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도문화 편견·커피 소비량 증가

하동은 자연이 넉넉한 고장이다. 산·강·바다·들판을 모두 가졌다. 지리산·섬진강·한려수도·악양들판이다.

이 가운데 지리산과 섬진강은 녹차라는 보물을 내놓았다. 그것이 1000년 넘게 이어질 수 있었던 건 모질지 않은 이곳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리산·섬진강이 내놓은 보물

우리나라 차 유래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지리산 자생설, 인도에서 들어온 남방전래설, 그리고 중국 전래설이다. 하지만 세계 학회에서는 차나무 원산지를 중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 전래설이 정설로 통용되고 있다.

1145년 편찬된 <삼국사기>에 이러한 기록이 있다.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에 갔다 돌아온 사신 김대렴이 차 종자를 가지고 왔다. 왕은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행하였다.'

하동이 차 시배지임을 알리는 글과 비석. /남석형 기자

이전부터 차가 있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재배 시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심었던 곳이 지리산이라고만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정확한 장소를 놓고 훗날 하동 화개면과 전남 구례군 간 팽팽한 신경전을 펼쳤다. 2008년에야 한국기록원·차학회에서 하동 화개면을 시배지로 인정했다.

그렇다면 왜 하필 하동 화개면이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진다. 당나라에서 들여온 귀한 씨를 아무 곳에 뿌리지는 않았을 테다. 당나라 재배지를 통해 따뜻하고 비 많은 곳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에는 유명 승려인 진감선사(774∼850)가 있었다. 이 때문에 사신 왕래가 잦았고, 이곳 기후 조건을 전해 들은 흥덕왕이 적지로 택했다고 전해진다. 당나라 유학을 통해 차에 익숙한 진감선사는 이후 재배·보급에 힘썼다고 한다.

하동 화개면은 섬진강을 끼고 있다. /남석형 기자

차나무는 연평균 기온이 13∼16℃가 알맞다. 최저기온이 -13℃ 아래로 떨어지면 얼어 죽는다. 그리고 연간 강수량은 1400㎜ 이상 되어야 한다. 하동은 연평균 기온이 13.2℃, 최저 기온이 -10℃ 정도이며, 연평균 강수량이 1700㎜가량 된다. 특히 차나무가 집중돼 있는 하동 화개면은 지리산·섬진강이 더 좋은 조건을 선사한다. 지리산은 차나무에 알맞은 자갈밭을 내주고, 북풍을 막으면서 많은 볕을 받게 한다. 섬진강은 안개와 습한 기후를 만들어 녹차 향을 돋우는 데 큰 몫을 한다.

더하거나 덜하지 않은 이곳 사람들 마음

하동 화개면 정금리에는 1000년 된 차나무가 그 세월을 버티고 있다. 이렇듯 하동 땅에 뿌리내린 차나무는 그 씨앗이 곳곳에 퍼지며 토착화됐다. 오늘날 밭에 정돈된 차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저기 버려진 것처럼 불쑥불쑥 자라는 나무도 많다. '하동 야생차'라 말하는 이유다. 그래서 굳이 농약을 쓰지 않아도 된다. 농약뿐만 아니라 축사·송전탑이 없다 하여 '하동녹차는 3무'라는 말도 있다.

하동군 화개면은 산비탈을 따라 차나무가 깔려 있다. 이곳 사람들은 기계를 이용하면 찻잎이 상하기에 여전히 수작업을 고집하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DB

여기 사람들은 긴 세월 녹차를 일구었지만, 스스로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공납을 위한 강제 노역을 감당해야 했다. '화개 차밭에 불을 지르자'는 말은 이곳 백성들의 고된 삶을 달리 말해준다.

그래도 오랜 시간 감내를 통해 얻은 것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어린 새싹인 작설을 '잭살'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따서 비비고 아무렇게나 바위에 널어 말렸다. 그리고 보자기에 싸서 보관하며 약으로 이용했다. 양은주전자에 달여서 사카린이나 꿀을 타서 감기약으로 썼다. 그래서 '고뿔차'라고도 했다. 감기뿐만 아니라 집안 상비약, 그러니까 만병통치약처럼 쓰기도 했다.

오늘날 녹차 생산량에서는 하동보다 전남 보성이 더 많다. 그런데 보성녹차 역사는 그리 멀리 거슬러 가지 않는다. 보성은 일제강점기에 수탈 목적으로 계획적이면서 대단위로 조성됐다. 녹차는 어린잎이 금방 크는데, 대규모로 조성하다 보니 일일이 손으로 따고 덖을(물을 더하지 않고 타지 않도록 볶는 과정) 여유가 없다. 그래서 보성은 기계식이고 대량생산이 쉬운 키 큰 나무다. 높이가 4m가량 된다.

반면 하동은 2m 정도밖에 안 된다. 하동은 지금도 할머니들이 한잎 한잎 손으로 딴다. 그래서 쪼그려 작업하기 좋도록 나무 높이를 낮게 만든 것이다.

하동 사람들 역시 기계로 편히 작업하고 싶은 욕심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기계를 이용하면 찻잎이 다칠 수밖에 없다. 미련한 이곳 사람들이 여전히 수작업을 고집하는 이유다.

차를 만드는 과정도 일본 기계를 이용하는 다른 지역과 다르다. 덖음과정에 사람 손을 거친다. 뜨거운 가마솥에 장갑 낀 손을 넣어 타지 않게 계속 젓는다. 그래서 하동에서는 고작 1㎏ 정도 따서 덖음작업을 하면 하루가 훌쩍 가 버린다.

입에 익은 제주녹차도 1970년대 말 어느 기업에서 땅을 사 대규모로 재배한 것이라고 한다. 최근 들어서는 여러 자치단체에서 육성품목으로 재배에 나서기도 한다.

그래서 하동 사람들은 다른 지역 녹차와 비교하는 것에 대해 편치 않은 마음을 드러낸다.

자존심 속에 섞여 있는 한숨

하동 사람들의 자존심은 여전하지만, 한숨이 섞여 있기도 하다.

1990년대 들어 항암효과를 비롯해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면서 한때 명절 선물용으로 홍삼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지난 명절 때 받은 녹차가 아직 남아있는데, 또 선물로 주나"라는 시큰둥한 반응이 나왔다.

화개면에 자리한 차문화전시관. /경남도민일보 DB

녹차산업이 갈수록 좋지 않은 것이다. 공통으로 입에 오르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산업화시대를 거치며 '빨리빨리'가 몸에 익은 우리네에게 느긋한 차 문화는 애초 배치되는 부분이 있었다. 이를 위해 매스컴을 통해 홍보에 나서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데 역효과가 있었다. 늘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네들이 등장해 딱딱한 격식을 설명하는 식이었다. '차 문화는 어렵다'는 인식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으로 '경제적·시간적 여유 있는 여인들이 몰려 다니며 즐기는 문화'라는 고정관념도 자리했다.

2000년대 중반 들어서는 농약 범벅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퍼졌다. 하동 화개면 어느 주민은 "당시 중국산에서 검출되면서 전수 조사했는데 국내 일부 것에서도 검출됐다"고 전한다. 그 여파가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커피 소비량이 늘면서 전통찻집이 커피전문점으로 바뀌고 있다. 녹차 설 자리가 줄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국가에서 나서 학교·군대 같은 곳에 보급하면 차 산업도 살아나고 국민 건강도 좋아지는 효과를 볼 수 있다"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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