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법치주의는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따르는 것”

지난 1월 8일 자 경남도민일보에는 ‘변호사가 본 영화 ‘변호인’’이라는 기고가 실렸다. 이 글을 쓴 조정현 변호사는 “변호사라는 이름을 가진 상인이 아닌 의뢰인 한 명 한 명을 진심을 다해 도와줄 수 있는 그런 변호사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이 글을 쓴 조 변호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국제기구에 가고 싶었던 꿈 많은 청춘

조정현 변호사 사무실은 창원지법 옆에 있었다. 개소식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사무실은 깔끔했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조 변호사가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인터뷰 도중에도 판사와 의뢰인으로부터 연락이 몇 통 오는 등 그는 조금씩 지역에서 이름을 알려가고 있었다.

그는 1975년에 마산에서 태어났다. 마산 제일여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그러나 그는 어릴 때 변호사가 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초등학교때 컴퓨터를 배웠는데, 상도 타고 해서 중고등학교에 가서도 과학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포항공대나 서울대학교 공대를 가고 싶었습니다.”

   

-고려대 행정학과는 문과가 아닌가요?

“아버지께서 법대를 보내고 싶어하셨습니다. 제가 수능을 친 게 1994년인데 서울대 본고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고사 점수가 안 나와서 고려대에 냈는데, 특차로 가는데 법대는 아슬아슬하고 바로 아래에 행정학과가 있었습니다. 행정학과가 뭐 하는지 모르고 그냥 지원해서 합격했습니다.”

-행정학과에 가면 뭘 하는 건가요?

“대부분 행정고시를 준비합니다. 1학년 때만 어울려 놀고 대부분 2학년부터 고시공부를 합니다. 저는 행정학 보다는 경제학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딱딱했고, 다른 사람들처럼 고시준비가 싫어서 어학연수를 갔습니다. 캐나다 캘거리 어학연수를 갔는데 정말 좋았습니다.”

거기서 그는 한 가지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됐다.

/사진 최재경

“국제기구에 가고 싶었습니다. 유엔에서 만 30세 이하 초급전문가를 뽑는 시험을 2번 쳤습니다. 일단 어학연수에서 돌아오고 대학을 졸업한 직후 유학준비를 했습니다. 집에서 팩스를 설치해 놓고 7~8군데 원서 접수를 직접 했습니다. 그래서 2000년 여름학기로 미국 뉴욕 주에 있는 시라큐스대학 행정대학원에 갔습니다. 여기는 미국 내 행정대학원 가운데 톱으로 알아주는 곳이었습니다. 세부전공은 국제관계학을 했습니다.”

-외국 대학원은 우리나라 대학원과 어떻게 다른가요?

“일단 격식 같은 것이 없습니다. 교수나 학생 간에 서열관계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교육시설도 정말 좋았습니다.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절로 샘솟습니다. 제 평생에 가장 즐겁게 공부한 것 같습니다. 분위기도 자유로워서 교수도 샌드위치 먹으면서 수업하고, 별 시답잖은 대답에도 ‘정말 창조적이다’며 동기부여나 칭찬을 되게 잘 해 줍니다. 그러니 더 자기계발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드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투나 행동에는 격식이 없고, 소탈하고 편해 보였다. 2002년 5월, 그는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그의 가정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귀국하자마자 바로 한국정보보호진흥원에 취직을 했다.

변호사가 되다

그는 졸업논문을 각국의 프라이버시 정책에 대한 것을 썼다. 취직을 하더라도 정보통신 산하단체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마침 한국정보보호진흥원에 들어가게 됐다. 그러나 진흥원은 그의 생각과는 너무나 달랐다. 정보통신부 산하기관이다 보니 일개 정통부 사무관에게 휘둘리는 기관이었다.

/사진 최재경

-들어가서 무슨 일을 주로 하셨습니까?

“2년은 진흥원에서 일하고, 2년은 정보통신부에 파견을 나가 있었습니다. 당시 개인정보 보호정책이 생긴 지 얼마 안 됐을 땝니다. 개인인증이나 바이러스 대비, 이후 주민정보 유출로 ‘아이핀’을 만드는데 직접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개인정보 유출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아무래도 ‘인터넷 진흥’이라는 것과 ‘개인정보 보호’ 중에서 기업은 ‘진흥’을 원하기 마련이죠. 신용정보회사들과 인터넷 기업협회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솔직히 기업의 입장에서는 주민등록번호 하나 가지고 인증을 하면 편한데, 따로 식별번호를 한다면 데이터베이스를 2번 구축해야 하니까요. 결국 처음 개인정보 보호 안에서 야금야금 밀리고 밀려서 개인정보 보호 관련 제도가 마련된 겁니다. 이 과정에서 업계의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 참 힘들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국제기구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생각해 봤다. 변호사가 되면 국제기구에 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는 2006년 결혼을 하고 남편(최재경)에게 그의 생각을 털어 놓았다. 남편은 쾌히 승낙했다. 그 때부터 신림동에서 신혼 겸 고시공부 생활이 시작됐다. 그리하여 2009년 로스쿨에 합격을 했다.

