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희 코리아드라마 페스티벌 홍보마케팅 팀장

<오프스테이지 라이브>.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개설한 지 일주일도 안 돼 ‘좋아요’ 수 10만을 돌파한 페이지다. 페이지 개설자는 진주에서 활동 중인 김재희(38) 씨다. 사회관계망 서비스 SNS에서 참신한 기획자로 불리는 그는 지역에서 쉽게 접할 수없는 다양한 문화 영역을 개척 중이다. 2014년 화두로 떠 오른, 스마트폰 등에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스낵 컬쳐’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가 궁금했다.

“김재희 감독님 잘 지내시죠. 전화 통화만 세 번째입니다. 얼굴은 한 번도 못 뵈었는데. 이번에는 제가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아니 박 기자님 무슨 일로 오시려고요.”

“오프스테이지 라이브도 궁금하고요. 온라인에서만 만났는데…. 겸사겸사 해서 진주 한번 가려고요.”

“예. 마침 1월 5일 오프스테이지 라이브 경남 첫 촬영인데 잘 됐네요. 진주 음악분수대에서 오후 2시에 뵙죠.”

어. 순조롭다. 김재희 감독이 좀 까칠하다고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통화하며 <피플파워> 인터뷰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사실 김재희 감독과는 페이스북에서 소통 중이었다. 김 감독이 운영하는 첨단영상기술포럼그룹에서 좋은 정보를 얻는 터라 일면식은 없지만 이전에 두 번 통화 한 적이 있었다.

‘영상 편집용 노트북은 어떤 것이 좋은지, 동영상 편집 기법은 무엇인지’ 등등 전화로 대화를 나누며 그를 영상감독으로 알고 있었다. 

김준영 씨의 뮤직비디오를 찍는 김재희 감독./박민국 기자

촬영현장에서 김 감독 스틸 사진도 찍고 인터뷰 질문도 할 계획을 품고 일요일 진주로 향했다.

4시간의 기다림 속에서 그를 보다

진주시 서장대 아래 남강둔치에 자리 잡은 음악 분수에는 날씨 탓인지 간간이 사람들이 오갈 뿐 휑했다.

잠시 후 넓은 음악 분수 광장에 카메라를 들고 붐 마이크를 올리고 기타를 든 일행이 보인다.

“김재희입니다. 오신다고 수고하셨죠. 제 명함입니다. 먼저 촬영준비하고 리허설도하고 좀 있다 뵙죠.”

그에게서 받은 명함에는 ‘코리아드라마 페스티벌 홍보마케팅 팀장 김재희’라고 적혀 있다.

“예 천천히 하세요. 촬영 방해 안 되게 구경하고 있을게요.”

김준영 씨의 뮤직비디오를 찍는 김재희 감독./박민국 기자

메인 카메라 김재희, 서브 카메라 김기종, 음향 마스터 김바나나 등 카메라 두 명, 음향 녹음 한 명, 그리고 라이브로 노래를 부를 가수 한 명 총 4명이 전부다. 단출한 스태프와 가수는 부지런히 카메라 동선을 밟아본다. 카메라 위치, 음향 상태, 그리고 가수의 목소리 점검 등 대본은 없지만 남강이 유유히 흘러가듯 팀워크도 부드럽게 맞추어 간다. 분위기를 깰 수 없어 인터뷰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못했다.

분주하게 준비 한지 40분 만에 ‘강준영 게으름 테이크 원’이란 오디오 마스터의 외침과 함께 첫 촬영이 들어갔다.

‘오프스테이지 라이브 경남’으로 이름붙인 이번 프로젝트는 재희 씨가 예전부터 꿈꿔 오던 작업이다.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라이브 방식을 선택한 그는 진주, 창원, 진해,사천 등 경남 6개 지역에서 6명의 싱어송라이터(직접 가사를 쓰고 작곡을 해서 부르는 가수)와 함께 요즘 유행하는 ‘스낵 컬쳐 뮤직 비디오’를 만드는 것. 이 작업은 경남문화예술진흥원 주최하고 코리아드라마 페스티벌 영상제작단이 주관하는 ‘경남 대중음악 디지털콘텐츠 제작지원 프로그램’이다.

직접 곡을 쓰고 노래를 불러 진주지역에서 손에 꼽히는 강준영 씨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스태프 노력은 시간을 붙잡고 있었다. TV에서 흔히 보았던 촬영장 겨울 비품인 간이난로 없이도 오프스테이지 라이브 녹화 현장은 훈훈했다.

