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큰 소리로 울었더니 직원들이 깜짝 놀랐죠”

“<변호인> 영화를 2번 봤습니다. 처음에는 지금 있는 병원 직원들하고 봤어요. 내가 영화를 보여준다고 했지요. 직원들도 (제가 저기 나오는 인물인 줄) 몰랐어요. 내 옛날을….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나도 모르게 너무 큰 소리로 울어버렸어요. 참았던 울음이 확 터지면…, 어른 남자가 소리 내서 우는 것 있잖아요….”

지난해 연말 개봉한 영화 <변호인>이 2014년에도 극장가에서 흥행돌풍을 이어가고 있다. 단순한 영화를 넘어 시대의 흐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 속 장면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대중에게도 울림이 된 결과다. 실제 인물에게는 과거의 아픔에 대한 되새김질로 돌아오기도 한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고찰하는 과정의 연속이라면 영화는 현실적 부분에 어느 정도의 픽션을 포함하게 된다. 영화 <변호인> 역시 그 시대를 바탕으로 했지만 극의 진행을 위해 일정부분 덧씌우기가 포함됐다. 영화 속 실제 인물인 장상훈(56) 씨는 이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먼저 전두환 정권이 초기 정치력 장악 등의 목적으로 사건을 일으킨 부분이다. 전 전 정권은 사회과학 독서모임 등을 구실로 학생과 사회인 등에 대한 영장 없는 불법 연행과 감금은 물론 각종 고문 등 인권유린을 통한 허위자백을 강화한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사건은 ‘부림사건’이다.

부림사건은 지난 1981년 공안당국이 국가보안법 위반 등을 적용해 그 대상을 공산주의자로 기소한 사례다. ‘부림’이라는 용어는 1980년 ‘무림사건’, 1981년 ‘학림사건’ 등에 이어 부산지역이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약사 출신으로 현재 의료법인 베스티안부천병원 연구개발사업본부 사장인 장 씨는 인터뷰에서 이 같은 과거를 떠올렸다.

- 영화를 보던 직원들이 많이 놀랐겠네요? 두 번째는 부산에서 보셨다고요?

“직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사장님이 왜 저러나…’ 그랬겠지요? 제가 진정이 잘 안되더라고요. 영화를 쭉 보고 나와서 직원들도 어리둥절했겠지요. 극장 관객들도 황당했을 겁니다. 부천에서 봤는데, 영화를 보고 나와서 직원들한테 이야기를 해줬어요. ‘내가 저기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내가 저 사건의 주인공이다.’ 이러니 직원들이 깜짝 놀랐지요. 직원들이 이야기한 게 두 가지였어요. 한 가지는 ‘지금 우리가 자유를 누리는 것은 사장님 같은 분들이 고생해 준 덕분이다’…이건 좀 철이 든 친구고, ‘오늘 영화를 보고 자신과는 다른 세상이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자신을 다시 돌아보는 기회가 됐다’…이런 카(카오)톡도 보내더라고요. 지난 1월 3일 우리 부림사건 관계자들과 문재인(민주당, 부산 사상) 의원이 자리해서 영화를 2번째 보니까 울음이 안 나더라고요. 동지들과 같이 봤으니까…(웃음). 그날 부산에 있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들과 부산 서면에 있는 롯데시네마에 130석 정도 공간을 빌려서 봤습니다. 원래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노무현재단에서도 오고 하다보니까 자리를 빌리게 됐지요.”

   

- 요즘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결혼 주례 사진이 유명하던데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그때 노 전 대통령이 변호사셨지요. 당신이 (우리 사건을) 변호하셨고, 또 우리하고 같은 길을 가니까 노무현 변호사한테 주례를 부탁했습니다. 그 때 제 나이는 27살이었고, 당신(노 변호사)이 39살이었지요. 당신이 세상에서 첫 주례를 선 사람이 접니다. (웃음) 그 결혼식이 참 재미있었지요. 결혼식을 하고 신혼여행을 간 것이 아니고, 부산 대신동에 있는 청소년 유스호스텔을 빌렸습니다. 250명 정도 들어가는 공간이었지요. 거기서 결혼식 뒤풀이를 다 모여서 했어요. 그때가 부림사건 관련자들이 거의 출감한 시기지요. 결혼은 제가 1984년 6월 1일에 했어요. 올해가 결혼 30주년이네요. 결혼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제가 우리 집사람을 1981년 6월 5일 날 만났어요. 우리 아내는 서울사람인데, 우리 집사람은 운동 이런 것 모르고 지내다가 남편을 잘못 만난 거네요….(웃음)”