“로스쿨에 입학할 때 임신을 하고 있었고, 출산을 여름에 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전라도에서 아이를 키우고, 남편은 서울에서 사진 스튜디오를 하고, 저는 부산에서 로스쿨에 다니는 이산가족이 됐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얼굴을 봤습니다. 그렇지만 다들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도 로스쿨을 졸업 하면 변호사가 되니 참을 만 한 게 아닙니까?

“그게 아닙니다. 사회적 오해인데 로스쿨을 졸업하더라도 변호사 시험에 합격을 해야 되는 겁니다. 합격률을 70% 정도 됩니다. 로스쿨 학생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는 2012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같은 해 10월 변호사로 등록이 됐다. 변호사가 됐을 때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일까?

“일단 저는 국제거래나 무역분쟁을 중재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서울에 가야지 큰 사건을 맡고 국제기구에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을 하게 됐습니다. 현실적으로 서울에서 변호사를 하는 것은 무리다 싶은…. 생각해 보면 제가 외국에 나가는 것이 현실도피가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지방에서 나름의 일을 찾고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고향에 내려와 김봉균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을 했다. 무슨 일을 주로 했을까?

“아시다시피 무학이 대선주조와 분쟁이 많았잖습니까? 김봉균 변호사님이 무학 고문 변호사라서 그 일을 좀 했고, 회사 사건, 악의적 M&A등 민사 쪽을 많이 다뤘습니다.”

-우리 지역에 변호사 숫자가 대강 얼마나 됩니까?

“제가 알기로 창원지법 본원 인근에 120여 분, 마산지원 인근에 있는 변호사들까지 합하면 창원지역에 200명 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말 나온 김에 얼마 전에 기사를 보니까 변호사회 회비나 등록비를 못 내는 변호사도 있다고 하던데, 그게 비싼가요?

/사진 최재경

“경남 변호사회는 비싼 편으로 알고 있습니다. 회비가 8만 5천 원이고, 등록비가 600만 원 입니다. 하지만 아직 창원이나 울산은 변호사들 수입도 비교적 괜찮은 편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즘 사건을 보면 어떤 사건이 많습니까?

“이혼사건과 재산을 둘러싼 가족 간의 다툼이 굉장히 많습니다.”

-법조계가 문턱이 많이 낮아진 느낌도 드는데, 물론 아직 멀었다는 의견도 있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거와 비교하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렀다고 봅니다. 변호사가 판사랑 술 한 잔 하고 잘 봐달라고 하거나, 판사를 매수하거나 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판사에게 대들어서 법관이 위축되는 경우도 봤습니다. 그런데 사법부의 권위가 떨어지면, 법정이 최후의 보루인데 가장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판단을 내리는데 거기에 불복하면….”

-최근 국민참여재판에 대해 말이 많았습니다. 좋다고 하는 쪽도 있는가 하면 여당은 경솔한 판정을 내린다고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하던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직 사회적으로 이해도가 낮고 교육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축소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지금 정도 형태로 가다가 정착이 되면 미국식으로 배심원이 유무죄 평결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습니다.”

-요즘 재판 하나하나에 따라서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반향이 있는 것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논쟁도 많이 붙습니다. 그 과정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단어가 ‘법치주의’라는 말인데요, 변호사님이 생각하는 진정한 법치주의는 무엇입니까?

“기존에 정부나 권력자가 말한 법치주의는 ‘내가 만든 법은 무조건 따라야 질서가 잡힌다’는 의미였다고 봅니다.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진정한 법치주의는 법을 정당성 있고 합리성 있게 만들어 모든 사람이 스스로 따를 수 있도록 한 뒤에, 이 법을 지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법이 가능합니까?

“그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제가 한국정보보호진흥원에 있을 때도 느꼈지만 제도나 정책을 만드는 게 정말 어렵습니다. 이 법이라는 것이 중간지점을 찾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따라서 구성원들의 합의를 받기도 쉽지 않습니다. 문제는 법이나 정책 하나가 만들어지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그 사이 세상이 변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현실과 괴리가 생기는 것이 많습니다.”

