 습득하고 돌아왔을 때 방송 환경은 변하고 있었다. 컬러TV 전성시대가 됐고 회사도 라디오와 TV가 합쳐져 마산문화방송(주) 된 것이다. 또한, 그에게도 새로운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외국 연수에서 돌아와서 라디오 앵커도 3년 하고 음악 담당PD 3년이 지나갈 때 사건이 터졌어요. 당시에는 ‘경부선 라인 사건’으로 회자했는데 라디오 담당들이 뇌물 수뢰에 연루된 거지요.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울산, 마산 음악담당 PD들 보직이 싹 바뀐 거 에요. 나도 그때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보직은 보도국으로 발령을 받았지요. 지역 기자들의 꽃인 도청 근무를 난 못했어요. 그 당시에는 차장까지만 출입처 근무를 했는데 난 부장이었거든요 그때부터 1998년까지 30년 방송계 있으면서 가장 많은 것을 느끼고 고민했던 것이 기자로서 근무할 때에요. PD야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것을 자기 의지대로 만들 수가 있지만 기자는 분명히 존재하는 사실과 그 뒤에 숨겨진 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업무잖아요. 늘 고민했지요! 늘 숙제였고.”

아직 끝나지 않은 선배의 길

반평생을 바친 방송일을 회고하는 노 언론인 표정은 진지함을 넘어 엄숙함이 묻어있었다. 방송계를 떠나온 박 회장은 언론 후배 양성에 시간을 쏟았다. 퇴직 후 창신대, 창원대, 경남대에서 언론학 관련하여 강의를 하던 그는 YTN사외이사를 맡으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YTN노조가 낙하산 인사라고 반대를 많이 했지만 난 지역 언론인 출신이 중앙에도 진출할 수 있었던 계기로 생각했고, 지역과 중앙의 경계를 허물 기회라고 여겼지요.”

그는 소신으로 3년 임기를 채우고 다시 자신의 역할을 찾았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현업에서 발휘했던 기획력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지역 언론 환경에 마지막 보탬이 되기 위한 길을 찾아 나섰다.

하루 다르게 변해가는 언론환경에서 언론의 고유 기능인 비판과 올바른 여론 형성을 지향하는 언론의 가치를 정립하려고 선배 언론인들의 뜻을 함께 모은 것이다. 바로 경남언론포럼.

/박민국 기자

“1년여 동안 준비를 했지요. 항상 일선에서 온 힘을 기울이는 후배 언론인도 많지만 요즘 감시자가 아닌 안내자 역할을 하는 언론인이 판을 치잖아요. 선배로서 본을 보여 주어야 할 것 같고 그래서 진정한 언론인의 길을 걷는 후배들을 격려해주려고 모임을 만든 거 에요. 또 경남에는 언론관련 사단법인이 없잖아요. 우리가 전·현직 언론인을 위해 초석을 마련한다는 의지로 만들었지요.”

박 회장은 경남언론포럼의 첫 행사에 취재를 요청했다. 선배 언론인들이 준비한 첫 사업은 3월 21일 공명선거를 위한 토론회라고 했다. 그는 보수와 진보를 넘어 소통하고 대화하는 토론의 장을 많이 만들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원고 함께 출고할 박소웅 회장 사진을 찍으려고 마이크가 달린 카메라를 꺼냈다.

박 회장은 카메라를 보고 나에게 말했다.

“박 기자, 그 카메라 나에게 주면 바로 현장으로 갈 수 있는데 말이야요. 요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면 정말 사회에 대해 아픔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요.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서 이 사회에 전하고 싶어요.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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