-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군인이셨어요. 거제에서 태어나서 아버지를 따라서 경기도도 가고 이러다가 안동으로 전학을 갔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5학년까지 안동에서 다녔지요. 아버지가 다시 전방(강원도)으로 가게 됐고, 어머니께서 저를 공부시킨다고 부산으로 오셨어요. 초등학교 5학년부터 대학교까지 나왔지요.

- 학창시절은 어땠습니까? 부림사건 전후 상황은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그 시절) 나와 공부했던 사람이 이진걸, 이상경 정도입니다. 근데 이상경이 먼저 잡혀가서…7월 달에 잡혀갔지요. 내가 복사해준 책이 있었나 봐요. 이 책이 복사본이니까 어디서 복사했느냐…. 그래서 (제 이름을 이야기 했어요.)…어쩔 수 없는 이야기지요. 제가 백번 이해를 했습니다. 부림사건에 잡혀갔던 고호석 선배도 제 대학 선배인거죠. ‘도대체 이 세상이 잘못된 걸 어떻게 알아야 합니까’라고 했더니 영화에 나온 것처럼 <역사란 무엇인가>부터 몇 권을 권해줬어요. 그래서 이상경, 이진걸 이렇게 3명이 모여서 책을 봤습니다. 그 때 진걸이도 학교를 안 다녔고, 상경이도 제적을 당했어요. 인맥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후배들을 꾸려서 하고 있었어요. (후배 집에 책을 가져다뒀습니다. 잡혀가서도 경찰들이 제 책을 저희 집에서 못 찾았어요.) 후배 집에 책들 뒀다는 말은 하지 않고 지켰지요. 그 친구 중 한 명이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의 주역이 됐지요. 동래경찰서에 조사를 받으러 들어갔는데 몇 차례 유도를 하더라고요. 3~4명이 시멘트 바닥에 던지기도 하고 밟고, 때리고…. 30분 정도 얼을 빼더라고요. 당시 볼펜을 손가락에 끼우는 것도 있었지요. 저보다 2살 어린 고모께서 실반지를 해주셨는데 볼펜을 끼워서…나중에 반지가 다 망가졌지요. 경찰봉으로도 맞았고요. 나중에 교도소에 가서 들었는데 대공분실에 끌려간 친구들에 비하면 고문 받은 것도 아니더라고요.”

   

- 출판사를 차린 친구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이상경이 출판사를 처음 만들 때 제가 돈을 대줬어요. 제가 1981년 9월 추석 전날에 잡혀가서 1982년 2월에 나왔어요. 집행유예지요. 1심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3년을 받았어요. 부림사건 중에서, 구속된 사람 중에서 저 혼자 집행유예를 받았지요. 16명 중에. 부산대 약대를 나왔고, 당시 군대 가기 전에 약사를 월급쟁이로 하고 있었어요. …(중략)… 저는 1982년도에 출감을 했고, 상경이와 진걸이가 1983년에 출감했지요. 1984년에 (제가) 결혼을 했습니다. (그 전인) 1983년 11월에 약국을 하려고 거제에 갔어요. (부산에 있는 친구들과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면서) 마음에 부채의식이 있었다고 봐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같이 잘못된 것에 대해서 투쟁하고 싸우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그 때 상경이가 글을 쓰는 친구였지요. 그래서 상경이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했더니 ‘출판사를 해보고 싶은데 돈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얼마 정도 드느냐고 물으니까 ‘2000만 원 정도면 된다’고 했어요. 당시 저희 집안도 어려워지고 있었는데, 그래도 제가 약국해서 처음 번 돈을 여기 냈어요. 거기가 ‘친구출판사’입니다. 여성 혁명운동에 대한 작품인 <사이공의 흰 옷>이 있지요. 이 책이 거의 100만 권 팔리면서 출판사가 살아났습니다.”