“이거 TV에 나와요?”라며 촬영카메라를 보고 달려온 꼬마들의 재잘거림에도 흔들림 없이 촬영은 지속했고 시계가 3시 40분을 가르칠 때 김 감독에 입에서는 “오케이”라는 말이 나왔다. 기다린 보람이 있다.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면 질문을 해야지 하는 생각은 금세 허공으로 날아갔다.

“이동하겠습니다. 다음은 내동면 희망주유소 옆길에서 촬영 들어갑니다.” 김 감독은 오늘 촬영 분량이 두 곡이라고 했다. 준영 씨의 ‘꽃’이란 노래와 딱 어울리는 곳이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겨울 저녁 햇살이 길게 늘어진다. 인터뷰를 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마음도 급하고 몸도 추워진다.

김준영 씨의 뮤직비디오를 찍는 김재희 감독./박민국 기자

두 번째 도착한 곳, 인적도 없는 한적한 곳이다. 한눈에 들어오는 남강과 도시의 풍경이 지친 마음과 몸에 위안을 준다. 그제야 차에서 내리며 김 감독에게 인터뷰를 위해 진주에 온 목적이라고 밝혔다. 기다리는 마음은 가벼워졌지만 미안함이 밀려왔다. 고생하는 스태프에게 김 감독이 재촉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던 것.

또 예상은 빗나갔다.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준영 씨가 걸음을 뗄 때마다 나는 마른 잡초 소리가 방해됐고, 협소한 자리에서 움직이는 카메라 위치가 문제가 됐다. 몇 번의 재촬영을 끝내고 마지막 사진 장면을 찍는 다리 밑에 도착했을 때는 오늘 안으로만 인터뷰를 하면 된다는 넉넉한 마음이 생겼다.

끝내 해가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김 감독의 입에서는 “오케이 컷” 마무리 사인이 나왔다. 팀워크 하나로 뭉친 스태프들은 ‘오프스테이지 라이브 경남’ 첫 촬영을 자축했고 나는 4시간의 기다림 속에 얻게 된 김 감독과 인터뷰를 준비했다.

청년사업가 행사 스태프로 참여하다

김재희 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부산에서 전학 오면서 진주와 인연을 맺었다. 중학교 때부터 세상과 소통하려고 시작한 PC통신은 20대 시절 게임 사업으로 돈을 버는 밑바탕이 되었다. 경상대학교 생물학과 94학번인 그는 입학한 지 12년 만인 2006년 8월 졸업했다.

학업만 이수하여 사회에 진출하기에는 그의 꿈은 너무 컸다.

“94년 당시에는 진주지역에 음악 밴드가 막강했어요. 저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muzavi'라는 밴드를 결성했죠. 많은 활동은 못 했지만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 처음 친구들과 의기투합했죠. 그래도 그때 자연스럽게 배운 공연 기획이 오히려 내 인생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가 음악 밴드를 결성하고 활동하며 얻은 풍부한 예술적 감성은 IT 창업에 기반이 된다. 남보다 빠르게 접했던 디지털 세상과 결합해 홈페이지 구축, 게임 관련 아이템 사업을 등에 업고 청년 사업가로 변신한 그는 2000년 진주지역문화제 행사에 스태프로 참여한다.

김준영 씨의 뮤직비디오를 찍는 김재희 감독과 스텝들./박민국 기자

“돌아가신 중요무형문화재 성계옥 선생님과 함께 찍은 포스터가 페이스북에 포스팅 돼 있을 거에요. 의암별제라는 지역문화축제를 기획했죠. 축제에서는 독립영화 상영회도 하고 행사축제를 인터넷 생중계도 했었죠. 지금이야 보편적인 내용이겠지만 당시에는 파격이었죠.”

20대 초반부터 지역문화축제에 참여하며 배우고 익힌 그의 문화적 감각은 영상미디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축제 스태프에서 사무국장까지

그는 2005년부터 시작한 코리아드라마페스티벌에 스태프로 참여한다..

“당시 한류 돌풍이 정점에 다다를 때였죠. 진주지역이 지방문화행사의 원형을 가지고 있고 드라마로 접목된 축제라 새로운 경험에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그러다 2008년 행사를 마칠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지역 영상산업분야도 필요하다. 드라마페스티벌이 소비의 장이면 생산의 기반도 필요하다고 느낀 거죠.”