이혼 소송을 보면 안타까워

지난해에 조 변호사는 경남지방자치센터 이사를 하게 됐다. 도대체 뭘 하는 곳인가?

   

“조유묵 마창진 참여연대 사무처장님과 이은진 교수, 이옥선 시의원 등이 주축이 돼서 만든 단체입니다. 지역주민들이 참여해서 이 지역을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가자는 취지에서 만든 시민단체입니다.”

막연했다. 그런 비슷한 명분으로 만든 단체는 수십 개는 더 들어본 것 같았다.

“정보공개 운동도 하고, 지역민들 대상으로 교육도 하고, 기존 시민단체와는 달리 대학생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지방자치센터다 보니까 지방선거에 출마하려는 사람들에게 정치아카데미도 하려고 합니다.”

-예전부터 이옥선 시의원이나 조유묵 처장님을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면 변호사가 된 후 아시게 된 겁니까?

“이옥선 시의원님은 마산제일여고 제 선배 되시고, 조유묵 사무처장님은 제가 어학연수 준비할 때, 그러니까 낙선운동 하던 1999년경에 알게 됐습니다. 당시 어학연수 준비를 마산에서 하고 있었는데, 그냥 있기가 그래서 시민단체에 인턴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때 알게 됐습니다.”

-이것 말고도 사회활동은 좀 하십니까?

“탈북자 지원 변호사도 하고 있는데, 이름만 걸쳐놓고 잘 못하고 있습니다. 탈북하신 분들은 남한의 법이나 사회에 대해서 전혀 모르십니다. 이런 실정을 탈북자 국선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강간이 어떻게 성립하는 지 전혀 모르고 계셨고, 구조요청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셨습니다. 그러니 강간 피해자가 취해야 할 행동을 안 취한 거니까 수사기관에서는 강간피해에 대해서 신뢰를 안 한 겁니다. 제가 유학시절에도 관심 깊게 본 게 탈북자 문제입니다. 기회가 되면 탈북하신 분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사진 최재경

-‘변호사가 본 영화 변호인’ 기고문을 많이 분들이 봤는데요. 영화 변호인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영화를 보다가 울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왜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는 했는데, 왜 무얼 해서 좋아했는지 몰랐다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까운 사람이 갔다는 생각이 더 강해지는 겁니다.”

-요즘 공을 들이는 소송은 뭐가 있나요?

“모든 사건을 다 공을 들이죠(웃음). 하나 중요한 사건이라고 한다면 입곡저수지 문제를 맡고 있습니다. 입곡저수지로 인해서 땅을 잃은 주민과 농어촌공사와 소송이 붙은 겁니다. 1920년대에 일제가 입곡저수지를 만들면서 제 생각에는 주민들에게 제대로 보상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등기부상에는 개인소유로 돼 있고, 농어촌공사 자산등록대장에도 등록된 사실이 없습니다. 만약 이 사건에서 주민이 이긴다면 앞으로 많은 비슷한 사건의 판례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송을 하다가 굉장히 안타까운 기억이 있다면?

“이혼소송을 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이런저런 사유가 있지만 나중에 결국 돈 싸움이 됩니다. 이혼소송을 하면서 감정이 더 상하고 진흙탕 싸움이 됩니다. 이혼을 하더라도 제발 좀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으면 합니다. 지각없는 사람들은 어린애들을 재판정에 세워놓고 이용을 하려는 부모도 있습니다. 자기 아이들이 받을 상처를 생각해서 바닥까지 보지 말고 헤어지는 지혜가 있었으면 합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전문영역은 뭐가 있나요?

“지금까지 쌓아온 정보통신이나 국제거래 관련된 일을 하고 싶지만 지방이라 한계가 있고, 새로 전문성을 키워보고 싶은 것은 행정사건과 건설소송입니다.”

-변호사에게 상담을 하거나 사건을 맡길 때 가장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뭔가요?

“충분히 자료를 제공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불리한 자료는 숨기려 하는데 그래서는 패소합니다. 역으로 자기에게 최대한 불리한 부분을 변호사와 상의해서 패소 가능성을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어야 재판을 잘 할 수 있습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지만, 무한정 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해외유학의 영향인지 몰라도 굉장히 그는 자유롭고 소탈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사무실 이름을 ‘선율’이라고 지었다. 착한 법이라는 뜻이다.

아이 이름도 선율이라고 지었다. 그가 ‘착한 변호사님’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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