- 당시 운동 상황은 어땠나요? ‘간첩 약국’이라 불린 사연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그때는 보호관찰법이 있었습니다. 국가보안법 등 형을 살고 나오면 보호관찰법의 대상이지요. 담당 형사가 있었어요. 제가 거제도에 갔을 때 계속 담당형사가 있었습니다. 거제경찰서 형사들이 처음에는 나 같은 사상범을 드물게 봤어요. 약국을 하러 왔으니까…. 이 친구들은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이라고 하니까 간첩하고 동일시했지요. 이웃집에 미장원(미용실)을 하는 아주머니 남편이 오드만(오시더니) ‘장 약사, 니 간첩이가. 형사가 와서 그러더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웃음) ‘간첩 약국’이라니까 사람들은 신기하지요. 그때는 의약분업 전인데 소문이 많이 났어요. 한 번은 고성에서 사람이 와서 물어보더라고요. ‘간첩이 하는 약국이냐?’라고 했지요. 친구출판사…약국으로 벌어서 한 게 출판사였고, 1986년부터 노동자들하고 (운동을) 했는데 그때 만난 7명 노동자들이 다 힘들었어요. 대우조선 노동운동이 격화되면서 그 중에 한 친구는 구속이 됐고, 또 한 친구는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지요. 노 변호사가 그때 국회의원이 됐는데, 김우중 전 회장이 그 친구에게 위로금 5000만 원을 줬어요. 그 시절에는 문제를 일으키면 다른데…대우자동차나, 이런 다른 사업장으로 보내던 시절이지요.”

   

- 노 전 대통령과의 다른 에피소드는 어떤 게 있을까요?

“거제에서 약국을 하던 시절 이야깁니다. 거제도에 김영식 신부가 계셨지요. 그 신부님이 아마 노(무현) 변호사를 불렀을 겁니다. 성당에서 노동법 강의가 있었어요. 제 ‘주례선생님’이 오셨으니까 아내하고 나하고 내려갔지요. (웃음) 장승포성당이었습니다. 근로기준법에 대한 강의를 하고, 노동자 권익을 위해 노동조합 설립이 중요하다는 말씀이 요지였지요. 그 강의 말미에 ‘이거 오늘 시간이 없으니까 충분히 말을 못했고, 의문이 나는 사항이 있으면 옥수동 우당약국을 찾아가라’고 했어요. ‘저기 우당약국 약사님이 계시다’라고요. 그런데 그 다음날 진짜 노동자가 찾아 왔어요. 한 명, 두 명 이런 식으로 오셨는데 전부 7명이 왔어요. ‘노동조합을 어떻게 만드느냐’와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대우조선 노동조합이 없었어요.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현실은 굉장히 어려웠지요. 산재사고도 많았고, 저임금이었고…. 노동자들이 문자 그대로 좀 어려운 시기였어요. 그때 약국을 거제도에서 한 지가 3년이 넘어가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좀 있었어요. 그래서 동네에 방을 한 칸 얻어서 ‘노동조합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대해서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87년에 6·10항쟁이 터졌지요. 민주화의 봄바람이 거제에도 왔습니다. 이석규라는 노동자가 옥포에서 최루탄을 맞았어요. 심장부위에 맞아서 즉사했습니다. 이석규 (열사) 사건 당시 저는 약국에 있었어요. 그런데 대우조선에 다니는 제 친구가 와서 오후 5시쯤 병원으로 쫓아갔더니… 죽었지요. 영안실로 바로 갔습니다. 약국(을 운영)하고 그러니까 영안실 직원들도 알고 있었지요. 최루탄 파편 자국이 7개 정도 있던 것 같아요. 저녁이 되니까 노동자 500~600명이 모여들기 시작했지요. 그 때 노동자들도 통일된 게 없으니까 중구난방이었어요. 저는 그 동네 약사니까 사람들이 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 그래서 어떻게 대처하셨습니까?