김준영 씨의 뮤직비디오를 찍는 김재희 감독과 스텝들./박민국 기자

그는 영상위원회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경남을 기반으로 영상미디어산업을 뿌리내리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창원과 마산지역에서도 거의 같은 시기에 사업의 필요성을 느낀 거죠. 필요에 의해 일을 추진하다 보니 단체가 여럿 생겼죠. 2009년 사단법인 경남미디어영상위원회를 발족했고 경남을 부산보다 큰 영상 메카로 키운다는 일념으로 사무국장 일을 시작했죠.”

커피도 주문하지 않고 시작한 인터뷰는 한 시간을 넘기고 서로 번갈아 피는 담배는 연기를 피워대고 이야기는 계속됐다.

“경남미디어영상위원회 출범 4년 만에 일에서 손을 뗐지만 제가 살면서 가장 많은 성과를 낸 기간이란 자부합니다. 지역 언론에 기록돼 있는 것이 고스란히 증명해주고 있죠. 가진 돈 까먹고 빚지면서까지 버티다 나왔지만 후회는 없어요. 기회비용이라고 생각하죠.”

그와 인터뷰를 나누며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본 경남미디어영상위원회 성과는 언론이 고스란히 검증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탄탄하게만 달려오던 김재희 씨의 개인사에는 커다란 고비의 시간이었다. 그가 개인적으로 적어놓은 페이스북 담벼락에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012년 5월 29일. 아침부터 몇 개월 밀린 방세 내라는 아주머니의 문자에 잠을 깼는데, 곧이어 직원들 급여 준다고 빌린 은행 대출 이자 밀렸다는 전화가 왔다. 담배 한 대 물고 노란 봉지 커피 타서 앉은 컴퓨터 앞에는 무슨 수입도 없고 예산도 받지 못한 공조직에 왜 소득세가 나왔는지 최최최최종 독촉장이 와있다. (중략) 어쩌다 이렇게 돼버린 거지? 나는 그저 경남미디어영상위원회에 고용되었을 뿐인데, 어쩌다 개인의 삶까지 망가져 버린 거지? 한숨 쉴 틈도 없이 사무실 전화 요금 밀렸다는 기계음의 전화까지 걸려온다. 다시 담배를 물었다.”

다시 도전하는 지역문화사업

좌절은 깊었지만 방황은 짧았다. 그가 말한 기회비용이 다시 힘을 발휘한 것이다.

김준영 씨의 뮤직비디오를 찍는 김재희 감독과 스텝들./박민국 기자

“사실 사무국장 맡기 전까지는 영상미디어분야에 전문적인 공부는 한 적이 없었죠. 그런데 각종 회의 참석하다 보니 비전공출신이라고 무시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영상, 영화, 미디어 공부를 했습니다. 이제야 배운 것을 활용할 기회가 오네요.”

그는 작년 6월 코리아드라마페스티벌에 홍보마케팅 팀장으로 재입사했다. 그리고 2013년 코리아드라마페스티벌을 알차고 뜻 깊게 홍보해 성공리에 행사를 치렀다.

“사실 축제 기간은 며칠이지만 준비는 거의 1년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상설화된 사업단을 만들려고 합니다. 위원회 사무국장을 하며 얻은 노하우를 쏟아 부어야죠.”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지역문화사업을 영위하기 위해 2014년 김재희 씨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온종일 지켜보았던 ‘오프스테이지 라이브’와 그가 배운 모든 것을 전수해주는 페이스북의 ‘첨단 영상 기술포럼’, 그리고 진주의 모든 사람을 엮어 놓겠다는 야심에 찬 계획인 ‘휴먼 오브 진주’ 등이 그가 지금 진행하는 프로젝트다.

“전 사실 감독이란 말보다는 일반사무원으로 불리길 원합니다. 기획자다, 창작자다, 이런 말보다 실제로 제가 하는 일은 사무원일이거든요. 입으로 하는 일은 믿지 않아요. 손으로 몸으로 직접 하는 일만이 자신을 증명하죠.”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그의 눈빛에 묻어난다. 끝내 커피 한 잔, 물 한 잔을 안마시고 두 시간의 인터뷰를 정리하며 마지막 질문을 했다.

“SNS통해 많은 반응을 얻어내고 정보도 쉽게 얻는데 비결이 뭡니까?”

마지막 담배를 물며 재희 씨는 말했다.

“온라인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90%가 영어입니다. 홈페이지건 블로그건 페이스북이건 등등 말이죠. 한국어는 1% 정도죠. 어디가 정보가 많겠습니까?”

그가 나에게 되물었다. 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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