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90년대 중반 TV에서 본 장면이 아닌가 싶다. 클래식 아티스트들이 피아노 재즈 트리오 형식으로, 이른바 ‘열린 연주’를 하는 콘서트였다. 아마 장르간 벽을 허물고자 시도한 것이거나, 아니면 클래식 음악도 딱딱한 외피만 지닌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문제는 연주가 어설픈 것도 어설픈 것이었지만, ‘즉흥’을 표현하는 태도가 너무 유치해 온 몸에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다. 압권은 드러머가 악보를 보고 재즈 리듬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으려는 듯한 몸짓에서 헛웃음이 절로 났다.

공연을 다 보고 내린 결론은 정말 ‘아니올시다’였다. 클래식 음악인들이 재즈를 이해하는 정도가 이런 수준밖에 되지 않나 하는 의문이 절로 들었다.

충격적인 그 공연을 본 지 벌써 20년. 그렇다면 지금 클래식과 재즈는 어떤 정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까? 크로스오버(Crossover) 뮤직이란 말이 아무렇지 않게 쓰이는 요즘 양자는 이미 자유롭게 상대 공간을 넘나들고 있다. 그리고 어설프기 짝 없던 그 시절 외투는 이미 벗어 던진 지 오래다.

선구자 칙 코레아와 끌로드 볼링

클래식과 재즈가 만나는 지점에 도달하면 꼭 짚어야할 사람들이 있다. 크로스오버 성격을 지닌 작품이나 그런 연주를 하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대표성을 들이대면 이 사람들을 먼저 꼽지 않을 수 없다.

첫 번째 인물은 칙 코레아(Chick Corea)다. 재즈 피아니스트 거장으로 불리는 그는 1982년 독일 뮌헨에서 클래식 피아니스트 프리드리히 굴다(Friedrich Gulda)와 ‘피아노 두 대가 엮어내는 즉흥’이란 공연을 펼친다. <The Meeting>이란 제목으로 진행된, 당시로서는 센세이셔널했던 이 연주를 통해 클래식과 재즈는 깊은 합일을 이룬다.

Jean Pierre Rampal

굴다는 ‘열린 피아니스트’였다. 교조적인 다른 클래식 연주자들과는 달리 타 장르에 관대했다. 그래서 그런지 전체적인 공연 흐름은 ‘즉흥’이란 제목에서 연상되듯 재즈적 필링이 가득하다. 음악만 들으면 언뜻 누가 누군지 잘 구분이 가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금방 알아차리겠지만 초심자라면 클래식과 재즈 연주법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이는 그만큼 두 사람이 음악적으로 잘 융합했다는 증거다.

재즈 스탠더드인 <Someday my prince will come>에서 브람스 자장가에 이르기까지 채 1시간이 걸리지 않은 이 공연은 이후 수많은 추종자와 추종작을 낳는다. 굴다와 코레아 또한 안주하지 않고 장르간 벽허물기 시도를 계속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명작은 계속 탄생했다.

두 번째 인물은 프랑스 재즈 피아니스트 끌로드 볼링(Claude Bolling)이다. 코레아와 굴다가 전위적 연주로 양 장르를 통합했다면 볼링은 대중적 관점에서 클래식과 재즈를 가장 잘 버무린 인물로 기록될 듯 싶다.

바로크적 우아함과 모던 스윙이…

그는 코레아에 앞서 1975년 <Suite for Flute and Jazz Piano Trio>란 음반을 발표한다. 거장 플루티스트인 장 피에르 랑팔(Jean Pierre Rampal)이 참여한 이 앨범은 재즈의 흥겨움과 클래식의 우아함이 잘 결합됐다는 평가를 받으며 베스트셀링 음반으로 자리를 굳힌다.

Suite For Flute And Jazz Piano Trio

이 앨범을 평가한 가장 멋들어진 문구를 보자. “바로크적 우아함과 모던 스윙을 매력적이고 숙련된 솜씨로 융합시킨 결과물!” 예전에 이 찬사를 보고 ‘그래 바로 이 말이야’라고 감탄했던 때가 생각난다.

일단 피아노와 어쿠스틱 베이스, 드럼이 차분하다. 그러면서도 스윙감은 제대로 살아 있다. 정교한 플루트가 앞장서고 피아노가 뒤를 이어 주 멜로디를 이끈다. 그래서 인트로를 비롯해 전체적인 흐름은 실내악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흐름을 유지하는 리듬은 재즈다. 양자가 이렇게 맛깔스럽게 버무려진 예가 이전에도 있었던가?

1984년 단골 음악카페에서 처음 접한 이후 거친 재즈에 물릴 쯤이면 가끔 이 음반을 꺼내든다. 스스로 좀 우아하고 싶을 때, 그러면서도 재즈 필링을 유지하고 싶을 때 이 앨범은 딱이다. 볼링 또한 이 앨범을 필두로 장르간 융합을 계속 시도했으며, 발표하는 앨범마다 대 히트를 기록했다. 클래식 기타리스트 알렉산드르 라고야(Alexandre Lagoya)와 협연한 ‘Hispanic Dance’는 국내에서 시그널 뮤직으로 오래 쓰인 바 있어 더 친숙하다.

서두에서 클래식과 재즈 필링을 연결하는 게 쉽지 않다고 썼지만, 원래 재즈는 클래식 문법을 토대로 탄생한 음악이다. 그래서 다른 꼴보다는 닮은 꼴이 더 많다. 흑인 문화에 내재된 스윙이 다르다면 다를까 나머지는 거개가 비슷하다.

그래서 노력만 하면 소통이 쉽다. 트럼페터 윈튼 마살리스(Wynton Marsalis)는 종종 클래식 음반을 낸다. 키스 자렛(Keith Jarrett)도 그렇다. 그들이 연주한 클래식 레퍼토리는 초일류급이다.

음악문법은 같아도 창조는 어렵다!

예전에 칙 코레아가 내한공연을 가졌을 때다. 그가 세계 민속음악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알고 주최측에서 국악 CD를 선물로 줬다고 한다. 국악이 지닌 독특한 개성에 그는 상당히 놀란 얼굴로 관심을 표명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과문한 탓인지 이후 그가 국악에 영향을 받은 작품을 내놓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바 없다. 왜 그럴까? 음악문법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설령 그가 그런 욕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음악으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클래식과 재즈가 많은 점에서 음악문법이 같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창조적으로 합일시키는 일은 그리 녹록치 않다. 그래서 굴다와 피아노 전위연주를 펼치는 코레아와, 랑팔을 기용해 실내악 분위기를 연출한 볼링이 돋보이는 것이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