“노동자가 죽은 문제인데 보통 문제가 아니라서 그때 노무현 변호사한테 연락을 했지요.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노동문제 연구소 형태로 꾸리고 계셨습니다. 연락을 드리니까 부산에 연락이 된 겁니다. 서울도 연락이 이뤄지면서 우리나라에 유명한 분들이 많이 오셨지요. 이상수 변호사와 노무현 변호사가 거기서 인연을 맺습니다. 회사 측하고 유족 측하고 계속 갈등이 생기면서 장례대책위원회를 꾸립니다. 장례대책위원회에 노무현 변호사가 들어가지요. 영구차하고 대우조선 버스 5~6대가 남원으로 가는 도중에 고성에서 백골단 습격을 받았어요. 많은 피해가 있었습니다. 저는 고성에서 거제로 왔다가 약국 문을 닫고 10일을 도망갔지요. 노 변호사는 그 일로 구속이 됐어요. 영화 마지막에서처럼 6·10 항쟁으로 구속된 게 아니고 실제로는 ‘장례식 방해혐의’ 이런 식으로…노동법에 제3자 개입 금지법 같은 게 있었으니까요.”

   

- 이후에도 지역에서 운동을 이어가셨습니까?

“1987년에 노동운동이 어느 정도 줄어들고, 대우조선 노동조합이 생겼는데도 우리가 생각하는 노동조합은 아니었습니다. 지역에서 문화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때 전교조 전 단계였던 전국교사협의회가 막 만들어지려던 시점이었습니다. 전교협에 참여하는 교사들과 소통하고 문화운동을 하는 것이 중요하겠다고 생각해서 극단을 만들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처음 쓴 이름이 ‘마당’이었습니다. 약국 근처에 공간을 얻어서 낮에는 카페 밤에는 공연을 했는데, 첫 공연으로 김지하의 ‘밥’을 희곡으로 올렸어요. 그런데 객석에 일반 관객만큼이나 형사가 왔지요. 주목을 받아서 카페 주변에 형사들이…. 그래서 거의 3000만 원 정도 잃고 2년 만에 망했지요. (웃음) 그래서 다시 생각한 게 신문사였어요. <거제신문>을 창간했습니다. 1989년으로 기억합니다. 신문 창간 후 3년 정도 제가 꾸렸어요. 그것도 경영난에 다른 사람한테 넘겼지요. 1995년에는 지방선거가 있었습니다. 그 때 기초의원에 나섰지요. 거제시의원에 당선됐습니다. 그때 한 번을 했는데 정치가 나한테는 참 어렵더라고요. 힘이 들어서 한번 하고 그만 뒀습니다. 이후에 약국을 하고 있는데 2001년도에 연락이 왔어요. 당신(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나서는데 오라고. 자연스럽게 노 대통령 경선 과정부터 선거를 돕게 됐고, 결국 대선 과정에서는 거제시 선대위원장을 맡아서 했습니다. 이후 한국항공우주산업에서 감사로 근무했습니다. 우리 같은 운동권 출신들이 산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쉬운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 일정부분 이해를 갖는 좋은 기회가 됐지요.”

- 앞으로 계획을 갖고 있으십니까?

“거제에 다시 내려가고 싶어요. 지금 56살인데 4~5년 전후로, 환갑 전후로 거제에 가서 약국을 하면서 고향 사람들하고 호흡하면서 살고 싶어요. 거제는 제가 태어난 곳이고, 대학을 졸업하고 젊었을 때 이상을 실현해보고자 노력했던 곳입니다. 우리가 자랄 때는 사회가 굉장히 비틀어져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까지 배웠던 것들이 대학에 와서 부정당하는 사회였지요. 우리 사회가 굉장히 내용적으로는 건전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고향에 돌아가서 고향 사람들하고 어울리면서 내가 다시 고향에 어떤 부분을 기여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을 찾아서 밑바탕부터 배우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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